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 370

상당산 호랑이

상당산 호랑이 나는 오늘도 네가 그립다. 너의 고운 얼굴이 그립다.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길고 성긴 속눈썹을 드리운 너의 눈빛이 그립다. 새벽안개가 걷힐 무렵 이름보다는 아름다운 미호문에 오르면 거뭇거뭇 네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뭇한 실루엣이 초록으로 변해갈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너를 응시한다. 한남금북정맥 골짜기마다 잔설이 녹고 초록이 꿈틀거리는 해토머리 한낮이 되면 너도 내게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다. 태양이 황홀한 노을을 너의 온몸에 쏟아 붓고 하늘빛이 시나브로 숨을 거두면 나는 아쉬움으로 몸부림친다. 너의 둥그런 등줄기 너머로 청주 시가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아침이 올 때까지 나도 외로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내수읍, 오창읍, 오송읍을 품고 있는 미호강이나 팔결들판도 내..

방죽골 장승제에서

방죽골 장승제에서 방죽골 장승제에 다녀왔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얼음이 풀리고 흙이 부드러워진다. 못가에 버드나무는 잔가지부터 옥색을 띤다. 대보름은 대개 입춘과 이웃한다. 이때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면서 새해 사람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 동제를 지내는 마을은 거의 사라졌다. 원형대로 전승되던 문의면 노현리 달집태우기도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그런데 문의면 남계리 방죽골에서 장승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주에서 청남대쪽으로 가노라면 오른쪽으로 방죽골 마을유래비가 보인다. 회덕황씨 문의파 낙향시조인 황희옥이 1470년경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땅을 개간하고 방죽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연년세세 황씨네 삶의 터전이 되었다. 마을은 나지막한 야산 기슭에 동남향으로 포근하게 들어앉았다. 앞에는 정방..

고려견의 생각

고려견의 생각 초롱길을 혼자 걷는데 목줄도 없는 개가 나를 보며 ‘앙앙’ 짖어댄다. 달려들 기세이다. 개는 무엇으로 짖을까. 윤동주 시인은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라고 했다. 시인이 자신을 어둠으로 규정한 까닭은 지식인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도 어둠이라 부끄러워하면서 ‘가자, 가자’ 해야 하나. 어떤 이는 개가 짖는 것은 반가움의 표현이라 한다. 그럼 밝음이다. 개도 두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누구나 어둠과 밝음이 있다. 이빨을 드러내고 앙앙거리는 초롱길의 개는 나에게서 어둠만을 본 것이다. 어둠 뒤의 밝음은 보지 못한 것이다. 청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가면 오래된 개 두 마리를 만난다. 고려견이다. 남석교 양쪽 머리 법수(法首) 상단에 조각되어 서 있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여기..

정상동 돌꼬지샘

정상동 돌꼬지샘 샘은 시작이다. 샘은 물길의 시작이다. 바위산 마루에 세운 보리암 절집도 바위틈에 샘이 있다. 신라 혁거세거서간도 나정이라는 샘 곁에서 알로 태어났다. 역사도 샘으로부터 발원한다. 땀은 땀샘에서 나오고 눈물은 눈물샘에서 나온다. 샘은 가치와 진실의 시작이기도 하다. 인류는 자궁샘에서 탄생한다. 샘은 생명의 근원이고 문명의 시작이다. 금강처럼 큰물도 샘으로부터 시작한다. 금강을 거슬러 미호강으로 무심천으로 오르며 원류를 찾는다. 미호강과 무심천 합류 지점인 까치내로 흘러드는 지류 정상천이 있다. 정상천은 정상동 소류지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지점에 돌꼬지샘이 있다. 그래서 정상천 발원지를 돌꼬지샘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상동 돌꼬지샘을 찾아갔다. 청주 북쪽으로 시가지를 성벽처럼 감싸고 있는 ..

따비

따비 엇, 저게 뭐지? 아 따비구나. 저게 바로 따비야. 한국민속촌에서 오래된 농기구를 발견했다. 문우들과 이야기에 빠져서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따비를 처음 본 것은 거의 50년 전 벽지학교에 부임했을 때이다. 화전민 학부모 집에 올챙이묵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헛간에 따비가 있었다. 밭을 가는 농기구 같은데 삽도 아니고 쟁기나 극젱이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이 따비라는 것을 학부모에게 물어서 알았다. 전에는 ‘따비’ ‘따비밭’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농기구 이름이라는 것은 몰랐다. 어른들은 산비얄을 일구어 고구마나 조를 심어 먹는 밭을 따비밭이라 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던 19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는 2월이면 산비얄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 그 밭을 따비밭이라 했다. 해..

