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서재 서쪽 창문을 내다보면 이웃 아파트 정원에 피었다 지는 목련을 볼 수 있다. 일찍 퇴근한 날은 아파트 숲 사이로 빠끔히 보이는 낙조를 볼 수 있다. 해는 거뭇한 참나무 숲으로 떨어질수록 더욱 꼭두서니 빛으로 발갛게 자신을 불태우다가도, 멀리서도 보이는 잎사귀마다 은비늘 같은 반짝임을 남긴 채 꼴깍 실낱같은 꼬리를 감춘다. 해가 그렇게 떨리듯 작은 반짝임을 남기고 꼬리를 내리면 하늘도 점점 회색으로 숨을 거둔다. 그 화려함이 막을 내리는 것이다. 도로의 자동차들은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저녁 운동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노인들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 보인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목련이 지듯, 하늘이 숨을 거두듯, 그렇게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봄에 쏟아 놓았던 달빛 무더기 같던 목련은 오늘의 태양이 어제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작년의 그 목련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죽음은 내가 늘 입버릇으로 말해온 것처럼 한솔아파트에 살다가 옆에 있는 백로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쯤으로 생각해도 될까? 그건 정말 죽음에 대한 나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죽음이 정해지고 다가오는 그 날을 위하여 시루떡을 주문하고 약간은 섭하지만 새집에 대한 기대감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꾸릴 수 있을까?
목련은 며칠 전만 해도 쏟아놓은 한 가마니의 달빛 무더기였다. 단지내의 목련은 산목련이나 학교 정원의 그것처럼 자연을 맘껏 누리지는 못하지만 더 소담하다. 아파트 그늘에 가려 따스한 볕을 한껏 누릴 수 없는 목련은 건물 사이사이에서 더욱 맵차게 불어오는 된바람을 견디어야 한다. 그 가는 가지의 휘파람이 지나는 사람의 가슴을 에어 낼 듯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겨울 동안 모래 먼지 얼어붙은 눈 속을 견디어 냈다. 그 더러운 먼지가 녹아 땅에 스며들 때쯤, 물오른 암갈색 촉이 사춘기 소년의 불두덩같이 보송보송해지면, 원룸에서 빠져 나오는 진노랑으로 머리 염색한 처녀애들의 발걸음도 절로 가벼워 보인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따뜻해진 어느 봄날, 그 보송보송한 촉은 꿈을 견디지 못하고 여린 속살을 드러낸다. 온갖 더러움이 얼어붙은 눈에서 길어 올린 물로 어떻게 그렇게 순백의 지순을 꽃피울까? 그 순결을 내다보면서 나는 그런 의문에 사로잡힌다. 황사가 지독한 날도 천지가 온통 먼지에 뒤덮일 때도 목련의 지순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추함도 용납하지 않고 고고하게 순백을 지킨다.
그런 목련이 진다. 달빛 같던 목련의 무더기가 오늘은 공포에 질린 한두 송이만 남긴 채 비상 섞인 핏빛으로 죽어간다. 화사하기만 한 벚꽃이나 별이 쏟아진 것 같은 비탈밭의 배꽃이 바람에 휘날려 마지막 꽃가루의 향연을 베풀 때, 목련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를 가려서 그냥 떨어진다. 그 슬픈 흔들림으로 제 발 밑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화사하던 속살의 흰빛은 누렇게 퇴색되다가 꽃받침 가까운 곳으로부터 부자탕처럼 죽음의 색깔로 변하면서 최후의 낙하를 준비한다. 목련의 마지막 자존심은 최후의 낙하를 남이 지켜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벚꽃이나 배꽃처럼 흩날림의 향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도 않는다. 한겨울을 견디면서 순백을 준비하듯 초연한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다. 개나리는 아직도 파란 이파리 사이에서 샛노랑색으로 발버둥치고, 산벚은 화려한 흩날림의 향연을 끝내고도 연보라 새순 사이에 남아 꽃잎의 그 연분홍이 진한 분홍으로 짙어가면서 하소연하는데, 삶에 미련을 두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하소연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목련의 체념이 그 속살의 순백만큼 처연하다.
