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엄한 백두산, 신비로운 천지
"산은 정복할 수 없다. 다만 산이 나를 용납할 뿐이다." 어느 산악인이 한 말이다. 정말 동네 야산이라도 산이 용납하지 않으면 우리는 산에 오를 수 없다. 어느 산이든 정상에 오를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산의 정상이 나를 받아줄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스물여덟 살이라는 동포 청년은 백두산은 백번 가서 천지를 두 번 보면 행운이기에 이름이 "백두산"이라고 우스겟소리를 해서 아들같이 젊은 청년이 이미 산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어 놀랐다.
백두산 천지(백운봉과 녹명봉 사이 능선에서)
이 글을 쓰면서 제목을 붙이는데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백두산 등정"이라 하자니 정작 정상인 병사봉(지금은 현지에서 장군봉 부르고 있음)은 내 나라이면서도 저쪽에 있어서 가지 못했으니 안되는 말이고, 정복이라는 말은 더 쓰기 그렇고, "신화의 언저리"하기는 신화도 모르면서 신화 운운하기 그렇고, 그냥 등산이라 하거나 유람이라고 하자니 백두산에게 미안하고, 트레킹도 어울리지 않아 아무리 머리속을 헤집고 다녀도 떠오르지 않는다. 능선을 따라 걸었으니 백두산 종주라는 말이 어울리기는 하지만, 반만 돌고 왔기에 미흡한 감이 있어서 할 수 없이 평범하게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장엄과 신비'로 하기로 했다.
7월 4일, 비행기는 인천을 출발한지 1시간 50분만에 길림성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장춘 공항에 내려 앉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이는 중국은 거대한 들판이었다. 장춘에서 우리가 묵을 송강하 호텔로 이동하기까지는 정말로 터덜거리는 버스길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옥수수밭만으로는 중국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집 한 채를 그냥 공장에서 찍어다 내어 놓은 것같은 붉은 벽돌집도 그렇고,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는 비포장도로도 모두가 곡부나 제남을 다녀온 지난번 중국여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산동성보다는 사는 모습이 우리 민족에게 가까워서 백두산에 가까워질수록 백두산은 우리 것이라는 생각을 다 굳게 가질 수 있었다.
송강하 호텔에 도착한 것은 우리 시간으로 5일 새벽 한시가 넘어서였다. 중국시간으로 5시 20분 출발이라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호텔은 소박하고 깨끗하다. 제남이나 유방의 오성급 호텔에 투숙했던 2년전 지난번 여행만은 못해도 잠자리가 편안했다.
새벽이 되자 전화도 없는 객실을 종업원들이 돌며 문을 두드려 잠을 깨웠다. 짐을 챙기고 어둠이 가시는 것을 기다려 버스로 백두산으로 이동했다. 수없이 펼쳐지는 밀림에는 온통 하얀 자작나무 천지였다. 푸른 숲 사이로 껍질은 벗은 자작나무들이 미끈한 몸뚱이를 드러내 보인다. 백두산 자작나무라고 하는 이 나무는 살결이 유난히 희다. 자작나무와 크고 작은 활엽수들이 사람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백두산 등정의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숲 사이를 돌고 돌아 아슬한 다리를 건너 평원을 달리는 듯하던 차가 조금씩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하자 침엽수가 드뭇하게 섞이더니 이내 비자나무나 전나무, 편백 같은 상록 침엽수가 하늘을 찌른다. 경사가 급해지자 이제는 침엽수도 자작나무도 사라지고 끝없는 초원이다. 너른 초원에는 키 큰 산당귀들이 그 보랏빛 대궁에 하얀 꽃을 우산처럼 받쳐들고 있다. 오를수록 당귀 뿐만이 아니라 산은 온통 꽃의 축제를 이루었다.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는 아름다운 야생화가 있는 초원에는 만년설이 있는 바로 아래까지 소들이 풀을 듣고 있었다. 제주에 가도 한라산 기슭의 초원에 말들이 뛰어 놀고 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초원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땅덩어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국이 부러웠다.
