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불의 예술(멋)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직지

느림보 이방주 2007. 5. 2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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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에서 기념식이 끝나자 아이들은 모두 의자를 가지고 느티나무 아래로 모였다. 기념식이 거행되는 동안 이미 준비를 끝낸 일일명예교사 임인호씨는 가마에 불을 지피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체험 학습은 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전수조교이자 학부모이신 임인호씨를 일일 명예교사로 위촉하여 아이들에게 금속활자 주조 시연을 하고 인출까지 하기로 되어 있다. 내가 경험한 스승의 날 행사 중 가장 뜻 깊은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자 주조 시연을 하기 위해 천막을 두 개나 치고, 그 아래 여러 가지 활자 모형과 활자가 되어 가는 과정, 인쇄하기 위한 조판 등이 전시되어 있고, 작업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잘 보이는 곳에 앉으려고 보이지 않는 다툼이 일어났다.

 

80명도 안 되는 아이들은 50년도 넘는 느티나무 그늘이 넉넉했다. 1학년 개구쟁이들도 제법 메모할 수 있는 수첩까지 준비했다. 기특하고 귀엽다. 직지심체요절은 흔히 직지로 불린다. 직지는 천년을 넘어 오늘의 아이들에게까지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명예교사인 임 선생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서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는 그 기능보유자가 있고, 전수 조교가 있고, 이수자, 전수자, 연수자가 대를 잇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중요무형문화제 56호 종묘제례기능보유자이셨던 선친께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이 분은 바로 다음에 기능보유자가 되실 분이다. 생전의 아버님께서도 이 정도의 작은 모임에 강의를 나가실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으셨던 것처럼 임 선생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자식이 다니는 학교의 자식 같은 2세들에게 금속활자의 중요성을 알리고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귀한 시간을 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보다 더 신기했다. 다친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계속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아이들 앞을 가로 막으며 근접해서 보려다가 아이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앎에 대한 욕망은 나이를 먹어도 줄어들 줄을 모른다. 그런 자신이 아이들에게 좀 미안하고 쑥스러웠다. 그러나 나에게도 고문과 고서와 문자에 대한 궁금증은 사윌 줄을 모른다.

 

먼저 직지에 대한 설명과 금속활자 제조 과정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설명했다. 아이들은 교재와 자료를 번갈아 보면서 열심히 기록하기도 하고 일어서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금속활자 주조법은 밀랍주조법과 주물사주조법이 있다고 한다.

 

밀랍주조법은 과거에 모양이 섬세하고 복잡한 불상(佛像), 범종(梵鐘)을 주조하는데 사용한 방법이란다. 이 방법이 고려 시대에 들어와 금속활자 주조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밀랍주조법의 주조 과정은 먼저 글자본 선정하고, 선정한 글자본으로 판형 틀을 만들고 밀랍을 녹여 틀에 붓고 응고시켜 밀랍 판형을 만든 다음, 글자본을 뒤집어 붙이고, 글자본에 따라 어미자 만들어 붙인 다음, 주형틀을 만들어 건조시킨다. 그 주형틀에 청동을 녹여 부어 식기를 기다려 주형틀을 깨트리고 활자를 한 자씩 떼어내면 활자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활자로 원하는 책을 조판하고 인쇄를 한다고 한다.

 

오늘 시연할 주물사주조법은 밀랍주조법에 비하여 더욱 발달된 후대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과정을 한 번에 내리 죽 설명하고 나서 곧바로 시연에 들어갔다. 내리쬐는 5월의 햇살로 아이들 앞에 선 그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웬만한 일이면 장난하고 돌 던지며 다소곳하게 참지 못하는 개구쟁이들도 오늘은 꽤나 진지하다. 