떨어진 꽃잎은 금방 최후의 색으로 변한다. 속살의 순백을 아무 미련도 없이 버린다. 그리고는 최후의 색깔을 하루가 다르게 감추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그건 좀 늦게 제 모습을 드러낸 자목련도 마찬가지다. 그 대신 어느새 파릇한 잎이 눈을 틔운다. 그렇게 한 여름의 그늘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목련의 아름다운 죽음은 까맣게 잊고 그 푸름에 쉽게 젖어 버린다.
목련은 무엇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겨우내 불던 모진 바람일까? 뿌리에서 길어 올린 세상의 더러움인가? 달빛 같은 순백의 속살인가? 아파트 틈새로 보이던 처절한 낙조인가?
사람에게 아름다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앉은 채로 기도하다 열반한 어느 스님의 죽음은 참으로 신비로운 죽음으로 생각되었다. 죽기보다 살아 있기를 원하고, 얻어지지도 않는 것을 구하려 하고, 사랑과 이별하기를 거부하고, 미움과 만나기를 꺼리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용서받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신 공양한 어느 소설의 주인공 같은 죽음도 참으로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도 아름답고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주변에도 목련의 죽음처럼 부러운 모습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얼마든지 있다. 두 달쯤 누워 계시다가 염불을 외면서 숨을 거두신 나의 할머니, 아흔을 넘기고도 하루도 눕지 않고 생신 이튿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머리맡에 성경을 놓으시고 잠결에 소천하신 처조모의 죽음은 목련의 죽음처럼 부러운 죽음이었다. 이 분들은 적어도 내게만은 아무런 한도 남기지 않으셨다. 목련 같은 삶으로 목련같이 애처롭게 가신 어머니, 누님의 죽음도 아름다운 죽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분은 나의 가슴에 너무나 큰 한을 남기셨다.
나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하루도 죽음의 순간을 잊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은 그 시간이 요원한 모양이다. 그러나 혈육의 죽음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가르는 듯하다.
목련이 질 때 떨어지는 창 밖의 목련을 바라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쉽게 잊혀지는 죽음이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으로 남는 죽음은 별로 바라고 싶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 뇌리에 슬픔으로 남기 때문이다. 한으로 남는 죽음이 되기도 싫다.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들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쉽게 잊어지는 죽음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 목련이 지는 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새로운 의문에 사로잡힌다.
(2002. 4. 13.)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목련이 지듯, 하늘이 숨을 거두듯, 그렇게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봄에 쏟아 놓았던 달빛 무더기 같던 목련은 오늘의 태양이 어제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작년의 그 목련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죽음은 내가 늘 입버릇으로 말해온 것처럼 한솔아파트에 살다가 옆에 있는 백로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쯤으로 생각해도 될까? 그건 정말 죽음에 대한 나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죽음이 정해지고 다가오는 그 날을 위하여 시루떡을 주문하고 약간은 섭하지만 새집에 대한 기대감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꾸릴 수 있을까?
목련은 며칠 전만 해도 쏟아놓은 한 가마니의 달빛 무더기였다. 단지내의 목련은 산목련이나 학교 정원의 그것처럼 자연을 맘껏 누리지는 못하지만 더 소담하다. 아파트 그늘에 가려 따스한 볕을 한껏 누릴 수 없는 목련은 건물 사이사이에서 더욱 맵차게 불어오는 된바람을 견디어야 한다. 그 가는 가지의 휘파람이 지나는 사람의 가슴을 에어 낼 듯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겨울 동안 모래 먼지 얼어붙은 눈 속을 견디어 냈다. 그 더러운 먼지가 녹아 땅에 스며들 때쯤, 물오른 암갈색 촉이 사춘기 소년의 불두덩같이 보송보송해지면, 원룸에서 빠져 나오는 진노랑으로 머리 염색한 처녀애들의 발걸음도 절로 가벼워 보인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따뜻해진 어느 봄날, 그 보송보송한 촉은 꿈을 견디지 못하고 여린 속살을 드러낸다. 온갖 더러움이 얼어붙은 눈에서 길어 올린 물로 어떻게 그렇게 순백의 지순을 꽃피울까? 그 순결을 내다보면서 나는 그런 의문에 사로잡힌다. 황사가 지독한 날도 천지가 온통 먼지에 뒤덮일 때도 목련의 지순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추함도 용납하지 않고 고고하게 순백을 지킨다.
