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META

사월이 오면

느림보 이방주 2025. 2. 5. 21:16

한국수필 4월호 권두 칼럼

사월이 오면

부이사장 이방주

사월이다. 자연이 꿈틀댄다. 사월의 생명력이다. 누가 사월의 꿈틀거림을 막을 수 있을까. 다만 몸과 마음으로 따를 뿐이다.

사월이 오면 10일이나 15일쯤 녹음을 찾아 떠난다. 어디가 좋을까. 세종시 조치원읍을 지나 비암사를 찾아간다. 비암사는 뱀서방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충청도 말로 ‘비암[蛇]절’인 줄 알고 있었지만,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3점의 불비상이 발견된 후 ‘비암(碑岩)’절이 분명해졌다. 이 불비상은 부흥백제시대 유민들의 애끓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불비상 유래담보다 사월을 맞아 비암사로 가는 길의 초록을 말하려 한다. 조치원에서 연서면 쪽으로 낮은 고개를 살짝 넘어 과수원길 모롱이를 돌아서면 꽃더미 속에 우뚝 서있는 절집 연화사가 보인다. 연화사에도 부흥백제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비상 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얘기도 너무 길어 다음으로 미룬다. 녹음을 찾아가는 길이니까, 꽃을 찾아 가는 길이니까 꽃과 녹음을 말하려 한다. 연화사 앞에서부터 배꽃과 복숭아꽃이 다투어 피어난다. 온 천지가 복숭아꽃인데 하얀 배꽃이 드뭇하게 섞인다. 연분홍 속에 하얀 배꽃의 향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달리면 길가에 낙화하는 벚꽃이 꽃잎을 흩날리며 자동차 꽁무니를 따라온다. 산기슭에는 참꽃이 피고 울타리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진다. 연화사부터 고복저수지까지 드라이브는 꿈속에서 도원도 속을 달려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꽃잔치는 비암사 입구까지 이어진다.

비암사 들머리 거뭇거뭇 솔밭을 지나면 아담하고 소박한 절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역사 대신 사악을 쫓아내는 800살 되신 느티나무는 아직 연두로 녹음 연습이 끝나지 않았다. 돌계단을 밟아 절마당에 들어서면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아홉자 경구가 몸가짐을 숙연하게 한다. 선채로 합장 삼배를 드린다. 아름다운 극락보전 뒤로 운주산 끝자락이 절집을 보듬어 안고 온통 연두로 몸부림친다. 사월도 10일에 가면 연두이다가 15일에 가면 연초록이다. 아름다운 절집 비암사는 온통 초록 치맛자락에 싸여있다. 1500년 전 백제 유민의 한이 초록으로 새생명을 얻어 부활한다. 비암사의 초록은 염원이 소생하는 힘이다. 초록은 생성하는 힘이다. 사월은 생성의 계절이다.

사월이 오면 가야할 곳이 또 있다. 부여 가림성이다. 가림성은 사월도 15일이 좋다. 가림성에는 400살 넘으신 사랑나무가 기다린다. 임천면 소재지에 차를 두고 오리쯤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초록 호흡으로 영혼을 물들이기 좋다. 올라가는 길이 포장길이기에 숨이 가쁠 것도 없다. 길가에 개나리가 피고 산기슭에는 참꽃이 불타오른다. 가림성 바로 아래 용화도량 대조사 들머리까지 벚꽃이 흩날린다. 낙화를 이루고 보랏빛 새잎이 봄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온다. 커다란 바위벽이 막아설 때쯤 성벽 너머로 느티나무가 보인다. 마지막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올라서면 말로만 듣던 사랑나무를 만난다. 사랑나무를 바라보며 700평 넘는 잔디밭을 마음 놓고 뒷걸음치노라면, 아하, 이 나무가 왜 사랑나무인지 알게 된다. 정확하게 하트를 모양이다. 사랑나무는 녹음이 한창 짙어오기 시작하는 4월 15일이어야 자신은 감추고 푸른 하늘에 분명하게 하트를 그려낸다. 나목일 때도 아니고 6월의 푸르름도 아니다. 사월의 녹음이 사랑이다. 썸 타는 젊은이들이 사랑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면 연인이 된다. 연인들의 사랑은 더 깊어진단다. 초록의 사랑나무는 생성이다. 사월은 사랑을 생성한다.

구랍 22일 어떤 방송국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연예계 데뷔 6년차 28세 가수가 대상을 받았다. 수년간 연예계를 주름잡아온 고수들을 물리치고 보란 듯이 대상을 받은 것이다. 사월의 초록에게 영광이 돌아간 것이다. 상 받은 사람은 가수로서나 방송인으로서의 능력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상을 주는 연예계가 존경스럽다. 그런가 하면 혼신의 힘으로 연기해온 망백(望百) 원로 배우가 연기대상을 받아 후배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젊은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기에는 쉽지 않다. 문단, 특히 보수적인 수필문단에서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저기 박힌 돌들이 굴러온 돌이 굴러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돌은 일단 굴려봐야 단단한지 원만한지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현상은 중앙문단이나 지방문단이나 비슷하다. 중앙에서는 지방 출신이라 경시하고 지방문단은 원로라며 혹은 창립회원이라며 영원히 군림하여 대접받으려 한다. 상허 이태준 선생은 문단에서는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서 빛이 나고 그의 자리가 성좌(星座)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상허도 당시에 문단의 폐해가 답답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한 젊은 정치인은 ‘대한민국에서 연공서열이 젊은 세대의 앞길을 가로막는 수단이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정치계든 문단이든 학계이든 이러한 연공서열의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젊은 세대의 창의를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후배를 보듬어 안는 선배를 후배들은 진심으로 받들 것이다. 원로는 스스로 굴러서 단단해지고 좋은 작품으로 모범을 보여야 초록의 존경을 받는다.

사월의 초록은 생성의 힘이다. 인재는 사월의 초록에서 찾아야 한다. 자연은 12월이 4월의 초록을 가로막지 않는다. 문단도 이제 자연이라는 하늘의 원리를 배울 때이다. 바로 지금의 능력, 현재의 빛깔 그 자체를 평가하는 연예계의 신선함을 배워야 한다. 초록에게 북을 주어야 가을이 풍성하다. 신세대들이 지닌 생성의 힘을 신뢰하고 미래를 응원해야 원로가 편안하다. 지난 시대의 케케묵은 이념으로 초록을 묶어 둘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소설계는 이미 질곡에서 벗어났다. 한강이 5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것이세계문단의 흐름이고 한국문단에 불어넣은 새바람이다.

비암사 가는 길에 꽃바람이 분다. 가림성 사랑나무가 초록으로 하늘에 사랑을 그린다. 초록 생성의 사월이다. 2025년에는 수필 문단에도 연공서열, 지방 경시, 패거리 문화의 질곡에서 벗어나 초록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한다.

(2025.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