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청주성 탈환과 주봉마을 민충사(愍忠祠)

느림보 이방주 2024. 8. 9. 22:16

청주성 탈환과 주봉마을 민충사(愍忠祠)

 

 

산양재 마을 탐방에서 박춘번 묘비를 읽고 청주성 탈환 영웅의 행적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순천박씨인 춘무(春茂), 춘번(春蕃), 동명(東命)이 그들이다. 이들의 행적은 산양재 마을(東陽村) 경로당 연혁비에도 있고 산양재 마을 박춘번 묘비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박춘번 묘비나 산양재 경로당 연혁비에는 청주성 탈환에 대하여 춘번을 중심으로 그의 형인 춘무, 조카인 동명이 도와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 살펴보았다. 순천박씨 세 분의 공로는 다를 게 없는데 그들의 활동이 대부분 춘무가 중심이 되고, 그의 아들인 동명이 크게 활약하였고 춘번도 여기에 함께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명은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에서도 공이 컸고 그 아들인 홍원도 합세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박동명의 공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은 임진왜란을 지나 병자호란 때까지 세운 공적이 있으므로 더 크게 부각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괄의 난 평정에도 아들과 함께 공이 켰던 것으로 역사에 전한다. 더구나 내가 탐방한 일이 있는 옥산면 국사리 몽단이재 말무덤과 관계가 있는 인물은 박동명이었다. 그의 행적이 더 넓고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서사가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이라 믿게 되었다.

당시의 청주성 탈환은 관군보다 옥천의 중봉 조헌, 공주의 영규대사, 청주의 박춘무 형제가 일으킨 의병과 승병에 의해 성공한 것이다. 부모산 기슭인 산양재와 주봉마을에 세거해온 순천박씨의 청주성 탈환에 세운 공적을 조사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춘무 : 시호는 민양(愍襄) 호는 화천당(花遷堂) 본관은 순천. 임진왜란 당시 의병 우의대장으로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진천을 수복했고 의주로 파난하는 왕을 모셨다.

박춘번 : 화천당의 동생으로 호는 경원(慶元). 임진왜란 때 형과 함께 선봉으로 청주성을 탈환했고 후에 호조판서에 추증됐다.

박동명 : 화천당의 아들로 시호는 충경(忠景), 호는 매은당(梅隱堂). 임진왜란 때 부친과 함께 활동했으며,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웠다. 청주 옥산면 국사리 몽단이재 의마총 유래비에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부근에서 싸우다 순절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 전해지고 있다. 그때 시신을 찾지 못하여 의마(義馬)가 관복을 찢어서 물고 온 옷자락을 가지고 몽단이재에 의관장을 지내 지금도 무덤이 전한다. 의마도 옷자락을 전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주인의 무덤 아래에 말무덤이 전해 내려온다. 옥산면 이장단에서 유래비를 세우고 기리고 있다.

 

청주성 탈환의 영웅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2001년 순천박씨 문중과 충청북도 유도회에서 순천박씨 세거지인 부모산 자락 주봉마을에 민충사를 지었다고 들었다. 가서 보는 것이 가장 빠른 것이다. 날씨가 뜨겁지만 오늘도 비하동으로 향한다. 주봉마을은 가로수길에서 반송을 지나 휴암고개 가기 전에 우회전하여 들어가는 길이 있다. 마을 어귀에 연꽃이 한창 피어난 방죽이 있다. 주봉마을은 부모산 남쪽 기슭에 양지바른 자연부락이었는데 지금은 옛집은 거의 사라지고 부자들의 전원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절집이 여럿 보여서 민충사를 찾기 쉽지 않았다.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 뒤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터가 비교적 넓지만 비탈이라 넓게 생각되지 않았다. ‘愍忠祠保存會라는 건물 마당에 주차하고 다시 박동명 충신각으로 내려왔다.

박동명 충신각은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전사한 이 고장 출신 박동명(1575~1636)의 충용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충신정려문이다. 정려문 오른쪽에 梅隱諡忠景順川朴公東命旌閭事蹟碑가 있고 정려문은 왼쪽에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다. 정려문은 안에는 忠臣 贈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諡忠景公行通政大夫泰安郡守梅隱朴東命之門이라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충신각은 본래 저 아래 호암마을 언덕에 있다가 2001년 민충사가 건립되면서 이전한 것이라 안내문에 적혀 있다. 비문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이미 충과 효를 좌우명으로 삼아 9세 때 이미 忠孝두 글자를 대나무에 새겨 패용하였다 한다. 事親先盡孝 爲國更損軀라는 시구를 종형에게 부탁하여 새겨 패용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부친 박춘무가 의병을 모병하여 청주성을 공략하자 동명은 18세에 출전하여 청주 진천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병자호란 때도 박동명이 의병을 일으켜 전사하기까지 과정을 자세히 기록되었다. 특히 순국하는 과정에서 애마와의 서사가 몽단이재 유래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말무덤 설화에 대하여 믿음이 더 깊어졌다. 박동명의 일생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일생이었고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事親先盡孝 爲國更損軀를 몸으로 실천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충사는 愍忠祠保存會건물 뒤쪽에 있었다. 홍살문을 지나 사당에 이르니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담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사당 건물만 바라보았다. 민충사는 순천박씨 종친회가 중심이 되어 충청북도 유도회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건립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정재(淨財)를 내어 동참하였다는 건립비가 있었다. 민충사는 박춘무, 박춘번(박춘무의 동생), 박동명(박춘무의 아들), 박홍원(박춘무의 손자), 중봉 조헌, 영규대사, 이시발, 한혁, 정순년, 민여함, 칠백의용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민충사'의 민은 박춘무의 시호 민양공(愍襄公)의 첫 자에서, 충자는 선봉장이었던 아들 박동명의 시호 충경공(忠景公)과 종사관이었던 이시발의 시호 충익공(忠翼公)의 첫 자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민충사는 잔디를 깎아서 깨끗하고 정원수들이 단정하게 전지가 되어 있었다. 홍살문 아래에 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어났다.

배롱나무꽃 아래 愍襄公花遷堂朴先生三代倡義事蹟碑가 세워져 있었다. 창의(倡義)라고 하면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보전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비를 그냥 삼대 창의비라 부른다고 한다. 비문은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박춘무, 이괄의 난 평정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다 순국한 아들 박동명, 손자 박홍원의 공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메모할 것은 메모하고 사진을 찍을 것은 찍었다. 생각 같아서는 부모산 둘레길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날씨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얼굴에 미치는 복사열이 용광로에서 훅훅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산양재 마을의 순천 박춘번 선생 묘소와 이곳 민충사를 돌아보는 동안 청주에서 태어나고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3대 충신열사들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청주의 곳곳에 이처럼 충신, 효자, 열녀, 선정을 베푼 선인들의 행적이 남아 있는데 무심코 그냥 지나친 것이 후회 되었다. 이곳 비하동 산양재나 주봉마을은 고향 마을에서도 바로 이웃이다. 바로 이웃에 이렇게 훌륭한 사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다.

오늘의 답사로 몽단이재 말무덤과 박동명 설화, 산양재 마을의 박춘번 묘소와 산양재(동양촌) 마을의 역사, 민충사, 삼대창의 비와 청주성 탈환의 전사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다음에는 전에 답사했던 부모산성과 민충사 연화사를 잇는 둘레길을 걸어볼 생각을 해본다. 주봉마을을 나오는 길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