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씨앗 고르기보다 잘 가꾸는 농사

느림보 이방주 2007. 4. 13. 10:25

[기고]씨앗 고르기보다 잘 가꾸는 농사
 
 



교정에 봄 햇살이 눈부시다. 학교 울타리 척박한 땅에 심은 보리가 먼데서 봐도 파랗다. 비라도 흡족하게 내려주면 울타리를 파랗게 덮을 기세이다. 그 생명력이 햇살보다 싱싱하다.

석축 위 거친 흙에다가 그늘까지 지는 거친 땅에 보리를 심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존경스럽다. 사실 보리는 대접받은 곡식은 아니었다. 삶의 힘겨운 여로를 일컫는 대명사로 쓰인 것이 보리밥이다. 그러나 민족의 끈질긴 명줄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척박한 땅에 뿌리 내려 겨울을 동토에서 지내고, 이른 봄 파랗게 그 생명력을 자랑하는 보리를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환경이 저와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이들은 해발 250m의 척박한 산기슭, 돌 틈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죄도 없이 척박한 교육환경을 감수해야만 한다.

산술적 계산으로 보면 75명 학생들에게 9명의 교과 교사, 교장, 교감, 행정실 직원, 도서관, 과학실, 급식소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훌륭한 교육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학교 운영비 대비 학생 수를 계산해보면 도시 아이들보다 더 나은 환경이라는 계산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1명의 교과 교사가 자기 전공의 3개 학년의 수업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전공교사가 없는 교과목도 있다. 순회교사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교육은 수업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말이다. 교직원들과의 인간적인 따뜻한 만남도 없었다면 이 아이들은 아마도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고등학교에서 더 심하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2, 3학년 과정은 선택중심교육과정이다. 이론상으로 가장 이상적인 교육과정이겠지만, 지방의 소규모 고등학교는 실행과정의 난관을 면하기 어렵다. 교사 정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공 교사를 모두 모셔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학생수가 적기 때문에 동아리활동이나 특기 적성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교육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본래 타고난 성정이나 창의성이나 지능이 우수하다하여도 당장 나타는 숫자 놀음에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이나 학부모, 좋은 학생만 가려 뽑을 수 있는  세칭 일류 대학에서는 고교등급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재의 내신성적제도는 교육환경의 차등을 보상해 주는 제도적 장치라 생각한다. 실제로 지방 학교에서 내신 성적 덕으로 세칭 일류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척박한 땅에 길들여진 보리처럼 훌륭하게 학교생활을 마치고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대학에서는 좋은 학생을 선발하여 쉽게 가르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향하는 것이지 현재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씨앗이 좀 부실하더라도 잘 가꾸어 무성한 보리밭을 만드는 교육력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대학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삼불정책에 온몸을 다하여 저항하는 몇 개의 대학은 어려운 환경에서 교육의 내실화를 기하는 다른 대학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적도 우수하고, 가정환경도 좋으며, 좋은 학교에서 교육받은 입학생만 골라 뽑아 손쉽게 가르치겠다는 일부 대학의 안일함이 역겹다. 어렵고 힘겹게 자란 아이들은 팽개치자는 심사인가?

세칭 일류라고 하는 대학은 경쟁력 상실의 책임을 중고등학교에 떠미는 치졸한 편견을 버리고, 교육의 본질을 돌아보는 열린 사고로 바꾸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울타리 밑 척박한 땅에서도 잘 가꾸어내는 보리농사처럼 말이다.

(충청투데이 게재 2007.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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