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비
엇, 저게 뭐지? 아 따비구나. 저게 바로 따비야.
한국민속촌에서 오래된 농기구를 발견했다. 문우들과 이야기에 빠져서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따비를 처음 본 것은 거의 50년 전 벽지학교에 부임했을 때이다. 화전민 학부모 집에 올챙이묵을 얻어먹으러 갔는데 헛간에 따비가 있었다. 밭을 가는 농기구 같은데 삽도 아니고 쟁기나 극젱이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이 따비라는 것을 학부모에게 물어서 알았다. 전에는 ‘따비’ ‘따비밭’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농기구 이름이라는 것은 몰랐다. 어른들은 산비얄을 일구어 고구마나 조를 심어 먹는 밭을 따비밭이라 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던 19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언 땅이 풀리기 시작하는 2월이면 산비얄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 그 밭을 따비밭이라 했다. 해토머리에는 누구나 곡괭이나 삽을 들고 나섰다. 면사무소에서 따비밭을 일구는 농가에 밀가루 배급을 주었다. 나서는 식구수대로 밀가루 포대가 늘어났다. 배급 받은 밀가루로 누릉국이나 수제비를 해먹었다. 정부에서는 경작지를 늘이려는 시책이었지만 영세농들은 주린 배가 더 급했다. 그래서 따비밭은 늘어났다. 그래도 따비라는 농기구는 없었다.
화전을 일구는 이들은 따비로 풀뿌리를 헤치고 짱돌을 파냈다. 쟁기나 극젱이로는 갈 수 없는 거친 땅을 따비로 파서 씨앗을 세웠다. 극젱이와 모양은 비슷하지만 한마루만 있고 성에가 없어서 앞에서 끌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대개는 삽보다 좁은 날이 하나인 것도 있고 두 개인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민속촌에서 본 것은 날이 아니고 원뿔 두 개를 한마루에 거꾸로 박은 송곳형이다. 쌍날형 따비라고 하지만 날이 아니라 코끼리 이빨처럼 삐쭉한 것이 쌍으로 달려 있다. 후대에 쟁기나 극젱이로 발전하는 전 단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쟁기처럼 앞으로 나아가면서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삽처럼 뒤로 물러서면서 땅을 파는 식으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화전이나 산밭에 풀뿌리 나무뿌리도 헤치고 땅을 갈아엎을 수 있을 것이다. 따비가 없으면 자갈 반 흙 반에다가 지독한 나무뿌리까지 얽혀 있는 땅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화전이 아니라도 산비얄에서 따비밭을 일구어본 사람은 안다. 좁쌀 한되박도 한의 열매라는 것을…. 누룽국이나 수제비로는 땅 파는 기운을 얻지 못한다. 산기슭 생땅에서 지독하게 뻗어가는 아카시나무 뿌리를 따라가다 지쳐 파던 돌무더기 위에 주저앉아야 한다. 얽힌 풀뿌리에서 흙 한줌을 털어내다가 너무 따사로워서 미운 봄볕을 등지고 앉으면 이마에 진땀이 흐른다. 산촌이나 화전민들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전쟁무기 같은 따비를 생각해냈을까. 원수 같은 짱돌이 얼마나 기운을 빼앗았으면 따비가 그렇게 삐쭉할까.
따비밭에는 대개 강냉이나 기장을 심는다. 강냉이는 새끼손가락 굵기만큼 튼실한 뿌리를 거친 땅에 내린다. 돌틈 나무뿌리 사이로 박은 뿌리가 황무지에서 영양을 길어 올려 팔뚝만한 열매를 업고 우뚝 선다. 거센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강냉이 밭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땅에는 콩이나 팥을 심었다. 화전민들은 강냉이, 콩, 팥, 조, 기장을 섞어 풀떼기를 만들어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한다. 따비밭을 일구는 것도 아픔이지만 풀떼기를 먹어야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아픔이다. 아픔 속에서도 식솔들을 살리고 돈을 모아 아랫마을로 옮겨 살 꿈을 꾼다. 따비는 훼방꾼을 물리치고 생활을 찾아가는 삶의 병기였다. 화전민이나 영세한 산촌 사람들이 꿈으로 가는 명줄이었다.
민속촌에서 따비를 들여다보니 50년 전 아이들의 풀떼기 도시락이 되살아온다. 그러나 이제 산촌에서도 따비 같은 농기구는 없어졌다. 따비로 일구어 연명하던 따비밭은 숲이 되었다. 따비는 이제 민속촌이나 박물관에 가 있다. 풀떼기를 먹던 아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탄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렸으니 마음밭을 일구는 따비나 찾아야 한다.
세상은 온통 나무뿌리나 풀뿌리에 얽혀 있는 비얄이다. 험한 세상에 박힌 나무뿌리, 풀뿌리, 짱돌은 쉽게 뽑히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그만한 따비도 없다. 아니, 돌아보면 세상은 내 눈에 가시 때문에 짱돌로 보이거나 나무뿌리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이 비얄밭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짱돌이나 풀뿌리가 세상에 병(病)이 되고 누(累)가 된다. 따비로 갈아엎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내안의 비얄밭이다.
나는 속셈이 앞서서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건 아닌가. 눈 흘기고 돌아서서 외면하고, 다시 다가서는 발걸음에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지는 않았나. 입술에는 꿀을 바르고 손에는 비수를 감추지 않았나. 쉽게 배반하고 필요하면 다가서는 무염치는 아닌가. 끈질기고 징글맞게 덤비지는 않았는가. 인생을 이겨야 하는 게임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정신의학자들이 말하는 ‘소시오 패스’는 아닌가. 혹시 ‘나바라기’는 아닌가. 내안의 짱돌이나 엉킨 나무뿌리를 돌아보기나 하는가.
나를 배려하지 않는 세상을 내가 배려하면 그것은 곧 나에 대한 배려로 돌아온다. 따비로 내안을 갈아엎으면 얼크러졌다던 세상이 풀어진다. 탐할 것도 성낼 것도 없이 그냥 갈 곳을 바라보며 걸으면 적어도 바보는 되지 않는다. 목적을 두지 말자. 내게는 속셈이 없다. 그렇게 내 안을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지혜가 바로 따비이다. 아니 세상에는 풀도 나무뿌리도 짱돌도 아예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길을 나에게 돌리니 가슴은 텅 비어버리고, 가슴이 비어버리니 징그러운 세상도 순순해진다.
지금은 보릿고개이다. 따비를 벼리어 마음속에 득실거리는 삼독(三毒)을 비워낼 때다.
(2022.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