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시산제

느림보 이방주 2007. 3. 5. 05:46

  3월 1일, 산악 모임인 레저토피아에서 시산제가 있었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한다기에 서둘러 신청했다. 가까운데서 하는데도 회비가 만만치않다. 그런데 친구 말로는 장소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금 섭섭했지만 도명산에 올라가본지도 오래되어서 그냥 참석하기로 했다.

 

  아침에 출발지에 가보니 도명산으로 변경한 이유를 알만했다. 버스가 여덟 대나 간다고 한다. 줄잡아 350명은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험한 산으로 안내하기에는 누가 보아도 무리일 것 같았다.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산제에 참가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명산은 아주 가까이에 있고 나즈막한 산이면서도 아름답다. 화양계곡의 맑은 물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정말 한 번 가보면 자꾸 가고 싶은 산이다. 정상에서 보이는 가령산, 낙영산, 조봉산이 아름답고, 낙영산과 조봉산 사이 움푹하게 들어간 안부를 통하여 멀리 속리산 토끼봉이 보인다. 특히 도명산에서 가령산에 이르는 줄기는 돌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하얀 바위 사이로 거뭇거뭇한 소나무들이 어울리는 모습은 솜씨 좋은 이가 금강산의 모형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빼어나다.

 채운암에서 바라본 도명산 (역광이라 어둡다)

 

  도명산은 사계절이 다 아름답다. 나무에 물이 오를 무렵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화양계곡의 녹음은 정말 일품이다. 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단풍도 녹음의 빛깔만큼 아름답다. 녹음이나 단풍의 색깔은 산의 높이에 따라 골짜기의 깊이에 따라 다르다. 그 옅은 변화가 시간을 공간으로 엮어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 시산제를 지내는 요즈음이 가장 볼품없을 때이다.

 

  채운암 아래 반석에서 주최측이 시산제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채운암에 올라갔다. 화양동에 그렇게 드나들어도 채운암에는 처음이다. 단아한 절집이 이제야 올라온 것을 후회하게 한다. 절에는 스님도 없이 조용하다. 절집 뒤안의 낙락장송도 미동도 없이 참선에 들었다.  대웅전과 산신각만 있어도 바라보이는 산등성이가 모두 믿음의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첨성대에서 참나무 숲으로 이어지다가 순토종 소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산줄기를 장식하는 전망은 그냥 그대로 부처님 가슴으로 생각되었다.

 단아한 채운암 대웅전

 

  시산제에 참석하여 삼배를 올린 다음 도명산 산행을 시작했다. 함께 간 이 중에 계속 우스개소리를 하는 이가 있어서 산은 흐드러진 웃음 속에 파묻혔다. 오솔길은 온통 낙엽이다. 참나무와 솔잎이 부서져 양탄자를 깐 것처럼 포근하다. 적당한 경사에 땀이 조금 밴다. 숨이 조금 가쁜가 싶으면 금방 평평한 능선이다. 무릎에 힘이 겹다 싶으면 작은 소나무들이 손을 잡아 이끌어 준다. 바위 절벽이 있어 현기증이 날까 걱정이 되면 밧줄이 날 잡아 준다. 가끔 철사다리는 보기 흉하지만 쉽게 나를 바위 위에 올려 주었다.

 정상에서

 

  정상은 계곡보다 따뜻하다. 바람도 없이 바위에 햇살이 포근하다. 어느새 소나무는 옅은 녹색으로 변했고 붉은 가지는 윤기가 흐른다. 봄이 온 것이다. 봄은 정상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인생사의 봄도 정상에 먼저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섭한 마음이 들었다.

 

  내리막길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마애불 아래서 시산제를 지내는 다른 산악회가 음복을 하고 있다. 제주를 거푸 두 컵을 얻어 마셨다. 속이 후련하다. 그러나 가슴에 불이 붙는 기분이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술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니 가령산 쪽 산줄기와 화양동에서 선유동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무릉도원의 모습이다. 나도 거기 떠내려가는 한 송이 복사꽃이었으면 싶다. 계곡 아래에서 양말을 벗고 얼음 물에 발을 담갔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물은 수많은 바늘로 겨울 동안 묵은 내 발을 마구 찌르는 듯하다. 관절의 피로를 깨끗이 씻어간다. 그 차가움에 여자들의 한바탕 즐거운 비명이 골짜기를 울린다. 잠자고 있는 게으름까지 깨워 일으켰다.

 

  출발지에 돌아와서 주최측이 준비한 술과 안주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회비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았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내려오는 길에 사람들은 무너진 시장 경기를 걱정했지만 올 한 해의 등산만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침체된 경기도 서민들의 걱정하는 가슴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없어진 뒤로 사람들이 더 오지 않는지 주차장은 먼지가 날린다.

(200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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