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차비를 했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듯 하나하나 차곡차곡 가방에 챙겼다. 이박삼일의 짧은 여행인데도 준비할 것은 참 많기도 하다. 이번에는 김용택 시인의 시집 『섬진강』을 챙겼다. 무슨 생각인지 시어사전도 넣었다. 노트북 컴퓨터를 넣고 싶었으나 또 참았다.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 통사』를 집었다가 혼자 웃었다. 지난봄 여행 때 넣고 갔다가 펴보지도 못했던 일이 생각나서다.
방송은 온통 호우 경보로 흥건히 젖었다. 게릴라 같은 호우가 예상할 수 없이 여기저기를 강타한다고 한다. 한 번도 호우를 맞아보지 못했을 것 같은 어여쁜 여자 캐스터가 모처럼 의미 있는 뉴스로 그 흥분을 토해낸다. 그건 나에게 주는 삶의 호우 경보인가? 엷은 두려움이 앞을 가린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애기나리꽃 같은 여자 캐스터의 예보가 우습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호우가 멈출 때쯤, 여주 나들목으로 빠져서 37 번 국도를 북으로 달린다. 차들이 많아졌다 싶을 때 갑자기 앞 유리창에 빈대떡 만한 빗방울이 한 방울 '툭' 떨어져 퍼드러진다. 진천에서 호법까지 나타나 길을 막았던 게릴라가 또 출현한 것이다. 단번에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미등을 켰다. 안개등도 켰다. 차들이 튀기는 물보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 폭포수처럼 들이붓는 빗줄기로 길은 물바다가 되었다. 속도를 미리 줄이지 못한 차들이 튀기는 물줄기가 역류하는 폭포수처럼 하늘로 치솟는다. 시속 40km를 넘으면 좌우로 몹시 기우뚱거린다. 차가 아니라 배로 변한 느낌이다. 핸들로는 바퀴를 통제할 수 없다.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더니 급기야 갓길로 꼬리를 감춘다. 속도를 줄이기는 했지만 나는 급류를 헤엄치는 물소처럼 차 없는 1차선을 달렸다.
내가 살아온 길은 결코 호우처럼 험난한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고 평탄한 길도 아니었다. 험하다기보다는 남보다 훨씬 구불구불한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구불구불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갓길로 꼬리를 감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에게는 호우를 헤치고 나아갈 만한 남다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친 물살을 가르며 머리를 숙이고 물소의 뿔을 곤두세울 도전의 의지도 남만 못하다. 규범과 일상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이념도 열려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겁도 없이 나아가는 것이 무모한 일은 아닐까?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 세찬 기세를 조금도 꺾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길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길은 이제 잘 정리된 배수로가 되어 있다. 길 양 옆 절개지에서는 산골 물이 실폭이 되어 수없이 떨어진다. 바퀴가 3분의 2이상 물에 들어가면 엔진이 꺼질 수도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곧 죽음이다. 오르막길이 아닌 곳에서는 바퀴가 반 정도는 물에 잠기어 있는 것 같았다. 안전한 고개를 올라서 갓길에 차를 대고 비 그치기를 기다릴까? 그냥 이렇게 가는 것이 무모한 짓 아닌가? 중미산 그 깊은 계곡에 길에는 물이 넘치지 않았을까? 라디오를 켰다. 팝송만 빗방울 두드리는 소리에 요란한 박력을 더한다. 돌아갈 수 있을까? 순간,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방울이 좀 가늘어졌다. 양평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넓고 훤한 우회도로를 선택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좀 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 지하 차로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돌아설까 하다가 그냥 힘주어 달렸다. 벌건 흙탕물이 물소에 날개를 단 것처럼 양편으로 솟는다. 생각보다 짧은 지하 차로를 무사히 통과하니 비는 완전히 멈추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로 검은 이불을 내려 덮을 듯이 무거운데 어딘가 숨었던 차량들이 물방개 새끼처럼 길 위로 기어든다.
가야할 길은 좀 의심스러웠지만 주변의 모양이 기억에 있는 듯했다. 15분쯤 달리다 보니 44번 국도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건 내가 갈 길이 아니다. 내가 갈길은 오로지 37번 국도이다. 길가 주유소에 들러 차를 멈추고 주변을 살피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분명 돌아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찾다가 오히려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는다는 것, 지향점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곧 방황이다. 나는 어리석은 미아처럼 온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차를 180도 돌렸다.
