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여시들의 반란

느림보 이방주 2007. 7. 1. 19:37
 

여시들의 반란


이방주

‘외시, 女試’

지난 6월 29일 어떤 유명 일간지 2면 톱기사의 타이틀이다. 본문은 외무고시 합격자 31명 중 여성이 21명이라는 내용이다. ‘女試’란 여성의 합격률이 높다는 의미겠지만, ‘여시’란 발음 때문에 여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이건 성차별이라기보다 성희롱이다. 외무고시뿐 아니라 사법시험, 고급공무원, 기업체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하여 언론은 부추기고 사회가 춤을 추듯 떠는 호들갑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고정관념으로 바라보는 교육계는 예삿일이 아니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등학교 교사들의 여성비율도 말도 못하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내아이들이 모두 여성화될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교사에게 교육을 받아 사내아이가 여성화된다면, 예전에 온통 남자 교사에게만 교육을 받은 오늘의 어머니들은 모두가 남성화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남성화되지도 않았고, 당시에 그들의 남성화를 우려한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가 주당 겨우 20여 시간을 여교사에게 교육 받는다하여 여성화된다면, 나머지 시간에 만나는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남성은 식물인간이어야 한다. 교육의 성과는 교사의 성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교직관에 달려 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양성적 성품을 지니는 것은 여교사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과정도 이를 따르고 아이들도 변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옹색한 고정관념의 항아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이 있다. 우주의 원리를 인간사에 연계시킨 기발한 사고이다. 꼭 맞는 말이다. 하늘은 생명의 원천이다. 생명의 씨앗이고 에너지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땅은 생명의 보금자리이다. 생명의 싹을 틔우고 젖줄이 되고 기대고 의지할 생활의 언덕배기이다. 하늘과 땅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없어지면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남자는 하늘처럼 높고 여자는 땅처럼 낮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씨내리면 땅이 싹을 틔우며, 햇볕을 쬐면 물을 길어 올리는 상보적 관계라는 말이다. 서로 다르므로 보완의 필요성을 설명한 말이지 높고 낮기에 처신의 방법을 이른 말은 아니다.

 

중국 은나라 시대의 갑골 문자에 나타난 ‘女’자는 새로운 생명체를 분만하는 성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에 비해 ‘男’자는 ‘田’과 ‘力’이 합하여 이루어진 회의 문자이다. 문자의 형성과정에서 상형은 기본문자이고 회의는 응용문자이다. 언어가 사고를 담는 그릇이라면 동양에서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영어에서 남자 또는 인간은 ‘man’이다. 그러나 여자는 ‘woman’이다. 여성은 ‘인간’이란 말에 ‘wo-’라는 접사가 붙어 이루어진 말이다. 여성은 남성에게서 파생되었다는 서양식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말은 ‘남’, ‘여’, ‘사내’, ‘계집’이 대등하게 독립된 말이다. 이로 보아 남성을 우위로 생각하는 것은 서양에서 전래한 사고일 것이다.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남녀 간에 성적 능력 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성과 개인차가 존재할 뿐이다. 일터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그냥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바보 온달을 출세시킨 평강공주나 마팔이 서동을 제왕으로 등극시킨 선화공주 시대의 여성은 능력과 꿈을 남성을 통해서 드러내었다. 남성주의자들은 그런 과거를 기준으로 여성을 집안에 묶어놓고 오만과 독선만으로는 이 다양하고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감당할 재간이 없을 것이다.

 

여성이 운전 기술을 익히고, 치마를 법복으로 갈아입을 때, 남성도 여성만의 영역에 도전하여 전문가가 되었어야 한다. 그들을 ‘女試’라고 비아냥거릴 게 아니라, 女試를 통한 이른바 여시들의 반란에 더 이상 자신의 영역을 점유당하지 않도록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적응하는 현명한 남성이다. 남성과 여성은 이제 새로운 세계로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함께 꾸려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07. 7.1.) 

충청투데이  07. 7.9일자 칼럼 게재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3386

2007년 07월 09일 (월) | PDF 20면 충청투데이 cctoda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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