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규의 녹자 정호다완(사진, 박재규)
녹자의 명인 한 분으로부터 선물 받은 정호 다완에 차를 따른다. 오른손으로 굽도리를 받쳐 든다. 굽도리에 유약이 뭉쳐 오톨도톨하다. 중지로 가만히 다완의 아래를 더듬는다. 굽도리 아래 한가운데 도도록한 부분이 만져진다. 묘한 감촉이 전해진다. 굽도리 유약 뭉침은 눈으로 보면 이슬방울 같더니 손을 대니 어린 시절 만지작거리던 어머니의 젖꼭지 같다. 전설처럼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따스한 어머니 젖가슴을 만난다. 느낌이 참 달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완의 허리에 빠르게 지나간 명인의 손길이 보인다. 대범한 손맛이다. 눈을 감고 왼손으로 가만히 테두리를 더듬으면 찰흙의 깐작깐작한 감촉이 손에 전해온다. 흙에 숨어있는 명인의 손맛을 내가 손맛으로 본다. 느낌이 참 곱다.
도예에는 손방이면서 우연한 기회에 흙을 만져본 적이 있다. 그때 흙에서 전해오는 차진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어쭙잖게 다완을 흉내 내려고 반죽하는 점토가 찰기를 더해 갈수록 손에 전해오는 쾌감은 형용할 수 없었다. 물레에서 돌아가는 흙을 물을 발라가며 손질을 하면, 손에는 촉감이 남고, 흙에는 원을 그리며 손길이 남는다.
낚시에 빠져 사는 정 선생이라는 친구가 있다. 등산이라도 함께 가자고 해도 낚시터에 가 있고, 소주나 한잔하자 해도 낚시터에 가 있다. 어떤 맛에 취하기에 잡았다가 놓아주고 또 잡았다 놓아줄까. 이제 단골 낚시터 붕어 얼굴쯤은 거의 알아볼 정도라고 한다. 낯익은 붕어를 만나면 붕어도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라고 한다. 미늘에 꿰인 붕어의 몸부림이 낚싯대를 지나 손에 전해지는 짜릿짜릿한 느낌을 그는 즐기고 있을 것이다. 삶의 맑고 고운 맛을 아는 정 선생은 손에 전해지는 탱탱한 원초적 향수를 만나는 것이다.
농사일도 사실은 손맛에 취해 한다. 농사일을 도우며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조밭을 맬 때 호미자루 잡은 손에 전해 오던 메마른 땅의 거칠고 투박한 감각, 잘 익은 보리를 벨 때 낫자루에 전해오는 사각사각하는 느낌, 선영의 잔디를 깎을 때의 손맛은 그때마다 달랐다. 톱으로 소나무를 자를 때와 참나무를 도막낼 때 손으로 느끼는 맛도 그때마다 달랐다. 장작을 팰 때 물푸레나무로 만든 도끼자루에서 감전된 듯 전해지는 손맛도 있었다. 드문드문 박힌 옹이를 통해서 전해오는 순간의 떨림은 오히려 감칠맛이 있었다. 이 모두가 손맛이다.
손맛은 거칠고 투박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토리묵을 집어 먹을 때 나무젓가락에 전해지는 포동포동한 맛, 모말에 백미나 붉은 팥을 담으면서 손으로 보는 흐뭇한 느낌, 거칠거칠해 보이지만 사실은 결이 고운 삼베를 펼쳐놓고 마름질할 때 느끼는 간질간질함, 어머니께서 직접 짜셔서 결과 올이 고운 명주로 지은 수의에서 전해 오는 안쓰러운 촉감, 한지를 만지면 까칠까칠하면서도 포근한 맛도 있다. 이 모두가 고운 손맛이다.
송편을 빚을 때 손으로 느끼는 맛이나 다완을 빚을 때 손에 묻어나는 맛은 다르지 않다. 찰밥을 지어 떡을 칠 때, 떡판 옆에 앉아 손에 물 칠을 해가며 떡을 치대는 순간마다 전해오는 깐작거리면서도 야들야들한 손맛, 거기에는 떡메를 피하는 긴장감이 따르는 야릇한 쾌감도 담겨 있다. 잘 익은 배추를 손으로 찢어 겉절이를 만들 때 자연의 느낌이 전해 오는 고소한 손맛도 있다. 개장을 끓이려고 잘 삶아진 고기를 손으로 찢어 갖은 양념을 넣고 손으로 버무리면서 손에 전해지는 보드라움은 원초적인 맛 그대로이다.
손맛이라고 하면 한국의 여인, 곧 어머니가 만든 음식에서 풍기는 맛을 먼저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혀로 느끼는 손맛이다. 어머니가 맨손으로 속을 넣은 김치가 더 맛있는 것은 바로 그 손맛 때문이다. 김치가 샐러드보다 맛있는 것도 어머니 손에서 묻어나는 정성 때문이다. 어머니 정성의 맛은 육개장에도 있고, 고사리 볶음에도 있고, 묵나물에도 있다.
유긍노의 흙 조형작업 <손맛> (사진 박재규)
손맛의 원천은 어디일까?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 그 근원이 바로 여기구나하게 될 것이다. 아기가 젖을 빨면서 고사리보다 더 고운 손으로 나머지 한쪽 젖을 만지작거린다. 그 엷은 손으로 느끼는 감촉으로 원초적 손맛을 배운다. 그렇게 얻은 섬세한 손맛은 젓가락을 쥐면서 성장하고, 낫자루에서, 도끼자루에서, 낚싯대에서 굵어간다. 나물을 무치면서, 떡을 빚으면서, 흙을 반죽하면서 더 깊고 곱게 이루어낸다.
손맛은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손으로 이루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두 느낌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려고 다완에 입술을 대면 도공의 투박한 손길을 다향으로 곱게 만난다. 한국화를 감상하면서 그린 이의 손이 지나간 붓자리를 넘겨다본다. 인절미를 먹으면서 떡메를 잡은 억센 팔뚝에 전해지던 깐깐한 느낌이 내 몸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두 느낌은 하나가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손맛으로 살아왔다. 손맛은 우리의 몸 골목골목에, 우리의 삶 방방곡곡에 스며있다. 이웃을 만나 손을 잡으며 반가운 마음을 나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손을 잡으며 내 삶을 손맛으로 전하고, 그의 삶을 손맛으로 감지한다.
지금도 친구 정 선생은 낚시터에서 그이만이 느낄 수 있는 손맛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 손에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녹자 다완에 명인의 손맛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만지던 젊은 어머니 젖가슴이 바로 이것이다. 바로 그 손맛이다. 우리는 이렇게 그 옛날 어머니에게서 내려 받은 고운 손맛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200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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