머리 나쁜 삶의 미아는 노력할수록 처음에서 멀어지고 방황하는 것이며 낯선 고장으로 떠돌게 되는 것이다. 작은 읍내에서 골목을 헤매다가 큰길을 만나면 큰길에 현혹된다. 큰길에 현혹되어 작은 길을 버리고 큰길을 따라가다가 본래 자신의 길에서 크게 멀어지는 것이다. 야트막한 산에만 올라가도 다 보이는 세계인데, 하늘은 내려다보면서 내 차의 꽁무니에 얼마나 조소를 보낼까?
목적지가 얼마 안 남으니 이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중미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이 이브를 유혹하던 뱀의 혓바닥이 되어 날름거리며 나의 길을 핥아댄다. 물은 성난 말떼처럼 엎어지고 거꾸러지면서 흘러내린다. 또 한 차례 짧은 소나기가 지나간다. 소백산 희방사 아래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같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주차장에 진입할 때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언제나 실망만 안겨주는 문단의 두꺼비 같은 이었다. 그 표리부동함, 상투적인 인사, 진실 없이 텅 비어 있는 웃음. 순간, 죽음이란 것이 또 생각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건데…….
객실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뉴스에서 44번 국도가 폐쇄되었다고 떠든다. 나는 정말로 큰 미아가 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쿡―' 웃었다. 죽음으로 갈 수도 있는 물길에서 왜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길을 잃으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나의 밑바닥에는 어떤 이념이 깔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나를 버리는 순간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죽이는 순간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 삶만이 삶이라는 그 한정된 삶의 과녁에 대한 집착을 벗어 던지는 순간 안으로부터의 잔잔한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과녁이 없는 나의 길에는 방황도 사라진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에는 이슬비가 날린다. 산자락의 낙엽송 연한 가지 끝에 은빛 구슬처럼 하얗게 묻어 설화가 피어난 듯하다. 황톳물은 성난 황소처럼 으르렁거리고, 솜처럼 하얀 산람(山嵐)은 승천하는 관세음보살님이 되어 거대한 중미산 푸르른 산등성이를 휘감아 오른다. 내 안도 어느새 잔잔한 어둠을 담고, 세상 소리를 다 들어 살피신 그 흰 옷자락 한 솔기를 붙잡고 중미산 중턱까지 올라가 있다.
(2002. 8. 6)
방송은 온통 호우 경보로 흥건히 젖었다. 게릴라 같은 호우가 예상할 수 없이 여기저기를 강타한다고 한다. 한 번도 호우를 맞아보지 못했을 것 같은 어여쁜 여자 캐스터가 모처럼 의미 있는 뉴스로 그 흥분을 토해낸다. 그건 나에게 주는 삶의 호우 경보인가? 엷은 두려움이 앞을 가린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애기나리꽃 같은 여자 캐스터의 예보가 우습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던 호우가 멈출 때쯤, 여주 나들목으로 빠져서 37 번 국도를 북으로 달린다. 차들이 많아졌다 싶을 때 갑자기 앞 유리창에 빈대떡 만한 빗방울이 한 방울 '툭' 떨어져 퍼드러진다. 진천에서 호법까지 나타나 길을 막았던 게릴라가 또 출현한 것이다. 단번에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미등을 켰다. 안개등도 켰다. 차들이 튀기는 물보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신호등이 보이지 않는다. 폭포수처럼 들이붓는 빗줄기로 길은 물바다가 되었다. 속도를 미리 줄이지 못한 차들이 튀기는 물줄기가 역류하는 폭포수처럼 하늘로 치솟는다. 시속 40km를 넘으면 좌우로 몹시 기우뚱거린다. 차가 아니라 배로 변한 느낌이다. 핸들로는 바퀴를 통제할 수 없다.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더니 급기야 갓길로 꼬리를 감춘다. 속도를 줄이기는 했지만 나는 급류를 헤엄치는 물소처럼 차 없는 1차선을 달렸다.
