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불의 예술(멋)

거울의 변증법

느림보 이방주 2025. 5. 3. 13:06

거울의 변증법

 

거울, 시대를 비추다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 표제이다. 눈에 확 들어온다. 거울이 비추는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청주박물관 정원은 봄이 넘쳐난다, 철쭉이 피고 송화도 핀다. 흰철쭉, 이팝나무꽃, 산딸나무꽃, 공조팝나무꽃 같은 하얀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오월이다. 돌계단에 할미꽃은 피었다지고 은발만 남았다. 카페에 들러 개관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전시회 포스터를 보며 문득 윤동주의 거울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열어 <자화상自畵像>과 <참회록>을 읽으며 동주가 가졌던 거울의 의미를 상상해본다.

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시적자아는 우물을 들여다본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우물은 동주의 거울이 되었다. 동주의 거울은 그냥 일상의 자연을 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거울에 ‘한 사나이’가 있다. 시적자아는 사나이가 미워지고 가엾어진다. 그리고 그리워진다. 동주의 거울에는 일상의 자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라는 밉고 가엾고 그리운 사람이 존재한다. 거울이 비추어준 시대의 모습이다. 동주는 다시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읊조린다. 동주의 거울에 추억처럼 비추어진 사나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시적자아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또 다른 사나이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시대를 사는 사나이는, 사나이들은 딱한 우리 동포이다.

동주는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나 겨레에 대한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동주는 자신이 밉고 딱하고 그리웠을 것이다. 여기서 젊은 지식인의 하얗게 표백된 양심을 본다. 동주는 그의 시 <참회록>에서 청동경을 보며 또 참회한다. ‘파란 녹’이 슨 역사라는 청동경이다. 녹이 낀 청동경에 비추니 욕된 자아의 모습이 보인다. 욕된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 ‘만 이십사 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며 참회한다. 역사를 지켜내지 못한 참회이다. 온몸으로 거울을 닦고 또 닦아도 결국 자아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다.

커피가 식었다. 특별전시실인 청명관으로 건너간다. 정원에 전시된 문인석 무인석이 봄꽃에 조화롭다. 전시실 앞에 직원들이 나와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보러 가면서 현관 거울에 나를 비추어본다. 거울을 보는 건 우리네 일상이다. 그러나 윤동주처럼 내면을 관조하여 부끄러운 나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그냥 남에게 보일 외양만 슬쩍 비쳐볼 뿐이다. 일상에서 거울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를 반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찌 볼까 하는 남의 눈을 대신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거울, 시대를 비추다’ 특별전은 ‘빛을 담다’ ‘권력이 되다’ ‘문화를 잇다’라는 3부의 소주제로 정연하게 전시되었다. 1부 ‘빛을 담다’는 매끈한 금속이 반사하는 태양의 빛을 발견하고 샤먼의 가슴에 깃든 태양을 느끼는 고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부 ‘권력이 되다’는 샤먼이나 왕 같은 특정한 세력에게만 주어졌던 거울을 조명하였다. 3부 ‘문화를 잇다’는 문화를 담은 거울을 보여준다.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청동경 뒷면에는 많은 글자와 문양이 새겨졌다. 시대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늬와 글자를 통해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 소망, 이상은 물론 이웃과의 교류의 모습 같은 모든 문화를 상징한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거울은 단순하게 우리네 외양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방향이나 양심까지도 담아내는 도구라 여기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주는 청동경에 비친 부끄러운 자화상을 발견하고 참회하고 또 참회한 것으로 보인다.

동주와 같은 시대에 창작 활동을 한 이상은 시 <거울>에서 내면을 거울에 비추어본 시인이다. 이상은거울이 답답했다. 그것은 ‘소리가 없고’ ‘듣지 못하는 귀’ ‘악수를 모르는 손’ 때문이다. 거울에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하지만 비추어주는 듯하던 거울이 오히려 단절시키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 닮았지만 거울이 가로막아 소통할 수 없다. 참나와 거울 속의 나는 하나여야 하는데 분열되고 왜곡된 모습이다. 내가 소망하는 것을 거울 속의 나도 소망하는지 알 수 없다. 이상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은 자아를 비추어 자아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해주는 도구여야 하는데 이상의 거울은 서로가 분열되고 단절되어 교감도 공명도 없다.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자아가 갖는 좌절감과 시대의 비극성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거울에 갖는 기대는 일상적이다. 자기반성과 자아탐구, 자아정체성의 형성, 긍정적인 자아발견의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거울, 시대를 비추다’ 특별전도 결국은 일상적 기대가 ‘빛, 권력, 문화’ 같은 상징적 의미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윤동주나 이상의 거울에 비친 아픈 시대의 고통과 좌절을 본다. 동주의 부끄러움이나 이상의 답답함은 결국 지식인의 시대적 고통이다. 역사에 대한 고민이고 시대적 고뇌이다. 지식인의 무력감에서 오는 비극적 좌절감이다.

동주나 이상은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도 억압적이고 비정상적인 민족의 역사에 대해 부끄러움과 답답함을 토로했다. 서양 철학에서 거울은 진리를 인식하는 과정이고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진정한 현실을 깨닫는 도구로 생각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진리, 또는 조상의 영혼과 통하는 샤먼의 도구로 여겼다. 윤동주나 이상도 고대의 샤먼처럼 자신의 내면을 보고자 한 것이다.

세상은 모두 나의 거울이다. 시대도 또한 나의 거울이다. 시대의 모든 현상과 가치를 통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은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역사에 요즘처럼 가치의 혼돈에 빠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대는 없었다. 내 발로 어디를 디디고, 내 눈으로 어디를 바라보고, 내 입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시대가 거울이라면 이 거울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두렵다. 그러나 거울은 깨져도 담겨있던 나는 깨지지 않는다. 다만 정당한 가치를 바라보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

돌아오는 길 하늘이 거울처럼 맑다.

(202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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