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산 끝자락에 모신 부처님
상당산 정상 치소 자리에서 왼쪽 성벽은 한남금북정맥의 일부가 된다. 동암문으로 살짝 나서면 한남금북정맥 이티재로 향하는 산줄기다. 좌청룡 성벽을 타고 내려가면 진동문을 거쳐 동장대인 보화루를 만난다. 오른쪽 성벽은 백호를 타고 미호문을 거쳐 서남암문을 지나 공남문에 이른다. 중간에 서장대가 있다. 상당산성은 이렇게 마을을 안고 돈다.
미호문에서 바라보면 내가 사는 청주 북쪽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미호강과 오창들을 건너 만뢰지맥이 나지막하게 뻗어 오창읍과 옥산면을 품었다. 미호문은 상당산성 서문이다. 상당산 우백호는 와우산 살진 암소를 발견하고 바로 공격하려고 잔뜩 움츠린 형상이다. 미호문은 여기에 호랑이 기운을 제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여기서 한 줄기가 급하게 뻗어 내리다가 백화산으로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백화산에서 산줄기는 국동리를 엉덩이 뒤에 두고 이색선생의 영당인 목은 영당과 주성강당을 품에 안고 둘로 갈라진다. 남으로는 지금 개발되어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대원아파트, 선광아파트, 주공아파트, 성모병원, 천주교 사천동성당으로 가다가 무심천으로 스며든다. 북으로 한 줄기는 주성동, 주중동을 품에 안고 발산천 유역의 기름진 들녘을 이루는 발산이 된다. 지금 발산 등마루를 밟아 마애비로자나부처님을 찾아가는 중이다.
발산은 백화산에서 발원한 발산천을 흘려보내어 수름재라고 불리는 주성동 주중동 사람들이 먹고 남을 만한 넉넉하고 기름진 들판을 선사한다. 발산천에는 늘 맑은 물이 흐르고 들녘은 가뭄에 마른 법이 없다. 자연은 이렇게 감사하고 아름답다.
다시 상당산 미호문 누각으로 올라간다. 상당산, 백화산, 발산의 감사함은 비단 수름재 마을에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발산은 품 넓은 어머니처럼 긴 팔을 늘어뜨려 수름재 뿐만 아니라 북녘에서 청주 도심을 쓸어안고 있다. 마치 사람이 쌓아올린 높은 담장처럼 하늘이 내려주신 나지막한 성벽처럼 시민을 감싸 안았다. 높낮이가 뚜렷하지 않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지막한 산줄기는 상발산, 중발산, 하발산으로 불린다. 그러나 걸어보면 느낄 수 있다.
발산 등마루를 걸어 비로자나부처님을 찾아간다. 마을이 잠에서 깰까봐 나지막하게 꿈틀거리는 발산의 엷은 용틀임이 발산천을 옆에 두고 무심천을 만나면 불끈 고개를 쳐든다. 그 끝자락에 부처님이 계시다. 청주정하동마애비로자나불좌상(淸州井下里磨崖毘盧舍那佛坐像)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이다. 불상은 문화재로 등록되는 순간 부처님의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미술품이 된다. 그러나 나는 길고 긴 발산을 힘들게 이끌고 무심천까지 내려오신 부처님으로 이해한다. 차갑고 매서운 시련을 북으로부터 막아주는 청주시의 북방 수호신으로 생각한다.
마애불은 지나다니며 보는 것보다 비교적 주변 정리를 잘 해놓았다. 다른 불상들이 수난을 당하듯이 이 불상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코와 눈이 크게 훼손되었다. 속설에 의하면 부처님의 코를 긁어다가 돌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자손을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나 정말 아들을 낳았는지 확인할 길 없다.