버스가 산행기점인 서파 5호경계비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자 후두둑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평원에 산안개가 솜털을 불어 내품듯이 흐느적거리며 기어오른다. 도시락으로 아침을 가름하고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5호 경계비 부근으로 오르는 계단길에 올랐다. 다리가 팍팍하고 숨이 찬다. 시작을 빨리하면 종주를 망칠 것 같아 앞서 가는 아내를 채근하여 천천히 걸었다. 지난 밤에 폭우가 내렸는지 화산모래가 돌계단까지 넘쳤다. 돌계단에서는 중국인들이 가마를 가지고 '가마 타세요." 하면서 한국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타지 않는다. 산이 좋아 산에 오는 사람들이 누가 가마를 타겠는가? 돈으로 다른 사람의 어깨를 빌려 편하게 가고자 하는 것은 이미 지난 시대의 사고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마치 싸우는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그들의 감격을 토로한다. 중국인들의 소리가 분위기를 제압할 때마다 나는 나의 무쏘가 생각났다. 내 차로 이곳 주차장까지 아내를 태우고 올 수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이 역사를 다듬어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여기는 온통 우리말이 분위기를 제압했을 것 아닌가? 경상도 사투리만으로도 감격하는 소리도 웬만한 산은 제압하고도 남는다.
북한과 경계를 이루는 5호 경계비(2,373m) 능선에 오르니 처음 만나는 천지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천지라는 커다란 함지에는 물이 담겼는지 안개가 담겼는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이불 솜같은 구름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바람도 없이 구름이 하늘로 솟구쳐 파란 수면이 드러났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세수하고 나오는 아가씨처럼 청초하면서도 거대한 얼굴을 내밀었다. 수면은 잔잔하다. 너른 수면에 햇살이 비친다. 그러나 비치는 햇살이 곳곳마다 다른지 수면은 옥과 비취를 섞어 놓은 것처럼 얼룽얼룽 물빛이 다르다. 사람들이 흔히 민족의 성산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만세라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안내원의 주의가 생각나 그만 두었다. 예전에는 사나이들이 여기서 천지의 맑은 물과 구름 아래 꿈틀거리는 산줄기와 초록의 평원을 내려다 보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 포부를 품었을 것이다.
저 멀리 한가운데서 갑자기 흰물결을 일으키며 황룡이라도 한 쌍 솟구쳐 오를 것만 같다. 아니면 금방이라도 '우르릉' 소리를 지르며 물이 솟아 올라 갈라지고 화산탄이 하늘을 향하여 분출할 것만 같다. 발밑은 온통 검거나 붉은 화산재, 화산탄, 화산 모래가 부서진다. 회색의 바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아래 붉은 회색의 모래가 무너져 내릴 듯하다. 태풍 전야처럼 정적이 감돈다. 아직도 반경 50km 이내는 가끔 진도 2~3 정도의 약한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천지의 물가는 푸른 초원이다. 둥그런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보이는 초원에는 멀리 보아도 하얗게 꽃이 피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절벽 아래 바로 수심이 깊어 보이는 물이다. 봉우리에서 내려 뛰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푸른 물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다.
정적 속에서 멀리 최고봉인 병사봉이 보인다. 그 아래 북한의 경계 초소도 보인다. 이곳 경계로부터 멀리 6호 경계비가 있다는 천문봉까지 천지를 가로질러 중국과 북한이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 역사에서는 백두산은 당연히 몽땅 우리 땅이다. 이런 생각은 여기를 다녀가는 우리 동포 누구나 다 할 것이다. 더 아쉬운 것은 우리 땅이라고 하는 정상을 가지 못하고 중국에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아쉽고 아픈 역사는 나뿐만이 아니고 민족 모두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냥 아니척 모르는 척 하고만 있는 것일 것이다.
돌 기둥처럼 솟구친 망천우(2,457m)를 우회하여 청석봉으로 향했다. 길은 험하지 않다. 생각과는 달리 그냥 육산이다. 길가는 온통 고산지대의 야생화가 갖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청초하다. 작년 여름에 올라갔던 알프스의 한 봉우리인 융프라우요흐(3,500m 정도)의 마지막 목장 부근에 있는 언덕이 생각났다. 사실 온통 눈에 덮히고 석회암벽 뿐이던 알프스보다 백두산은 더 장엄하고 아름답다. 청석봉 오르기 전에 한 등성이에 오르니 천지를 온통 검은 구름이 휩싸고돌아 수면은 보일 듯 말듯하다. 사람들은 종주를 계속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냥 쉽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산은 장엄하고 신비로워도 길은 우리 동네 구룡산 산책길과 다름없이 조금 오르다가 다시 평평한 능선이고 그러다가 잠시 돌길의 내리막길이다. 숨가쁘게 오르막길을 오르면 비단길 같은 능선이 나오고, 그러다가는 자갈돌 굴러내려 가슴조이는 내리막길이 있는 것은 어느 산이나 다 마찬가지다. 오르막길에서 육신이 고달프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심신이 다 고달프다. 꼭 우리 살아가는 모습 같지 않은가? 우리가 내일을 믿고 오늘을 살듯이 백두산을 우리 산이라고 믿는다면 산은 나를 용납해 줄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바라보니 두려움이 모두 가신다.
