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2010년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 -이천 여주-

느림보 이방주 2010. 6. 13. 22:52

2010년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   - 이천 여주-

 

1. 좋은 날 : 2010년 6월 12일

2. 좋은 곳 : 이천 도자기공원, 여주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3. 좋은 사람들 : 한국수필작가회 회원(청주 회원들은 박영자, 김정자, 이효순 수필가)

 

오늘은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하는 날이다. 한국수필작가회는 한국수필지를 통하여 등단한 수필가들의 모임이다. 나는 1998년 등단했지만, 한국수필가협회만 가입하고  작가회 가입은 미루었다가 2000년 경에 가입했다. 가입후 10년 동안 1년에 한두번은 모임에 꼭 참석했다. 대개 모임은 서울에서 하기 대문에 참석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하는 정기 총회겸 문집 출판기념회, 세미나, 문학기행 중에서 가능하면 참석했다. 그리고 이사로도 4년인가 역임했다. 작품 발표도 하고 지방 회원으로 열심히 참석한 편이다. 그런데 2008년 최원현 회장 재임시 논산 지역 문학기행에 참석한 후 대부분 모임이 평일에 있어서 참석할 수 없었다.

 

금년은 김희선 회장과 이건우 사무국장께서 다행히 학교가 노는 토요일에 문학기행을 잡아 주어서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참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임을 이천 도자기공원에서 한다고 해서 날짜를 꼽으면서 기다렸다.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일정은 이천원조쌀밥집에 12시 30분에 모여 점심을 먹고, 도자기 공원에 들렀다가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를 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자기 공원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가면 도자기도 몇 점 구해 오고 글감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0시 30분쯤 청주 회원들을 내 차에 태우고 중부고속도로로 들어가 서이천 IC로 나와 네비게이션이 일러 주는 대로 원조이천쌀밥집에 12시 15분 경에 도착하였으나 서울 회원들이 도착되지 않았다. 서울 회원들은 1시가 다 되어서 도착하였다. 차가 밀렸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회원들이 매우 반가웠다. 그간 새로운 얼굴도 많았다. 어떤이는 나더러 신입회원이냐고 하는 이도 있었다. 알고 보니 2008년에 등단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나더러 쉰 살을 막 넘어 보인다고 해서 그냥 웃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2시 30분이다. 그러면 영릉을 일정에서 빼도 될 것 같은데 도자기공원을 뺀다는 것이다. 많이 섭섭했다. 그냥 되돌아 오고 싶었으나 참고 대형 버스 뒤를 따라 다녔다. 도자기 공원은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 덕택으로  글을 쓰고 살지만 글은 도자기에서 더 잘 생성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쌀밥집은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마당이 아주 넓다. 마당가에는 뽕나무도 두 그루 있고 오디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런 집에 장독대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이 가보니 형식이었다. 채소차가 들어왔다 나간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뜰에 이천쌀을 판매하고 있다. 굉장히 비쌌다. 10kg에 27000원이다. 그러면 한가마에 216000원이라는 말이다. 진천 덕문이쌀은 한 가마에 150000 원인데 얼마나 비싼 것인가? 덕문이 쌀도 이천쌀만 못지 않은 쌀이다. 실제로 돌솥밥은 덕문이쌀로 지은 밥맛에 비하면 어림 없었다.

 

그런데 점심 때가 되어도 새로 들어 오는 손님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차림을 찍기 위해 우리가 예약해 놓은 방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12시 30분 예약이라 돌솥밥이 이미 나와 있다. 다 식어 맛은 없을 것 같았다. 주방앞에 이천 도자기를 판매하고 있다. 예쁘다 사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서 사기가 좀 그래서 참았다.

 

 

 이천 원조 쌀밥집

 쌀밥집 앞 뽕나무

 쌀밥집에서 판매하는 이천쌀

 

원조이천쌀밥은 국도 없었다. 돌솥밥이라 그러려니 했다.  장떡, 풋고추찜, 콩나물무침, 총각무우김치, 느타리볶음, 상추, 된장찌개, 꽁치구이 굴비 구이, 묵나물, 얼갈이김치, 잡채, 제육 등 그 정도였다.  장떡은 경기도 식인지 매콤한 맛이 없었다. 게다가 빛깔까지 블그레한 빛이 없다. 청주식으로 고추장을 적당하게 풀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붉은 빛이 나야 한다 입에 넣으면 구수한 장냄새가 풍겨야 제맛이다.

