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 첫날
난처한
전화를 받았어요.
다함께 부임 첫날인데
어느 예쁜 여선생님께서
교무부장이라고 나에게 전화를 건네 주셨어요.
어느 볼멘 자모님께서
"선생님, 급식이 왜 그래요? 맛없어 못먹겠대요."
"아직 저는 안 먹어 봤는데요."
이렇게 대답하려다
"아, 그래요? 밥을 맛있게 지어 달라고 말해 보지요."
이렇게 둘러 댔어요.
그런데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참 많이 섭섭했어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거든요.
일주일만 먼저 부임했더라도 할 말을 다 했을 겁니다.
자모님께서도 이쁘고 귀한 따님에게
맛있는 밥을 끼니마다 먹이셔도 모자랄 텐데
학교에다가 먹는 것 까지 맡겨 놓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좀 더 입맛에 맞게 먹일 수는 없을까?'
'두 끼나 학교에서 먹는데 영양은 제대로 맞추어 먹이는가?'
'급식비를 더 내더라도 맛나게 먹이는 방법은 없을까?'
'먹거리가 다 국내산인가?'
우리 영양사 선생님께서도 참 할 말은 많으실 겁니다.
자모님, 자모님은 댁에서 다섯 식구 입맛에 다 흡족한 밥을 지으실 수 있으세요?
하물며 학교엔 800 이 넘는 식구들의 다 다른 입맛이 있걸랑요.
그 대신 2300원으로, 정말 그 돈으로
대학에서 배운 온갖 재주를 다 부려서 아이들에게 영양만큼은 맞추고 있걸랑요.
그러자니 맛은 좀 덜하고, 때로 국내산이 아닐 수도 있고요.
급식비를 더 내도 좋다고요?
그러나
그러나 정말로 말하고 싶지않지만,
가슴 아프게도 한 끼에 2300원도 힘겨운 아이들도 있답니다.
그런 아이들이 단 한 명이 있다 하더라도
우린 먼저 그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린 아이들에게 육신을 불리는 사랑보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사랑을 먹이고 싶걸랑요.
자모님
단군신화를 아시나요?
그 허황된 이야기를 왜 꺼내냐고요?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이
우리의 신화는 우리 생활문화의 원형이걸랑요.
신화에서 곰(곰 같은 사람)은 환웅의 명대로
컴컴한 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는 금기를 실현한 결과
수성(獸性 짐승같은 성품)을 씻고 인간(人間 사람다운 사람)으로 탈을 벗었잖아요.
그러나 호랑이는 그 금기를 참지 못했어요.
쑥은 너무 써서 먹지 못하고, 마늘은 너무 매워 먹지 못하고, 영양도 결핍될 것 같고, 국산인가 아닌가 의심하다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도 그리워하다가
굴 속이 너무 컴컴하고 축축하고 바퀴벌레도 나올 것 같아 바깥 세상이 그리웠을 겁니다.
생고기가 그리워 견디지 못하고, 신분상승의 성지인 동굴을 뛰쳐나갔기에
수성을 씻어낼 기회를 잃고, 영원히 사나운 호랑이로 주저앉았다네요.
학교는
각양 각층의 세계에서 모여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 같은 밥을 먹이면서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자신을 다스릴 줄도 알며,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벼리어서
인재를 만들어 내는 곳입니다.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입어보고
이것도 참아보고 저것도 그려보고
이루어지는 것과 이루어지지않는 것을 다 겪고
되는 것과 안되는 것도 다 견디어 내면서
그렇게 한 인간이 되어가는 겁니다.
이쁘고 귀한 따님이
밥을 투정하면 그보다 더 험한 밥을 먹이고
옷을 투정하면 그보다 더 험한 옷을 입히면서
두드리고 다듬어 함께 인재로 만드는게 어떨까요?
자모님
영양사 선생님에게도, 담임선생님에게도, 교장선생님에게도
모두에게 아이들은 다 이뻐 보이걸랑요.
웃어도 이쁘고, 울어도 이쁘고, 똑똑하게 대답하는 모습도 이쁘고, 웃으며 인사해도 이쁘고
조는 모습도 이쁘고, 치마를 걷고 몰래 담을 넘는 모습도 이쁘고, 골내는 모습도 이쁘고
그러나
우린 이뻐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때로 쑥을 먹이고, 때로 마늘을 물리고
때로 햇빛도 금하고, 여러가지 금기를 참고 지키게 하면서-----
투정하는 아이를 달래고 설득해야 해요.
여긴
학교걸랑요.
여긴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고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지혜로운 인재로 거듭나게 하는 성스러운 공간이걸랑요.
여긴
더 큰 빛을 받아내고 더 위대한 인간으로 태어나
산남의 신화를 이루어낼 성스러운 부활의 동굴이거든요.
그런데
그까짓 밥맛쯤이야.
참아내게 가르쳐야지요.
안그래요?
자모님.
혀로 감각하는 사랑보다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랑을
똑똑한 산남 아이들은 원하걸랑요.
(2008. 3. 31. 산남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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