대개의 마매불은 산의 일부인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비해 정하동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커다란 돌에 새겨서 연좌대 위에 세워 놓은 것처럼 보였다. 산과 바위 사이가 조금 떨어져 있다. 그러면서 마치 마애불을 보호하듯 바로 뒤에 바위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혹시 배후에 있는 바위벽에 무슨 그림이나 글씨 같은 흔적이 있나 살펴보았으나 발견하지는 못했다. 주변에 사찰이 있었는지도 안내판에서 설명하지 않았다. 혹시 바위벽을 배경으로 하고 마애불까지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구조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애불이라기보다 그냥 불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서서 살펴보았다. 불상은 서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산에서부터 좀 떨어져 나온 것은 본래 산에 붙어 있었는데 산이 허물어진 것인지 애초부터 그렇게 떨어져 있는 돌에 부조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안내판 설명에 의하면 불상의 높이가 323cm라고 한다. 대좌 높이 45cm, 폭은 280cm라고 한다. 상당히 큰 편이다. 불상은 좌상인데 연꽃을 엎어 놓은 복련으로 되어 있었다. 대개 좌상은 연좌대이고 입상은 복련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약간 다르다.
부처님은 상호는 몸에 비해 매우 큰 편이었다. 게다가 몸에 비해 얼굴의 윤곽을 더 뚜렷하게 강조하였다. 눈이 크고 코도 크다. 왼쪽 눈과 코가 많이 훼손되었다. 이마에 백호 자리가 매우 깊은 것으로 보아 수정 같은 매우 큰 보석이 박혀 있었던 것 같다. 얼굴은 퉁퉁한 사각형이다. 볼까지 오동통하게 솟아올라 귀여운 열여덟 처녀 같은 느낌이다. 귀가 거의 얼굴의 길이만큼 크다. 몸은 두툼한 어깨와 무릎이 넉넉하여 균형을 이룬다. 가슴과 배에 비해 어깨가 강조되었고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옷 주름선이 음각되어 있어 선명하다. 옷을 입은 모습은 장삼을 어깨에 걸쳐 입는 통견형식이다. 어깨에 걸친 옷자락이 무릎을 덮고 있어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인간적인 모습이라면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실제 사람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 이상적 인간상을 그린 신격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눈언저리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애써 찾아야 한다. 미소를 억지로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도 보는 이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불상은 분명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이 왼손의 검지를 감싸 쥐고 있었다. 지권인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를 감싸 쥐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하나로 만들고 있다. 왼손은 중생을 의미하는 손이고 오른손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손이다. 왼손은 사바세계를 오른손은 불법의 세계를 의미한다. 결국 중생과 부처님이 하나이고 속계와 불계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곧 진리이고 법이다. 마애불 중에 비로사나불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정하동 근처에 화엄종의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으며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었나 보다. 근처를 돌아보아도 사찰 터로 보이는 대지는 찾을 수 없다. 아니면 구루물(운천동) 사찰촌에서 청주 수호를 위해서 이곳에 법신불을 모셨을 수도 있다.
불상이 서남쪽을 향하고 있는 의미를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았다. 부처님 앞에서 조금 떨어져서 발산의 산줄기와 함께 바라보았다. 이런 때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며 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서쪽으로 향하던 발산이 마을을 안고 끝자락에 이르러 고개를 쳐들면서 약간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부처님은 용틀임하는 산줄기의 힘을 받아 서남쪽을 향하게 된 것이다.
청주시에서 마애불, 정북동 토성, 돌꼬지샘을 연결하는 관광 휴양지로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개발은 자칫 파괴를 가져온다. 이미 정북동 토성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다. 충청대로에서 발산에 올라 등마루를 밟으며 마애비로자나부처님까지 걸어보면, 별장, 식당, 카페가 줄줄이 이어진다. 심지어 등마루를 타고 조성한 수로에는 물이 넘실거리며 흘러간다.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해 줄 때 자연도 인간의 보호자가 된다. 풍수(風水)라는 말은 미신이 아니라 바람과 물을 이용하고 다스리는 과학이다. 발산의 끝자락에 부처님을 모신 고려를 살던 사람들이 오늘을 향하여 가르치는 회초리가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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