풋고추를 밀가루에 버물여 쪄서 양념에 무쳐낸 것이 풋고추찜인데 물기가 흘렀다. 오래된 모양이다. 맛은 매운 맛이 언제였는지 사라졌다. 콩나물무침은 입에 대지 않았다. 혹 그게 제일 맛난 것인지도 모른다. 상주 두 장을 손에 올려 놓고 돼지고기 수육을 한 점 올려 된장을 발라 싸서 먹어 보았다. 아, 새우젓을 뺐구나. 다시 한 점 올려 보았다. 살밥에 어울리는 그런 맛은 아예 없었다. 

꽁치구이 굴비구이도 다른 맛은 없었다. 얼갈이 김치는 사천에서 먹었던 봄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된장찌개에 기대를 걸어 보았다. 짜다 구수한 맛은 어디 갔는가? 그래도 할 수 없이 된장찌개와 점심을 먹었다. 무장아찌, 고추장아찌, 깻잎 장아찌, 잘익은 묵은지 같은 것들이 살밥과 어울리지 않을까? 

특징이 없다. 게다가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이천 쌀밥이 어쩌면 그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천의 쌀밥정식 같은 것도 특정화시키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행정가들의 몫이다.

 원조이천쌀밥집 차림

 

그래도 우리는 막걸리를 나누며 환담을 했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은 그새 많이 늙어 보였다.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인 분은 김경실 선생님이다. 내 글을 특별히 생각해 주신다. 아마도 청주여고 백합문학 출신이고 내가 백합문학동아리 지도교사였다는 연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글이 정말 좋아서였으면 더 좋겠다. 나더러 한국수필가협회에 다시 가입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점심 식사를 하며 환담

주방에 있는 찻잔들 -판매중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원들은 어디론가 떠난다고 한다. 사무국장에게 물어보니 도자기 공원으로 간다고 한다. 옳다 되었다. 그런데 차를 가지고 가지 말고 두고 가란다. 버스를 타고 가면 다시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편하다. 청주에서 함께 가신 회원들은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차에 모두 올라탄다. 버스를 따라갔다. 그런데 도자기공원 앞을 지나 그냥 달린다. 여주 땅이다.

 

도착한 곳은 영릉이다. 비가 많이 내린다. 비를 맞으며 영릉을 참배하였다. 참배객들은 모두 참배객이 아니다. 그냥 구경꾼들이다. 일본에 갔을 때 신사를 둘러보면서 일본인들이 지키는 예의는 왕조시대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임금에 대해 예의를 모르는가? 세종대왕을 거룩하다고 하면서 그 앞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어떤 수필가는 주저하는 나를 보고 "세종의 자손이지?"하고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똑똑한 것인양 한다. 이것은 모두 식민치하의 잔재라는 생각이 든다. 릉침에서 예의를 지키고 경건하게 참배하는 것이 왜 전근대적인 일인가?

 

능제향을 지낼 때는 신도를 걷지 않는다. 헌종대왕의 능인 경릉 제향에 초헌을 맡아본 일이 있다. 정자각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헌관과 찬의 내외봉작 뿐이다.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마음으로라도 경건하게 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왕릉이 모두 유네스코 문화재가 되었다. 세계 문화계에서도 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문 옆의 英陵 寧陵 안내도 

 대왕의 꿈 사진전 포스터가 있는 정문

 

영릉英陵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녕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를 따랐다.

1446년(세종 28)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의 서쪽 산줄기에 쌍실을 갖춘 능이 조성되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하여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 때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 하여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1469년(예종 1) 현 위치로 옮겼다.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였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영릉寧陵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인데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엔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왕릉 바깥쪽으로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고, 봉분을 감싸고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동자석(童子石;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는 십이방위 문자를 새겼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다시 출현하였으나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왕릉 배치에 있어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능에 갖추어진 석물은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이다. 왕비릉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배치는 왕릉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禁川)이 흐른다.

