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이 오시지 않는 날은 옆 반 담임이자 남자인 홍선생님이 오셔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반은 3년간 계속 여선생님이 담임인데다가 꿀맛 같은 이야기 때문에 홍선생님을 기다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홍선생님의 이야기 중 아직도 기억에 살아있는 것은 ‘호랑이와 곶감’이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옛날엔 3학년이나 된 아이들에게도 신기하기만 했다. 호랑이 등에 올라앉은 도둑의 놀란 가슴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했고, 곶감이 맛있는 것인 줄도 모르고 도둑을 자기보다도 더 무서운 ‘곶감’으로 아는 바보 같은 호랑이 대목에서는 손뼉을 치면서 재미있어 했다.
나는 해가 지고 소쩍새만 울어도 대문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뒷동산에서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는 아주 무서울 뿐 아니라, 울타리 대나무밭 같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 이후 호랑이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학교에서 빌려 읽은 동화책에는 순진하기도 하고, 토끼의 속임수에도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기도 하며, 효성스럽기도 하고, 은혜를 갚을 줄도 아는 의리 있는 호랑이가 등장했다.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삶을 함께하는 매우 친근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져야 할 윤리적 덕목을 호랑이를 통해서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도 한다.
고등학교 때는 호랑이는 이미 우리 산야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늦은 하굣길도 두렵지 않았다. 고 3 때 외딴집으로 가려면 돌아야 하는 서너 개의 모롱이도 호랑이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태백과 소백이 갈리는 백두대간 고치령 아래 험준한 골짜기에 있는 작은 학교에 부임했다. 봄이 되면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들어간 마을 사람이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목과 머리만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누구는 멧돼지의 소행이라 하고, 누구는 잔혹한 무장공비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누구는 큰짐승의 행위라고도 했다. 장에 갔다가 밤에 고치령을 넘어 돌아오다가 자동차 불빛처럼 커다란 불빛이 기슭으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골짜기에서 멧돼지를 만나기는 했지만, 호랑이의 실체는 보지 못했다. 결국 한밤중에도 혼자 고치령 60 리길을 넘을 수 있을 만큼 담대해졌다.
한 이태 전에는 백두대간을 몇 구간을 따라 다닌 적이 있다. 어느 가을날, 해발 1,100m에서 1,400m 사이의 등마루를 아홉 시간쯤 걸었다. 그 때 산등성이를 굴삭기로 파헤친 것처럼 마구 일구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한 번도 현장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멧돼지의 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서 때로 두려움 없이 한둔을 하기도 한다. 한반도에 호랑이는 이미 없어졌다고들 믿으니까.
경인년 새해를 맞아 미디어 매체들의 화두로 호랑이가 등장하였다. 모두 호랑이의 신령스러움이나 속성에 비추어 한해를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도 눈에 띠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미 멸종됐다던 한국호랑이(고려범)가 살아 있다는 반가운 기사였다. 나는 한국호랑이보호협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단체의 보고에 의하면 백두대간에만 한 열 마리쯤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발자국이나, 먹이의 흔적, 배설물 등으로 추정한 결과라고 한다. 강원도 태백에는 몇 마리, 경상북도에는 몇 마리 하면서 계산해 내는 것으로 보아 헛말은 아닐 것이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산 아래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바위 위에 낙락장송과 어울려 늠름하게 앉아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호랑이의 생존을 그 발자국만 가지고 추정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 있다’는 말이 잦으면 살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모두가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한국호랑이가 멸종 위기까지 갔던 비극은 일제 정호군(征虎軍)의 마구잡이식 사냥에 의해서라고 한다. 산의 정기를 끊어 놓는다고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겨레의 얼을 짓밟는 마음으로 호랑이를 정벌한 것이다. 경인년 세밑에 살아있는 호랑이 소식보다 더 흥미로운 낭보가 있었다. UAE의 400억 달러 원자력발전 건설 수주 소식이 그것이다. 한국호랑이가 살아나 도리어 정호군(征虎軍)을 향해 ‘으르렁―’하고 포효하는 꿈을 꾸게 하는 소식이었다.
호랑이는 한국의 또 다른 상징이다. 호랑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한국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곧 한국의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참에 ‘한국호랑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으면, 살아 있는 호랑이가 풍비박산된 겨레의 마음의 구심점이라도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한국호랑이는 살아 있다. 초등학교 때 이야기로만 듣던 호랑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호랑이가 백두대간을 누비고 있다. 믿자. 아니 믿어야 한다. 새해에는 살아 있는 호랑의 용맹과 패기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2010.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