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問愚答 -
천지에서
지난 4월 어느날 현자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찾아 왔다.
"선생님, 궁금한게 있는데요. 여쭈어 봐도 돼요?"
"응"
"선생님, 너무 무뚝뚝해요."
"나도 너무 궁금해서 그래. 빨리 물어 봐."
"선생님 그런데요. 교원이 뭐예요?"
"교원? 그건 왜?"
"저기 행정실 출입문에 써 붙여 놨어요."
"뭐라고 써서 붙여 놨는데?"
"학생, 교원의 택배는 교무실로 어쩌구----."
이크, 큰일이네. 애들이 봤구나. 그냥 지나칠 줄 모르는 현자 눈에도 그 글귀가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구나. 행정실에서 학교의 모든 택배를 전달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택배 배달원에게 일일이 안내하기는 번거로운 일이다. 그래서 문짝에 그렇게 써 붙여 놓은 건데 현자의 이쁜 눈에는 저희들의 '선생님'이 그냥 '교원'으로 쓰인 것이 눈에 가시가 된 것이다. 이 녀석이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어른들의 일을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변명할 말이 없다. 대답이 궁하다. 그냥 교육행정의 눈에 우리는 그냥 '교원'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버려? 아! 이럴 때는 조금 비겁하지만 愚答으로 도망가는 법이 있다. 병법에도 줄행랑이라는 게 있다는데---
" 응 그거 '교원'이란 말이야. 너 박만○ 선생님 좋아하지?"
"예, 존경해요."
"박만○ 선생님이 바로 교원이야."
"그건 왜요?"
"한국교원대학교를 나오셨거든"
"으----응, 역시 선생님다운 답이셔요. 그럼 김재○ 선생님은요?"
"아아 그 선생님은 사범이셔. 공주사범대학을 나오셨거든"
"그럼 선생님은요?"
"나? 나는 선생님이지. 나는 교원대학교도 사범대학교도 안나오고 청주교육대학교를 나왔잖아. 교육이니까 선생님이지. 안 그래?"
"오오라, 오오라, 그렇구나."
비판의 꼬랑지를 놓친 영리한 현자는 우두커니 서서 부끄러운 愚子의 눈을 바라본다. 아마도 愚子의 퇴색한 눈동자 그 너머에서 부끄러움까지 찾아 가졌으리라. 무기력의 부끄러움을 말이다.
愚子는 오늘 스스로 교원이 아니라 선생님을 택했다. 스님들도 못 깎는 머리를 愚子는 스스로 깎아 가진 것이다. 다만 교원으로만 생각하는 교육행정으로부터 선생님으로 탈출했다. 愚子 혼자만 우리 아가들에게 선생님이 되었다. 아가들아 나는 선생님이다. 너희의 선생님이다. 교원대학을 나오신 박선생님, 사범대학을 나오신 김선생님 죄송합니다. 누가 거길 나오시랬슈?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지만, 영리한 아가들을 가르치기는 이렇게 어렵다. 일거수 일투족이,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모두 敎材이다. 그러나 愚子를 다만 교원으로 아는 이들에게 교원이란 표찰을 떼어 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아이들 앞에서 말이다. 아가들아 愚子는 이렇게 부끄럽다. 부끄럽지만 이쁜 너희에게만은 선생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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