 

<장영실>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외 여러 과학적 도구를 제작 완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소주, 항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張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세종 15) 정4품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 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당하였다. 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세종 시대의 천문 관측기구들

 

 현주일구

 

조선시대에 만든 휴대용 해시계로 1437년 세종 19년 4월에 정초·장영실·김빈·이천·김돈 등이 만들었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해시계 제작에 대한 최초의 공식기록인 《세종실록》에 의하면, 현주일구는 1437년(세종 19) 4월에 정초(鄭招)·장영실(蔣英實)·김빈(金?)·이천(李蕆)·김돈(金墩)등이 만든 것으로, 중국 원대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영향과 전통을 이은 것이다.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이 되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자침(磁針)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게 하였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으로 보인다

 

 천평일구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휴대용 해시계로 시표와 시반이 수직을 이루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천평일구는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을 이루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현주일구와는 현주장치(懸珠裝置)를 빼고 수평을 잡기 위한 원지(圓池)를 하나 더 두었다는 점이 다르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앙부일구

 

조선시대의 대표적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로 1908년에 강문수(姜文秀)가 제작하였다. 가로 3.1㎝, 세로 7.2㎝, 높이 3.8㎝ 크기의 옥돌에 소형 나침반을 붙여 만든 휴대용이다. 반구형(半球形)인 해시계 면의 지름은 3cm이고 나침반의 지름은 1.9cm이며 나침반 주위에 24향(向)이 표시되어 있다. 나침반과 일구 사이에’仰釜日晷(앙부일구)’라는 글씨를 새겨넣었고 해시계반 아랫부분에는 ‘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북극고삼십칠도삼십구분일십오초)’라고 전각(篆刻)하였다. 해시계반 내부에는 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 등의 시간과 시각선을 새겨넣었고, 해시계 옆면 양쪽에는 하지에서 동지까지의 절기를 표시해놓았다. 2002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일성정시의

 

조선시대에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데 사용한 의기(儀器)이다. 1437년(세종 19)에 4개를 만들어 만춘전, 서운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두었다. 지름 68㎝로 구리로 만들었다.

지름 68cm. 재료 구리. 1437년(세종 19)에 4개를 만들어 만춘전(滿春殿)과 서운관(書雲觀),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각각 두었다. 그 구조는 원형의 의기를 세 겹의 원(圓)으로 갈라, 맨 가의 원에는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가운데 원에는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그리고 맨 안쪽에는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을 배치하였다.

주천도분환은 매도(每度)를 4분으로 나누어 주천도(周天度:公轉度)를 새기어 천체의 공전을 재었고, 그 안의 일구와 성구의 백각환은 매각(每刻)을 6분으로 하여 백각(百刻:12시)을 새겨 일구는 낮, 성구는 밤의 시간을 재도록 하였다. 이 밖에 소정시의(小定時儀)라는 휴대용 일성정시의도 만들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천문도이다. 여기는 그 모형이다. 1687년(숙종 13)에 보물 제837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기본으로 하여 17세기 말기부터 18세기 초기 사이에 종이에 필사한 것이며, 하늘의 모양(별자리)을 차례대로 나눈 그림이란 뜻이다. 여러 겹의 장지를 겹쳐 만들었으며 구성과 내용에 누락된 곳 없이 상세히 적어 민간인을 위한 천문도와 차이가 있다.

화면 제일 위쪽에는 칸을 나누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天象列次分野地圖’를 행서체로 썼으며, 그 아래에는 천문도와 명문이 적혀 있다. 제작 경위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천문 역법을 익히기 위해 음양과(陰陽科) 출신의 집안에서 교재용으로 만들었거나 관상감(觀象監) 내부에서 포폄고과(褒貶考課)를 위해 잘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천상열차분야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고 식별이 쉽도록 별자리의 크기와 색깔의 차이가 확연하다. 보존상태, 내용, 과학 문화재가 매우 희귀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받고 있다. 2007년 9월 7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규표

 

