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산은 산, 물은 물, 태양은 태양

느림보 이방주 2006. 12. 2. 08:35
 


산은 산, 물은 물, 태양은 태양


이방주


새해에는 산은 그냥 산이었으면 좋겠다. 우매한 내 눈에도 산이 재화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순한 산을 바라보면서 별장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기다 골프장을 만들거나 스키장을 만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새해에는 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산을 파헤쳐 돌을 캐어 팔면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내 때 낀 머리에서 씻어갔으면 좋겠다.

산은 그냥 소나무나 참나무 같이 흔해빠진 나무들이 아무렇게나 가지를 벋고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 두어도 아름답고 깨끗한 제 모습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소나무나 참나무나 단풍나무나 그런 나무들이 그냥 제 나름대로 살아가도 제 빛을 잃지 않는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본래 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산이라는 이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산이 재화로 보이면 나 자신이 산 앞에 겸허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겸허해져야 나도 본질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물은 물이었으면 좋겠다. 산이 산이듯이 물은 물이었으면 좋겠다. 물은 맑고 깨끗하고 아래로만 흐르는 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는 순리를 있는 그대로 배워서 나도 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래로 흐르면서 산야의 쓰레기를 씻어가듯이 콩 심은 데서 팥을 거두려하는 나의 허영에 파묻힌 욕망을 거두어가는 물이었으면 좋겠다. 초목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듯이 내게도 깨끗한 영혼의 명줄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배를 띄워 꿈을 실어 가듯이 나의 깨끗한 소망도 실어 나르는 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성철 스님의 법어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작은 실개천이라고 하더라도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따라 내려가면, 좀더 너른 개천을 만나고 강을 만나 큰 바다에 이르러 온 세상 물이 하나가 되듯이, 물 같은 순리를 따르면 온 세상 갖가지 서로 다른 생각들이 대타협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슴에 심고 뼈에 새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태양이 그냥 태양이었으면 좋겠다. 새해에 동산에 떠오르는 태양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내게도 밝은 빛과 따뜻한 볕과 넓은 그늘을 원하는 만큼 내려 주었으면 좋겠다. 내게도 한 줌 사랑을 내려서 지금까지의 바라기가 헛된 바라기였다고 좌절하고 원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그런 태양이었으면 좋겠다.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은 밝음과 어둠을 바로 가려주었으면 좋겠다. 밝음을 어둠이라고 윽박지르고, 어둠을 밝음이라고 우기는 오도(誤導)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밝음과 어둠의 진리를 바로 세웠으면 좋겠다. 밝음은 밝음이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밝음인 줄을 다 알고, 어둠은 어둠이라고 질타하지 않아도 그대로 어둠일 수밖에 없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의 태양은 뜨거워야 하는 곳에는 뜨겁게, 서늘해야 하는 곳에는 두텁고 넓은 그늘을 내려주는 그런 태양이었으면 좋겠다. 오래된 간장 같이 누구의 입맛에나 다 맞는 그런 볕과 그늘을 주고, 달콤한 어머니의 젖줄같이 고달픈 생명을 보듬어주는, 고명한 스님의 염불같이 때 묻은 귀를 닦아주는 화합의 품과 통합 에너지를 지닌 그런 태양이었으면 좋겠다.

결국 산은 그냥 산이고, 물은 그냥 물이고, 태양은 그냥 태양이 된다면, 세상은 본질을 찾아 제자리에 차분하게 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산이 물이 된들 어떻고, 물이 산이 된들 어떻겠는가. 물이 결국 태양이 되고, 태양이 결국 산이 되더라도 아무런 탈이 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대통합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밝고 너른 터전으로 믿어질 것이다.

새해에는 산은 그냥 산이고, 물은 그냥 물이고, 태양은 그냥 태양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온갖 것이 다 본질을 찾아 제 자리를 지키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하루에 단 한 번씩이라도 거울을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점 오점도 티도 없이 닦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참 모습을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깨끗한 거울에 비친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바로 살고 있는가? 내가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오히려 세상이 비틀거리는 것으로 착각하여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얼굴에 곪아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내 가슴은 병들지 않았는가? 나는 어떤 나인가? 이런 모든 의문을 품고 거울을 보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바로 알고 내가 서 있을 자리를 바로 보면 온 세상이 다 제자리를 찾아 바르게 서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거울을 통하여 나를 바로 보는 지혜를 날마다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하루에 한 순간도 시간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항상 시간을 밟고 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의 시간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바탕 위에 서있는 현재를 발견하고, 현재가 곧 미래의 디딤돌이 된다는 진실을 순간순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오늘은 과거를 디디고 일어선 것이라고 하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한다면, 세상이 나를 홀대하더라도 섭섭한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현재를 주춧돌로 나의 미래의 기둥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나의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비틀거리지도 않을 것다.

새해에는 하루 한 번만이라도 나의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미래가 나의 현재 시간의 주춧돌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나는 그냥 나였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아주 먼 미래까지 염려하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온 세상의 가지가지 다른 것들이 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통합과 화합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에 동산에 떠오르는 태양은 대통합과 화합의 밑불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새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가치이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그 흐름의 순리에 따라서 통합과 화합의 길로 발길을 옮겨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길벗> (사단법인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간행) 2007년 1월호 신년 에세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