 

주물사주조법은 조선시대에 관주활자, 왕실활자를 주조하던 방법으로 옛 문헌(성현의 용재 총화)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글자본을 선정한 다음, 황양목을 이용하여 활자의 크기에 맞게 자른다. 그리고 그 위에 글자본을 거꾸로 붙인다. 그런 다음 각수(刻手)가 조각칼로 글자를 새긴다. 주형틀 바닥에 어미자를 붙이고 하얀 돌가루를 뿌린다. 돌가루 대신 숯가루를 뿌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돌가루를 뿌리는 이유에 대해 한동안 설명하였다. 주물토와 재질이 다른 것을 뿌려야 활자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가는 모래로 보이는 주물토를 다져가며 가득 채우고는 뒤집어 놓는다. 이 과정에서 흙을 채우고 두드리며 다지는 그의 동작이 매우 익숙해 보여서 마치 천년을 거꾸로 돌아가 고려 시대의 금속활자주조장에 가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하였다. 그리고 어미자를 제거하고 암수 틀을 결합한 다음 쇳물을 부었다. 쇳물은 도가니에서 1200도로 끓는 것을 구기 같은 기구를 활용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붓는다. 이 1200도는 청동으로 활자를 만드는데 가장 적정의 온도라 한다. 이런 온도를 발견한 것이 바로 조상의 과학적 사고의 결과라고 설명하여 아이들을 눈을 빛나게 했다.

 

쇠톱으로 활자를 다듬어 조판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아이들에게는 이미 조판된 월인석보와 직지 하권의 마지막 장을 인출해 내는 실습을 하도록 했다. 인출과정에서는 그의 부인인 자모회장이 손에 먹물을 묻혀가며 아이들을 도왔다.

 

나는 그의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시연을 보면서 천년 이전의 인쇄 문화가 최근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금속활자라 하면 그냥 쇳덩이에 도장을 파듯 새겨서 조판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크기와 글자체로 수많은 활자를 만들어 조판한 다음 인쇄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현재 컴퓨터를 활용한 출판이라는 정보 혁명이 있기 직전까지는 천 년 전의 금속활자 주조 방법을 토대로 출판이 이루어졌으니 금속활자 발명이야말로 현대의 정보화의 기틀을 마련한 고대의 정보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적 정보 혁명을 우리 민족이 이루어 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 뿌듯하게 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보의 공유에 대한 본능이 있는가보다. 그러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시공을 초월하여 전달할 방법을 궁리했을 것이다. 그런 궁리가 문자를 생각해 내게 되고, 문자를 발명한 다음 실용화 단계에서 인쇄 기술을 낳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먹물을 칠하고 탁본하듯이 인출한 보물을 들고 서로 자랑하며 신기해했다. 마치 자신이 활자 주조의 전 과정을 스스로 해내기나 한 듯이 흐뭇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월인석보 제 1장 부분은 훈민정음과 한자를 혼용했지만, 아이들이 고문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였다. 나는 몇몇 아이들을 모아 놓고 월인석보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아이들은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관계, 제 1장의 내용의 설명을 아주 진지하게 듣는다. 중학생들에게 다소 어려운 내용이지만, 앎의 욕구가 충만한 그 자리에서 바로 일러주는 내용이라 바로 마음에 전해지는 모양이다.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직지의 마지막 면도 어눌한 한문 실력을 활용해서 겉으로 들어난 뜻 정도만 일러 주었다. 아이들이 모여 들어 내 설명을 들었다. 월인석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자세하게 알려 줄 수 있지만, 직지심경에 대하여는 나의 무식을 한탄해야만 했다.

 

우리가 그냥 쉽게 말하는 직지(直指)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줄여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냥 ‘직지’라고 쉽게 말하지만 나는 직지심경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고 그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라는 수박의 겉만을 핥아본 정도이다. 그러나 ‘직지심(直指心)’이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이라면 금년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특별행사로 마련한 직지 금속활자 주조 시연은 아이들에게 민족 문화의 긍지를 마음에 바로 일깨워 준 뜻 깊은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한다.

(2007.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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