청석봉(2,662m)을 지나 백운봉(2,691)에 오르기까지는 아슬아슬한 내리막길과 숨가쁜 오르막길이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아름다운 꽃을 바라본다.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오르다가 잠시 숨을 고르면서 바라보는 꽃들이 여린 새댁처럼 귀엽다. 능선에서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내려다 보며 사진을 찍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아름다운 천지를 바라보면 어느덧 팍팍하던 장딴지도 부드럽게 본래로 돌아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필요도 없다. 아스라한 세상을 내려다 보면 시간은 다 헛된 것으로만 생각된다. 그냥 신비 속에 싸여 피로도 목마름도 배고픔도 다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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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와 산의 이모저모
백운봉에서 비가 내렸다. 우리가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펴자 손이 시릴 정도로 바람이 차다. 찬 바람이 안개를 휘몰아 오자 안개는 어느덧 빗방울이 된다. 빗방울이 모자 위로 머리를 때린다. 얼음 막대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 차가운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가져간 판쵸를 입었다. 바람에 날리는 판쵸를 아내에게 입혀주고 나도 입었다. 면장갑을 끼어도 손이 시리다. 따뜻한 물에 노란 조밥을 말아 목구멍으로 떠내려 보냈다. 천문봉(2,670m)에 이어 중국 쪽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백운봉에서 먹는 최고의 오찬이었다. 몇 방울 후두둑 판쵸를 두드리던 빗방울이 바람에 몰려 안개를 타고 저쪽 등성이로 쫓겨간다. 조화인지 변덕인지 어느새 수면에는 햇살이 비친다. 점심을 먹고 내려다 보니 까마득한 절벽 아래 바로 천지의 푸른 물이다. 북으로 바라보면 장엄한 평원이고, 남으로 바라보면 푸른 수면이 햇살에 반짝인다. 장엄한 백두산, 신비의 천지 그대로이다. 나는 말을 잃었다. 아내도 넋을 놓고 산 아래를 내려다 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부수수 부서지는 화산탄길을 무너지거나 돌이 구르지 않게 조심조심 달래면서 내려온다. 한 번 잘못 디디면 바로 천지 물가 초원에 뚝 떨어지거나 푸른물에 풍덩 몸을 던지게 될 것만 같았다. 백운봉에서 내려와 녹명봉(2,603m) 아래 안부에서 잠시 쉬면서 천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여기에 볕이 나면 저기에는 검은 구름이 돈다. 이곳이 운무에 덮이면 어딘가 볕이 날 것이다. 고개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는 평원을 바라보니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태초에 김이 무럭무럭나는 용암이 지글거리며 흘러 산 아래로 내려 갔을 것을 생각하니 신비롭다. 녹명봉은 용암이 분출하여 그 자리에서 멈추어 식어 오랜 세월을 지내며 단층을 이루며 떨어질 듯한 작은 바위 덩어리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천지는 한꺼번에 눈안에 들어올 것 같았다. 멀리 이북 땅인 병사봉에 구름이 감돈다. 현지 안내자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지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했다. 이제 언제 다시 여기를 밟을 수 있을가를 생각하면서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천지를 바라보았다. 그냥 머리가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없다. 그냥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납해 준 백두산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운봉을 내려 오며
태초의 평원인 듯 푸른 콩으로 쑤어낸 푸른 두붓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초원을 천천히 걸어 하산길에 들어 섰다. 초원의 언덕을 한시간 반쯤 걸어 멀리 버스가 보이는 날망에 서서 옥벽폭포와 장엄한 장백 폭포를 바라보았다. 옥벽 폭포는 장백폭포에 비해 작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장백폭포는 천지의 물이 달문을 통하여 흘러들어 68m를 하얀 물안개를 일으키며 곤두박질치고 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는 이백의 시구가 생각난다.