규표는 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365와 1/4일)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한 도구였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表가 정오에 만드는 해의 그림자 길이를 수평으로 눕인 길이를 눈금이 있는 圭로 재서 일년중 가장 긴 날을 동지로, 가장 짧은 대를 하지로 정했다. 동지와 하지의 중간에 이른 때를 봄에는 춘분, 가을에는 추분이라 하고  이 4절기를 뺀 나머지 20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 하루 중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는 정오이며 규를 설치한 방향은 정확하게 남북이다. 이 규표는 세종 19년(1437년)에 만든 것을 10분의 1로 축소한 것이다.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로 선기옥형, 혼의, 혼의기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기옥형(璇璣玉衡)·혼의(渾儀)·혼의기(渾儀器)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추론에 불과하나,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1433년(세종 15)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 등이 그 제작을 감독하였다. 이로부터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天文曆法)의 표준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1657년(효종 8)에는 최유지(崔攸之)가, 1669년(현종 10)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각각 만들었다. 이중 송이영의 것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펴 추(錘)를 시계장치의 동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된 송이영의 혼천의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혼천의는 두 추의 운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여러 개의 톱니바퀴에 의하여 연결되었는데, 이는 육합의(六合儀)·삼진의(三辰儀)·지구의(地球儀)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육합의는 24향(向)의 글자가 새겨진 지평환(地平環), 수직으로 주천도(周天度)가 새겨져 있는 천경흑쌍환(天經黑雙環), 위로 36° 기운 북극과 아래로 36° 기운 남극에 걸쳐 주천도가 새겨진 천위적단환(天緯赤單環)으로 이루어져, 동서남북·천정(天頂)·천저(天底)를 정하게 되어 있다.

삼진의는 삼진의 흑쌍환(黑雙環)·적도단환(赤道單環)·황도단환(黃道單環), 그 안에 백도단환(白道單環), 제일 안에 양극의 축에 걸쳐 있는 흑도단환(黑道單環) 등으로 이루어졌다. 흑도단환에는 12궁(宮)·24기(氣)와 28수(宿)가 양면에 각각 새겨지고 360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백도단환에는 27개의 못으로 분할하여 28수를 나타냈다. 지구의는 남북극을 축으로 시계장치에 연결하여 1일 1회전하게 하였다.

 자격루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세종대왕릉. 세종 16년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이다. 

1434년(세종 16) 왕명으로 장영실·김조·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시(時)·경(更)·점(點)에 맞추어 종과 북·징을 쳐서 시각을 알렸으며, 경복궁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있는 것은 4개의 파수호(播水壺)와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와 시보장치로 되어 있다.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 살대가 떠오르면 부력(浮力)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해지고,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 한쪽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 나무로 된 인형 3구가 종과 북·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인다. 나무인형 둘레에는 12신을 배치하여 1시부터 12시의 시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 물시계는 1455년(단종 3) 2월까지 사용한 뒤 철거했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438년(세종 20) 경복궁 서쪽 흠경각에 설치한 것은 종이로 7척 정도 되는 산 모형을 만들고 그 속에 옥루(玉漏)와 기계바퀴를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여기에 금으로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속에 두고 낮이 되면 밖으로 나타나게 하여 하루 1바퀴씩 돌게 하였다. 이 물시계는 명종 초기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554년(명종 9)에 다시 만든 것이다.

세종 때 만든 것은 모두 없어졌으며 유일하게 덕수궁에 남아 있는 국보 제229호는 1536년(중종31)에 장영실이 만든 것을 개량한 것이다. 이 시계는 효종 이후부터 조선 말기까지 표준시계로 쓰였고 항아리 모양의 큰 파수호 1개와 작은 파수호 2개, 원통 모양의 수수호 2개, 부력에 의해 떠오르는 살대가 남아 있다.


 재실 : 왕의 꿈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김경실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영릉비

 능침에서 바라본 세계 : 대왕은 날마다 혼유에 나와 앉아 세상을 내다 보실 것이다.

