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그날밤, 강나루에서

느림보 이방주 2002. 1. 9. 22:29
그날밤 나는 강나루에 서 있었다. 아프리카 흑인 어린이 이마에 그믐달빛이 비쳤을 때처럼 검은 빛이 반짝이도록 수마가 잘된 자갈이 뒹구는 나루였다. 낡은 나룻배가 한 척 강안(江岸)에 소슬이 매어 서늘한 바람에 흔들거리고, 가로지르는 부우연 안개 아래로 검은 물결은 어스름에도 반짝인다. 이 쪽에는 손잡아 줄 사람 하나도 없는데 건너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있다. 달빛까지 비웃음처럼 차갑게 어깨 위에 내려앉는 밤이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손짓하며 나를 부른다. 알 듯 모를 듯한 사람들은 애절하게 손짓을 하기도 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면서 건너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듯 소리쳐 불러댄다. 그러나, 나는 노를 저을 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사람들과의 의리를 생각하면서 건너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면서도 건넌다는 사실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두렵다.

한없이 꺼져 내려가는 나의 자리는 누워있는 나를 끝없는 오한으로 떨게 한다. 꿈속에서도 노 젓는 것을 배워두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말이다. 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이라는 생각이 또렷한 의식 속에서 허위적거렸다. 방문을 열고 아내가 들어왔다. '물이라도 가져다 주었으면…'하면서도 그 말이 입술 밖으로 비어져 나오지 않는다. '앓는 소리를 다 하시네'하면서 이불을 도닥거리고 다시 거실로 나간다. '제발 내 손을 좀 잡아 줘…….' 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애타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검을 물이 무섭게 흐르는 강 건너 저 편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원망하면서 부르고, 아내는 그냥 거실로 나가버리고, 온몸의 온기를 모두 핥아버려 따뜻해진 돌 침대는 더욱 경색된 촉감으로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꺼져 내리고……. 죽음이란 이렇게 오는 것인가?

무섭다. 그런 신음 속에서도 딸애가 방에 들어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 좀 잡아 줘. 아가, 나 좀 잡아 줘.' 아무 생각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나간다.

방문을 열 때마다 거실에서는 낯익은 목소리가 '아프가니스탄이 어쩌고' 하는 아홉시 뉴스가 아우성치고 있다. 나는 세상의 소리를 다 듣고, 세상이 일이 다 보이고, 세상에 대하여 하나하나 다 원망할 줄 아는데, 세상은 내 소망도 원망도 알아듣지 못한다. 세상은 내 손을 잡아 줄줄 모른다. 나의 이 안타까움을 모른다. 이 공포를 알릴 길이 없다. 강 건너 흰옷 입은 사람의 애타는 부름을 외면하기 미안하고, 갈 수 없는 핑계가 궁해서 미안하고, 내려앉는 달빛이 무섭고 으스름에 빛나는 수마 잘된 오석(烏石)이 무섭다. 서있는 자리가 무섭고 두렵다. 내가 두렵다.

온 몸이 이슬비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린다. 바닥에 깐 얇은 요가 흠뻑 젖었다. 이 죽음의 강나루에서 벗어나 땀을 씻어야 한다는 의식이 몽롱하게 오락가락한다. 그 때 '엘리제를 위하여'의 전자음이 들렸다. 그 불후의 명품은 불쌍한 전자음이 되어 아파트 집집을 울린다. 누가 오는 모양이다. 대학 때 오르간 연습실에서 울려 퍼지는 그 둔탁한 소리가 그렇게 선망이더니, 이제 그 선망이 전자음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내 손을 잡아 준 것이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백암온천 생각이 났다. 그 따뜻하던 구원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김서린 대중탕에 깊숙이 몸을 담그고 땀을 더 냈으면 몸이 가벼워질 것 같다. 몸을 꼿꼿이 하고 가만히 누워 본다. 등이 아프고 머리가 무겁다. 옆구리에 오한이 온다. 춥고 덜덜 떨린다. 배를 깔고 누우니 허리가 아프다. 발이 시리다. 이불을 발 밑까지 내려본다. 어깨가 시리다. 머리 위까지 올려 본다. 그러다 다시 잠에 빠졌다.

이번에는 출렁이는 물을 만났다. 하얗게 부서지는 맑은 물이 발목을 간지른다. 햇살이 맑고 깨끗하게 물위에 흐드러진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춥지 않다. 습습하지도 않다. 일광의 휘장을 타고 날아오를 것 같다. 축복의 향연과 같다.

참으로 높이 올랐구나. 누군가 백두산 천지(天池)라 했다. 상쾌하다.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가슴이 뿌듯하다. 팔을 쭉 뻗어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를 토해냈다. 어떤 신선 같은 지인(至人)이 날아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또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하늘을 날 것 같다. 벌떡 일어났다. 몸이 가볍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흡사 물에서 건져온 빨래처럼 축 늘어진 이불이 습습하다. 평소처럼 몸이 가볍다. 물을 찾아 마셨다. 소나무 사이를 흘러 들어온 달빛처럼 시원한 생명이 목을 타고 가슴을 거쳐 온 몸에 퍼진다. 검은 강물도 나루터도 없다. 다만 천지의 생생한 영상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흰옷 입고 애타게 부르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그 알 듯 말 듯한 얼굴들이, 그 애타는 부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언제나 '나의 것'이다. 그 두려움의 나루에 서는 것을 회피한다는 것은 자신을 비본래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근원적 공포의 대상이지만, 사실은 죽음 이후에 아무도 그 공포를 감각할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은 다만 관념적인 공포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씩 나루에 서보는 것은 그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죽음은 다만 검은 물이 흐르는 그 강을 미련 없이 건너가면 되는 것이다. 다만 강 건너 마을일뿐이 아닌가? 그래 맞아, 죽음은 다만 강 건너 마을일뿐인 거야. 거기에는 애타게 부르는 이들이 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일 뿐이야. 삶이 또 다른 삶으로 새로워진 생명의 전형(轉形)일 뿐인 게지.

하룻밤 악몽은 내게 '죽음'의 강을 가르쳐 주었다. 또 '탄생'의 천지(天池)를 일깨워 주기도 했다. 강나루에도 내려갔다가 천지에도 올랐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과 탄생을 경험하는가? 늦은 봄 목련이 시들어 떨어지듯이 수많은 미혹(迷惑)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면 새로운 가지 끝에서 작지만 새하얀 목련이 피어나듯이 새로운 깨달음의 탄생을 경험한다. 깨달음은 다시 미혹이 되어 늦은 봄을 맞아 시들어 떨어지고…….

강 건너 흰옷 입은 사람들의 애타는 손짓을 못 이겨, 그 의리를 버리지 못해 찌그덕 찌그덕 서툰 솜씨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너는 날까지, 목련은 시들어 떨어지고 가지 끝에 어린 꽃을 피우면서 그렇게 섭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어찌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맞이하는 은총의 새 아침이다.

나는 어느날 그렇게 강나루에 설 것이다. 그리고 뉘엇뉘엇 지는 햇살을 받으며 유유히 노를 저어 사람들이 부르는 그 마을로 아주 느릿느릿 건너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강가에 나갈 때가 아니다. 천지에 오르는 꿈을 아직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지의 그 시원함을 아직 다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천지에 선 새로운 탄생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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