내리막길은 경사가 급하고 위험하다. 너덜은 아니지만 주먹 크기에서부터 아기 머리만한 수많은 자갈이 구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돌이라도 구르면 아래 내려가는 사람의 머리에 박힐 것만 같다. 미끄럽다. 이런 위험한 비탈길에서 비를 만났다. 엄청난 소나기였다. 판쵸 위로도 머리를 때리는 듯한 폭우다. 방수가 안된 등산화에 물이 마구 스며 들었다. 땀이 비오듯 한다. 장백폭포로 향하는 숲 사이로 만들어 놓은 나무 다리에서 비가 어느정도 그쳤다. 장백폭포 아래서는 쏟아지는 물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 사람들의 탄성으로 온통 협곡이 시끄럽다.
폭포를 돌아 나올 때 다시 한 번 소나기가 퍼붓는다. 비를 맞으며 삶은 계란장수들이 늘어선 노천 온천 지대를 지나니 중국 시간으로 약 8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만보계를 열어 보니 총 이만 팔천 보를 걸었다. 무릎이 아프다. 그제야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온몸을 느낄 수 있다. 백두산 종주를 한 것보다 백두산으로부터 용납받았다 생각하니 한없는 기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미끄럽지만 안전 지대에서 비를 만나 이 땅이 아직도 우리 땅이었으면 하는 쓸데없는 욕망도 씻을 수 있었다. 셔틀 버스에 오르니 몸이 오히려 가볍다.
백두산은 처음으로 오른 우리 내외를 단 한 번에 받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8월 4일 인천을 출발해서 7일 다시 인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백두산은 비를 피하는 거대한 우산이 되어 주었다. 마치 우리의 한 발 내디딤이 비를 멈추게 하라는 신호처럼 하늘은 우리의 일정에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8월 4일 버스로 청주를 떠나 인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그러나 비행기 출발 시간인 13시가 되고 중국남방항공의 CZ688기에 탑승하기 시작하자 비가 그쳤다. 이내 하늘이 문을 열듯이 구름까지 훤하게 걷히었다. 태풍 소식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내내 맑은 날씨였다. 백두산에서도 우리 일행이 능선을 걷는 7시간 내내 구름이 등성이를 타고 기어오르다기도 '휙' 바람이 불어 흩어져 안개가 되고 햇빛이 얼굴을 드러내곤 하였다. 그래서 내내 천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천지 뿐만 아니라 저 건너 북한 경비소의 하얀 지붕과 실타래를 늘여 놓은 것 같은 내리막길도 보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내리막길을 삼분의 일쯤 내려 왔을 때부터 한 시간 정도 판쵸를 입고 있어도 습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동안 참았던 소나기를 퍼부었다. 마치 하늘은 내내 우리 편이라는 건방진 생각의 싹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백폭포 아래 온천지대를 지나면서 장엄한 백두산을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갠 하늘,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깨끗하게 씻긴 포장도로를 돌고돌아 우리가 타고온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이도백하시의 호텔에 들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백두산 관광 산업은 연변의 우리 동포들이 주관하여 일으켰다고 안내원 청년이 일러주었다. 연변이 우리민족의 자치에 의하여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소수 민족의 설움은 어찌할 수 없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영욱호텔은 깨끗했다. 짐을 풀고 몸을 씻은 다음 동포가 경영하는 고려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쇠고기 바베큐인데 맛이 좋았다. 여기서는 소주 참이슬을 5,000원씩 받고 팔았다. 가짜가 아닌가 했으나 동포가 경영하는 식당이므로 가짜는 아니었다. 백두산 5호 경계비 아래 상점에서 파는 辛라면은 중국인이 만들어낸 가짜였다. 무늬도 상표도 똑 같지만 아주 작게 쓴 회사 이름만 달랐다. 고려 식당의 음식은 청주의 어느 식당에서 먹는 것 만큼 맛이 있다. 소주를 많이 마셨다. 백두산 종주를 계획대로 완주한 기쁨과 홀가분함,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백두산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동포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이 취하도록 술을 마시게 했다.