 

영릉을 떠나며 생각하니 참으로 오늘 경거망동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능침 위까지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설쳤으니 말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왕릉을 그저 문화재로 생각한다. 유네스코에서도 문화재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종묘나 왕릉을 국민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런 생각이 고루한 것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조선 만큼 투명한  정부도 없었고, 조선만큼 인권을 중요시한 국가도 없었으며, 조선만큼 서민 정치를 한 정부도 없었으며, 조선만큼 낭만적이고 문민정치를 시행한 정부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선을 썩어빠진 정치, 부끄러운 조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식민사관이다. 일제의 조선 폄하 술수에 속은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제 우리 문화는 서구의 문화를 옮겨 심은 것이라는 이식문화론도 극복되지 않았는가?

 

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세종은 가장 서민적이며, 가장 민족적이며, 가장 낭만적이며, 가장 과학적인 정치가였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정신을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정보화하기에 가장 적절한 문자가 바로 한글이 아닌가? 이제 세계 여러나라가 우리 한글을 자기네 문자로 만들날도 머지 않았다. 그밖에 위의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구들은 모두 서민과 백성을 위한 기구들이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 들어오면 경건해져야 한다.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돌아 나오며 다시한번 능침을 바라보았다. 죄를 짓고 가는 기분이다. 

 

명성황후 생가로 차를 돌리면서 세종성왕의  발자취를 마음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명성황후는 비운의 여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양가집 규수로 그냥 살았다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해로 하지 않았을까. 생가를 둘러보고 그런 생각이 더 짙어졌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은 생가를 보면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영의정(추존이지만)까지 지냈다면 여주 고을에서는 큰 기침을 내고 살았을 것ㅇ니데 말이다. 그런데 그 분이 태어난 집은 아주 소박하다. 사실은 숙종비인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영의정까지 지냄)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살면서 몇 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지킨것이 아닐까?

 

뒤에 나즈막한 산이 있고 앞에는 들이다. 풍광이 아주 좋다. 행랑채와 부속건물은 다시 지었으나 안채는 옛 그대로라고 한다. 방들이 자그마하고 마당도 아담하고 대청도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행랑에서 중문을 지나 안채로 통하고 안채에서 쪽문을 지나 별당으로 가는 길이 모두 아늑하다. 뒤안에는 모란이 줄을 지어 가꾸어져 있다.

 

별당에서 뒷문을 열고 나가니 민유중의 신도비가 서 있다. 비신을 받치고 앉아 있는 거북이 힘차게 목을 빼어 묘로 올라가는 길을 바라보고 있다. 황후는 달밝은 밤이면 이 고향집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일본, 러시아, 중국 친일파, 친러파,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된 나라의 안주인으로 고집불통 시부인 흥선군과의 사이에서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을까? 탄강구리비 앞을 지나 그냥 마당에 앉아 푸른 산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냥 이렇게 말이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대한 제국 '고종황제의 비(妃). 국내외적 혼란기에 흥선대원군과 가족 및 정치적 대립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고, 개화정치, 임오군란, 갑신정변, 외세의 침입 등 큰 정치혼란시마다 대원군과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다. 개국정책으로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에는 청군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았다. 국내에서 일본 세력이 강화되자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압박하자 일본 공사가 이끄는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完和君)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그 아들 재면(載冕),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1873).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다(1876).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비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자 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청군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고, 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비를 난자살해(亂刺殺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을미사변 乙未事變).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한다.


 명성황후 생가 안내

 명성황후 기념관

 추모비

 기념관 앞에서

 생가

 

명성황후 생가

1973년 7월 10일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와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넓은 바깥마당에서 솟을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그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다.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구조로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꺽어져 방(1칸 반), 부엌(3칸), 광(1칸 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명성황후

 인현왕후의 부친인 병조판서 민유중의 신도비

 측면에서 바라본 생가가 더욱 고즈넉하다.

 

생가에서 나와 버스로 갔더니 회장님과 사무국장이 여기서 헤어지자고 한다. 5시가 넘었으니 더 갈 수도 없다. 바로 여주 나들목으로 들어가 영동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돌아왔다. 청주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 넘었다.

 

집에는 아내가 부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저녁을 먹었다. 이천쌀밥을 먹어서 그런지 진천 덕문이 쌀밥인데도 밥알이 입안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이날 남아공월드컵 첫 경기에서 그리스를 2:0으로 완파했다. 우리 젊은 선수들은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싸움판인 정치계, 본질을 잃은 교육계, 방황하는 기성세대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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