나의 소주 반세기

나의 소주 반세기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나의 소주는 딱 한 잔이다. 반백년 소주 배움이 돌고 돌아 겨우 한 잔으로 돌아왔다. 고희를 맞은 내 삶의 영역은 딱 소주 한 잔으로 이룬 나비물만큼밖에 안될 것 같아 마음 아프다. 한 잔을 놓고 잘라 마시고 또 잘라 마신다. 씁쓸하다. 소주 입문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망의 고3이 될 열아홉 살 2월이다. 학교는 2월이 헐렁하지만, 흔들리는 가슴은 가눌 길이 없었다. 학교길 고갯마루에 구멍가게를 겸한 주막이 있었다. 겨울도 봄도 아닌 나른한 오후 하굣길, 주머니를 뒤져 소주 한 병을 샀다. 병뚜껑을 이빨로 물어 열었다. 한 모금 ‘쭈욱’ 빨아보았다. 목구멍에 ‘캭’ 불이 붙는다. 씁쓸하다. 씁쓸하더니 달달하다. 화끈하게 남은 맛은 가슴 가득한 바로 그..

칭키즈 칸 마당에 세종대왕이

칭키즈 칸 마당에 세종대왕이 말은 달리지 않는다. 칭키즈 칸 기마상은 언덕 위에서 은빛으로 빛나지만 그냥 멈추어 서 있다. 은빛 잔등에 8월의 볕이 부서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금방 파란 물감을 마구 쏟아 부을 듯하다. 푸른 하늘이 있기에 칭키즈 칸은 눈부시게 보이는 것이다. 천진벌덕(Tsonjin Boldog) 벌판이 바로 여기이다. 칭키즈 칸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행운의 황금 채찍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벌판이다. 고향을 바라보고 우뚝 서있는 칸의 모습에 몽골인들은 감동한다. 칭키즈 칸의 마당이다. 초원을 건너온 바람이 언덕으로 몰아친다. 계단을 오르는데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바람이 차다. 칸이 밟고 있는 건물에 들어가면 화장실이 있고 말의 뒷다리 쪽으로 오르면 칸이 들고 있는 황금색..

발산 끝자락에 모신 부처님

발산 끝자락에 모신 부처님 상당산 정상 치소 자리에서 왼쪽 성벽은 한남금북정맥의 일부가 된다. 동암문으로 살짝 나서면 한남금북정맥 이티재로 향하는 산줄기다. 좌청룡 성벽을 타고 내려가면 진동문을 거쳐 동장대인 보화루를 만난다. 오른쪽 성벽은 백호를 타고 미호문을 거쳐 서남암문을 지나 공남문에 이른다. 중간에 서장대가 있다. 상당산성은 이렇게 마을을 안고 돈다. 미호문에서 바라보면 내가 사는 청주 북쪽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미호강과 오창들을 건너 만뢰지맥이 나지막하게 뻗어 오창읍과 옥산면을 품었다. 미호문은 상당산성 서문이다. 상당산 우백호는 와우산 살진 암소를 발견하고 바로 공격하려고 잔뜩 움츠린 형상이다. 미호문은 여기에 호랑이 기운을 제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여기서 한 줄기가 급하게..

제일교회와 돼지국밥

제일교회와 돼지국밥 친구 연 선생이 육거리시장 제일교회 앞에서 만나잔다. 밥을 사준다고 한다. 점심 얻어먹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육거리시장 구경을 할 수 있겠다. 그래 가자. 주중동 마로니에공원 정류장에서 111번 시내버스를 탔다. 주중동에서 육거리시장까지 점심 얻어먹으러 가는 길은 단순하지 않다. 청주대학교, 국립미술관, 시청, 도청을 다 지나야 한다. 육거리시장 정류장에서 내렸다. 인도는 남새를 파는 할머니들이 점령했다. 나는 무심코 큰길을 건넜다. 그때 친구가 위에서 부른다. 제일교회를 그쪽으로 옮겼냐. 왜 건너 가냐. 아 그렇지. 제일교회는 시장 쪽이지. 그러고 보니 제일교회가 가까이서도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주변의 큰 건물에 가렸다. 어머니는 열무 서른 단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

알나리깔나리 쟤들 좀 봐 -구룡산 장승공원에서-

알나리깔나리 쟤들 좀 봐 -구룡산 장승공원에서- 이방주 문의면 하석리 장승공원이 궁금하다. 2005년 6월에 구룡산에 장승을 세우고 장승축제를 열었을 때 참석했던 기억이 났다. 당시 매우 뜻 깊은 행사라고 감탄하며 이 행사를 주도한 오효진 군수님에게 감사하기도 했었다. 장승공원은 구룡산성 서쪽 기슭이다. 청주시내에서 가려면 현암사를 지나 대청호 공원으로 건너가는 다리 쪽으로 좌회전하기 직전에 오른쪽 골짜기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간다. 거기에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 구룡산 등산로 안내판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가파른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 무너진 구룡산성 돌더미가 나온다. 돌길을 따라 등마루를 밟으면 바로 정상인 삿갓봉이다. 이 봉우리는 군사정권 시절 청남대를 지키는 초소가 있어서 아무나 오를 수 없었다.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