2010년 6월 11일
마음까지 커가는 큰애기들
우리 아파트 하늘뜨락에 핀 산실베리아
목요일 저녁 시간에 구내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다. 연구실로 돌아오는데 로비(학생 휴게실)에서 홍자와 람자 그밖에 우리반 아가들 5,6명이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뚝 그친다. 지나가는 선생을 보고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뭔가 참견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모르는 체 하자. 다툼이 있었겠지. 의견 충돌이 있었겠지. 뭔가 서로 섭섭한게 있었겠지. 그런거는 저희들끼리 해결하는 거야.
식사 시간이 끝나고 자습이 시작되는데 반장인 현자가 찾아왔다. 람자가 뒷골이 많이 아파서 보건실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게 하는게 좋겠다는 얘기이다.
"왜? 얼마나 아프길래. 내 가 볼까?"
"선생님, 그냥 제가 알아서 데리고 갈께요."
손으로 막는다.
"아니 내 가 봐야지."
난처한 눈치이다. 아- , 내가 가면 안되는 큰애기들의 아픔이구나. 여기서 멈추었다.
"그럼 그냥 집으로 보내지?"
"아녜요 선생님 제가 봐도 잠깐 쉬면 괜찮을 거예요."
愚子는 어쩐지 개운하지 않았지만 현자를 믿었다. 잠시 있다가 보건실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을 지나치며 보니 람자도 현자도 없다. 분위기는 평소와 같다.
보건실에 내려가 보았다. 깜깜하다. 문이 잠겨 있다. 담당 선생님이 퇴근했으니 잠겨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였다. 愚子는 아이들이 어른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여고생이 자기네 선생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교육은 없다.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려면 웬만한 아이들의 요구는 들어 주어야 한다. 특히 야간자율학습을 빠지려는 아가들에게 핑계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솔직히 얘기하면 들어주고 달랠 수 있으면 달래는 것이 좋다.
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혹 거짓말을 했더라도 나를 완벽하게 속였을 것이다. 그러나 愚子는 그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현자는 현자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정말 믿는다. 거짓말을 했다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하얀 거짓말일 것이라고 믿는다.
교실에 현자가 없다. 람자도 없다. 이 아가들이 어디 갔을가? 람자가 심하게 아파서 내게 알릴 새도 없이 병원에라도 갔을까. 조금식 걱정이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 궤간을 한 바퀴돌았다. 아이들은 태연하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내게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이 아가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일 것이다. 바보처럼 그냥 나왔다.
8시 가까이 되어서 현자가 왔다. 현자는 그간의 일을 대충 얘기했다. 람자와 홍자가 서로 섭섭한 일이 있어 다투었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섭섭한 건지 묻지 않았다. 누가 더 나쁜 아가인지 묻지 않았다. 원인은 아주 별스러운게 아니다. 그런데도 람자가 코너에 몰린 것이다. 愚子는 현자의 능력을 믿는다. 다만 그의 시간을 뺏어야 하는 일이 미안할 뿐이다.
"네가 해결해라."
이튿날 자주 교실에 가서 분위기를 살폈다. 람자의 얼굴에 우울이 뚝뚝 떨어진다. 홍자는 태연하다. 교실에 우리 아가들이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교실이 어수선하다니. 愚子는 혼자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타고난 심성이 착한 아가들이니까 기다리면 다 해결될 것을 믿었다.
점심시간에 람자가 왔다. 머리가 아파서 자율학습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愚子는 대뜸 물었다. 아니 그냥 푹 찔렀다.
"어제 왜 울었어?"
"공부가 안되어서요."
"공부 안돼서 우는 거 하고는 좀 다른 울음인데"
말을 안한다. 캐 물었다. 어떻게 다투었든 잘못은 양쪽에 있다. 그러나 다툰 사람들이 잘못이 상대에게 있다고 하면 해결은 어렵다. 그런데 착한 람자는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 사과해라. 그게 이기는 거야."
"용기가 안나요."
"그래도 해."
"애들이 곁에 있어서 더 어려워요."
"그럼 오늘 일찍 집에 가라.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에 전화로 하든 이멜로 하든 해결하고 월요일 학교에 와라. 해결 못하면 학교도 오지 마라."
愚子는 착한 람자를 믿었다.
월요일 람자는 얼굴에 윤기가 난다. 교실은 다시 화기가 넘친다. 복도에서 만나 슬쩍 물어 보았다.
"다 해결 됐어요."
과정은 묻지 않았다.
"그래 훌륭하다. 많이 컸다. 우리 람자. 기특하다. 그러면서 크는거야. 그런데 선생님이 널 걱정하는 것만큼 람자는 선생님을 걱정하지 않는구나."
"왜요?"
"해결되었으면 얘기를 해 줘야지."
"죄송해요. 선생님."
람자의 얼굴에는 믿음이 가득하다. 사랑이 가득하다.
愚子는 람자를 한 번 안아 주었다. 아가들은 고통스러울 것도 없는 일을 고통으로 겪으며 이렇게 이겨내는 동안 커간다. 아주 큰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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