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떠나신 아버지
“아들, 막내야”
아버지의 외마디 부름이다. 나는 가까이 사는 형님에게 급하게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새벽 2시 형인들 쉽게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파트에서 업고 내려왔지만 차에서 내려서 응급실까지는 걸어오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직의사가 급하게 x-ray 검사를 하더니 심근경색이 심하게 왔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삼십대도 힘들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술이 확 깼다. 급하게 형님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의사는 최후진단을 내렸다. 새벽 2시 40분이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나. 그때 형님과 형수님이 도착하셨다. 나는 죄인처럼 말했다. 나는 죄인이다.
“돌아가셨어요.”
형님도 형수님도 믿지 않았다. 나는 두렵고 나의 죄가 무거워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형님 누님들에게 전화를 했다. 큰형수님이 달려오셨다. 큰형수는 크게 곡소리를 내셨다.
2003년 11월 30일, 그날 나는 만취 상태였다. 아내가 깨우는 바람에 아버지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새벽 12시 20분이다. 만취 상태에서 아버지가 하라하시는 대로 물수건에 찬물을 묻혀 이마의 땀을 닦아드렸다. 이마고 얼굴이고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가위에 눌려도 이렇게 식은땀이 많이 흐르나. 얼마나 심한 악몽을 꾸셨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놀라셨을까. 아버지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하신다. 숨을 몰아쉬신다. 병원에 가실래요? 아니 무슨 병원여?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럼 그냥 죽게 놔 둘 겨? 아 예사롭지 않다. 이번에는 아버지 엄살이 보통이 아니시다. 나는 서둘러 윗옷을 걸쳤다. 아버지는 잠옷을 벗고 잠바까지 챙겨 입는다. 괜찮으신 건가. 시계도 찾으신다. 정말 괜찮으신가 보다. 손수 다 하셨다.
아내는 차를 가지러 가고 나는 아버지 팔짱을 끼고 현관에 나갔다. 그런데 신발을 찾던 아버지가 현관에 주저앉는다. 숨을 몰아쉬신다. 아버지에게 등을 내밀었다. 난생처음 업어본 아버지는 검불처럼 가벼웠다. 눈물이 확 솟았다. 어린날 몸이 약했던 나는 아버지가 안고 있으면 그냥 기절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면 등에 업고 시오리 신작로를 뛰어가서 살려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려낸 내가 이제 아버지를 업었다. 눈물 나게 가볍다. 공동현관 앞에 아내가 차를 댔다. 젊은 아버지에게 어린 나도 이렇게 가벼웠을까. 아버지도 우리 팔남매의 무게를 느끼셨을까? 한가한 반심도 들었다.
5분 거리도 안 되는 대학병원에 도착하자 걸어서 응급실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한 15분 만에 돌아가셨다. 나는 황당했다. 취기가 남아 있는 내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형님이나 형수님이 오시면 이 냄새를 어찌 감출까. 이 불효를 어찌할거나.
퇴근하고 저녁 모임에 나가면서 저녁 식탁에 잠깐 앉았다. 아버지가 저녁 진지를 드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떡국을 좋아하셨다. 찬바람이 나면 아내는 가래떡을 뽑았다. 우족을 고아 떡국 국물을 낸 다음 수시로 아버지께 끓여드렸다. 나도 덩달아 맛나게 먹은 것을 보면 떡국을 좋아한 것도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떡국을 하도 맛나게 드셔서 모임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달포 전에 열었던 첫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출판기념회에 왔던 회원들에게 한턱내기로 했기에 나가야 한다.
“아버지 맛있어요?”
“그래 맛있다. 너도 앉아 먹어라.”
아버지가 떡국 한 대접을 다 비우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못 마시는 술에 취해 들어왔다. 술에 취한 내 잠자리가 험하니까 아내가 거실로 쫓겨나서 잠들었다. 그 바람에 한밤중 아버지 고통 호소를 듣고 나를 깨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형님과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시고 다른 병원 영안실로 가는 차 안에서 큰누님께 전화를 드렸다. 벌써 새벽이다. 누님은 전화를 받고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다.
“우리 막내가 놀랐겠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어. 어른들 돌아가실 때 그렇게 돌아가시면 복인 겨.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복도 타고 나셨네. 잘 돌아가셨다. 동생 아무 생각도 하지 말어. 잘 돌아가신 겨”
‘워티기 된 겨. 아버지가 갑자기 왜 돌아가신 겨’하고 형제들이 채근하면 어쩔까 조마조마했다. 아버지 주검 앞에서 막내인 나는 그런 못난 걱정을 했다.
바로 얼마 전 92세이신 당숙이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딴소리를 하셨다.
“잘 돌아가셨다. 아흔 둘이 뭐여. 아흔 둘이”
하시면서 당신도 아흔 살인 걸 잊어버리고 장수하시는 사촌형님 흉을 보셨다. 그러시던 아버지인데 90세가 뭐가 부끄럽다고 그렇게 급하게 떠나셨다. 다만 2시간도 안되게 고통을 호소하다가 가까이 사는 자식들도 안 보고 급히 떠나셨다. 10년을 모신 막내아들며느리에게 이렇게 죄책감만 상으로 남기고 떠나실 게 뭐란 말인가. 다만 사흘만이라도 병원에 누웠다가 돌아가셨으면 허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들이 모셨으면 괜찮았을까. 장손이 모셨으면 괜찮을 걸 그랬나. 막내는 이래도 죄인이 된다. 누님 말씀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말면 되는 것인가. 내가 술을 마셔서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날 낮에 복지회관에 갔다가 고등어 한손 사들고 십리는 되는 모충동 배고개를 걸어서 올라오신 아버지이다.
아침이 되자 병원 영안실에 기자들이 모였다. 이튿날 신문마다 아버지 기사가 나왔다.
‘주요무형문화재 56호 종묘제례예능보유자 원백園白 이은표李殷杓 선생 별세’
(2025.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