내가 살아온 길은 결코 호우처럼 험난한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고 평탄한 길도 아니었다. 험하다기보다는 남보다 훨씬 구불구불한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구불구불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갓길로 꼬리를 감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나에게는 호우를 헤치고 나아갈 만한 남다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친 물살을 가르며 머리를 숙이고 물소의 뿔을 곤두세울 도전의 의지도 남만 못하다. 규범과 일상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이념도 열려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겁도 없이 나아가는 것이 무모한 일은 아닐까?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 세찬 기세를 조금도 꺾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길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길은 이제 잘 정리된 배수로가 되어 있다. 길 양 옆 절개지에서는 산골 물이 실폭이 되어 수없이 떨어진다. 바퀴가 3분의 2이상 물에 들어가면 엔진이 꺼질 수도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곧 죽음이다. 오르막길이 아닌 곳에서는 바퀴가 반 정도는 물에 잠기어 있는 것 같았다. 안전한 고개를 올라서 갓길에 차를 대고 비 그치기를 기다릴까? 그냥 이렇게 가는 것이 무모한 짓 아닌가? 중미산 그 깊은 계곡에 길에는 물이 넘치지 않았을까? 라디오를 켰다. 팝송만 빗방울 두드리는 소리에 요란한 박력을 더한다. 돌아갈 수 있을까? 순간,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방울이 좀 가늘어졌다. 양평읍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넓고 훤한 우회도로를 선택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좀 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 지하 차로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돌아설까 하다가 그냥 힘주어 달렸다. 벌건 흙탕물이 물소에 날개를 단 것처럼 양편으로 솟는다. 생각보다 짧은 지하 차로를 무사히 통과하니 비는 완전히 멈추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로 검은 이불을 내려 덮을 듯이 무거운데 어딘가 숨었던 차량들이 물방개 새끼처럼 길 위로 기어든다.
가야할 길은 좀 의심스러웠지만 주변의 모양이 기억에 있는 듯했다. 15분쯤 달리다 보니 44번 국도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건 내가 갈 길이 아니다. 내가 갈길은 오로지 37번 국도이다. 길가 주유소에 들러 차를 멈추고 주변을 살피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분명 돌아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찾다가 오히려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는다는 것, 지향점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곧 방황이다. 나는 어리석은 미아처럼 온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차를 180도 돌렸다.
머리 나쁜 삶의 미아는 노력할수록 처음에서 멀어지고 방황하는 것이며 낯선 고장으로 떠돌게 되는 것이다. 작은 읍내에서 골목을 헤매다가 큰길을 만나면 큰길에 현혹된다. 큰길에 현혹되어 작은 길을 버리고 큰길을 따라가다가 본래 자신의 길에서 크게 멀어지는 것이다. 야트막한 산에만 올라가도 다 보이는 세계인데, 하늘은 내려다보면서 내 차의 꽁무니에 얼마나 조소를 보낼까?
목적지가 얼마 안 남으니 이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중미산에서 내려오는 계곡 물이 이브를 유혹하던 뱀의 혓바닥이 되어 날름거리며 나의 길을 핥아댄다. 물은 성난 말떼처럼 엎어지고 거꾸러지면서 흘러내린다. 또 한 차례 짧은 소나기가 지나간다. 소백산 희방사 아래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같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주차장에 진입할 때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언제나 실망만 안겨주는 문단의 두꺼비 같은 이었다. 그 표리부동함, 상투적인 인사, 진실 없이 텅 비어 있는 웃음. 순간, 죽음이란 것이 또 생각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건데…….
객실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뉴스에서 44번 국도가 폐쇄되었다고 떠든다. 나는 정말로 큰 미아가 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쿡―' 웃었다. 죽음으로 갈 수도 있는 물길에서 왜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길을 잃으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나의 밑바닥에는 어떤 이념이 깔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나를 버리는 순간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 나에 대한 집착을 죽이는 순간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 삶만이 삶이라는 그 한정된 삶의 과녁에 대한 집착을 벗어 던지는 순간 안으로부터의 잔잔한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과녁이 없는 나의 길에는 방황도 사라진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에는 이슬비가 날린다. 산자락의 낙엽송 연한 가지 끝에 은빛 구슬처럼 하얗게 묻어 설화가 피어난 듯하다. 황톳물은 성난 황소처럼 으르렁거리고, 솜처럼 하얀 산람(山嵐)은 승천하는 관세음보살님이 되어 거대한 중미산 푸르른 산등성이를 휘감아 오른다. 내 안도 어느새 잔잔한 어둠을 담고, 세상 소리를 다 들어 살피신 그 흰 옷자락 한 솔기를 붙잡고 중미산 중턱까지 올라가 있다.
(200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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