그런 목련이 진다. 달빛 같던 목련의 무더기가 오늘은 공포에 질린 한두 송이만 남긴 채 비상 섞인 핏빛으로 죽어간다. 화사하기만 한 벚꽃이나 별이 쏟아진 것 같은 비탈밭의 배꽃이 바람에 휘날려 마지막 꽃가루의 향연을 베풀 때, 목련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를 가려서 그냥 떨어진다. 그 슬픈 흔들림으로 제 발 밑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화사하던 속살의 흰빛은 누렇게 퇴색되다가 꽃받침 가까운 곳으로부터 부자탕처럼 죽음의 색깔로 변하면서 최후의 낙하를 준비한다. 목련의 마지막 자존심은 최후의 낙하를 남이 지켜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벚꽃이나 배꽃처럼 흩날림의 향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도 않는다. 한겨울을 견디면서 순백을 준비하듯 초연한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다. 개나리는 아직도 파란 이파리 사이에서 샛노랑색으로 발버둥치고, 산벚은 화려한 흩날림의 향연을 끝내고도 연보라 새순 사이에 남아 꽃잎의 그 연분홍이 진한 분홍으로 짙어가면서 하소연하는데, 삶에 미련을 두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하소연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목련의 체념이 그 속살의 순백만큼 처연하다.
떨어진 꽃잎은 금방 최후의 색으로 변한다. 속살의 순백을 아무 미련도 없이 버린다. 그리고는 최후의 색깔을 하루가 다르게 감추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그건 좀 늦게 제 모습을 드러낸 자목련도 마찬가지다. 그 대신 어느새 파릇한 잎이 눈을 틔운다. 그렇게 한 여름의 그늘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목련의 아름다운 죽음은 까맣게 잊고 그 푸름에 쉽게 젖어 버린다.
목련은 무엇으로 그렇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겨우내 불던 모진 바람일까? 뿌리에서 길어 올린 세상의 더러움인가? 달빛 같은 순백의 속살인가? 아파트 틈새로 보이던 처절한 낙조인가?
사람에게 아름다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앉은 채로 기도하다 열반한 어느 스님의 죽음은 참으로 신비로운 죽음으로 생각되었다. 죽기보다 살아 있기를 원하고, 얻어지지도 않는 것을 구하려 하고, 사랑과 이별하기를 거부하고, 미움과 만나기를 꺼리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용서받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신 공양한 어느 소설의 주인공 같은 죽음도 참으로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도 아름답고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주변에도 목련의 죽음처럼 부러운 모습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얼마든지 있다. 두 달쯤 누워 계시다가 염불을 외면서 숨을 거두신 나의 할머니, 아흔을 넘기고도 하루도 눕지 않고 생신 이튿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머리맡에 성경을 놓으시고 잠결에 소천하신 처조모의 죽음은 목련의 죽음처럼 부러운 죽음이었다. 이 분들은 적어도 내게만은 아무런 한도 남기지 않으셨다. 목련 같은 삶으로 목련같이 애처롭게 가신 어머니, 누님의 죽음도 아름다운 죽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분은 나의 가슴에 너무나 큰 한을 남기셨다.
나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하루도 죽음의 순간을 잊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은 그 시간이 요원한 모양이다. 그러나 혈육의 죽음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가르는 듯하다.
목련이 질 때 떨어지는 창 밖의 목련을 바라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쉽게 잊혀지는 죽음이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으로 남는 죽음은 별로 바라고 싶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 뇌리에 슬픔으로 남기 때문이다. 한으로 남는 죽음이 되기도 싫다.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들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쉽게 잊어지는 죽음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 목련이 지는 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새로운 의문에 사로잡힌다.
(2002. 4. 13.)
'느림보 창작 수필 > 물밥(삶과 죽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 없는 해바라기 (0) | 2002.11.08 |
---|---|
중미산 가는길 (0) | 2002.08.11 |
그날밤, 강나루에서 (0) | 2002.01.09 |
출감 전야 (0) | 2001.12.25 |
문주란이 꽃을 피울 때 (0) | 200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