이곳에서는 반갑잖은 만남으로 기분 상한 일이 있었다. 나는 속좁은 나의 잘못이라고 무수히 되뇌었다. 그러나 부딪치고 싶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감사한 만남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종일 자기 내외가 가지고 간 지팡이를 준비 없는 우리 내외에게 나누어준 선영 엄마라는 소녀같이 인상 좋은 분이다. 우리 내외가 걸어온 산길을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다리를 하나 덜어 내게 준 것 같은 그런 분이었다. 아내가 종주를 자신 없어 했기에 준비없이 그냥 온 우리에게는 생명의 지팡이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명을 덜어 우리 내외에게 준것이다. 지팡이 없이 어려운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마다 그 분들에게 내가 덜어줄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는 아닐지라도 그 분의 만남으로 충분히 잊을 수 있었다. 또 총무로서 우리 다섯부부의 여행이 잘못될가봐 전전긍긍하는 안선생 내외분의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함께 간 정선생이 마침 생일이라고 해서 술이 어느 정도 오른 나는 농담처럼 생일 기도를 하자고 했다. 모두가 호응해 주었다. 형식은 장난이었으나 내용은 진실이었다. 내 장난스런 기도가 정선생의 인간미를 다 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한두 마디의 언어에 잘 익은 가양주 같은 그의 인간미를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삶의 여로에서 그와의 만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는 동안 기분이 푸른 하늘의 윈드써핑을 바라보는 것처럼 떠올랐다. 그래서 술을 더 마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호텔에 들어와 또 늦도록 술을 마시고 잠에 빠졌다.
2. 용정에서
6일 아침,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은 이도백하시에서 연길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용정으로 향하는 길목은 그냥 70년 전후의 우리 고향 마을을 지나는 것 같았다. 길림성을 뒤덮었던 옥수수밭도 여기서는 뜸하다. 고향 야산 같은 산에는 사과나 복숭아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 언덕을 내려 오면 나즈막한 초가집, 기와집이 있고, 마당가에 헛간을 들이고, 울타리에는 덩굴강낭콩이 보랏빛 꽃을 피우는 그런 마을이었다. 사립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에는 빨갛고 노란 백일홍이나 빨간 맨드라미가 피었고, 뜰에는 분꽃이 피어 누나에게 저녁 보리쌀을 안칠 시간을 알려 주는 그런 마을이었다.
텃밭에는 고추가 열리고 웃자란 상추가 자잘한 꽃을 피웠다. 들로 나가면 이제 나락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볏논 언저리에 있는 콩밭도 바로 들어가 김을 매도 하나도 설지 않을 것 같았다. 가지 많은 키작은 버드나무가 늘어선 개울에서 미꾸리나 붕어를 잡던 옛날이 그립다. 방천둑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며 새김질하는 누렁소조차도 크고 검은 눈을 꿈적이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용정이 가까워지자 거리의 간판들이 모두 한글 간판이다. 한글을 위에 쓰고 중국어를 아래에 쓴 간판들이 즐비하다. 간판 뿐 아니라 정부에서 세워 놓은 이정표도 한글과 중국어를 병기했다. 우리 나라 북쪽 지방 어디를 돌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고향 사람들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얘깃소리가 다 우리말이다. 거기는 그냥 지난 세월의 우리 민족의 고향이다. 그래서 더욱 이 땅을 중국에 넘겨 준 역사가 원망스럽다. 간도는 분명히 우리 땅이다.
1712년 조선과 청은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에서 회담을 가졌다. 그해 5월 15일 ‘서쪽 국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 국경은 토문으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내용의 정계비를 세웠다. 하지만 토문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조선은 두만강과 토문강 사이의 땅, 즉 간도를 개척하였으나,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여긴 청국은 간도를 개간한 조선인의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883년 조선에서는 어윤중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9월에는 이중하를 보내어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로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였고, 이듬해에는 그를 북간도관리사로 임면하여 이를 주한청국공사에 통고하였다. 아울러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거두는 등 계속해서 간도 영유권을 관철시켜 나갔다.
(지도로 보는 한국사, 김용만 김준수 지음,2005 수막새)
이렇게 잘 나가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중국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민족이 대다수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 조선족 자치현은 우리 민족이 일구워낸 우리 땅이다.
거리의 한글 간판
대성중학교에 가서 윤동주 시비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인이면 다 들러 가는 이 시비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실 그를 독립 지사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를 독립지사라고 생각할까가 참 궁금했다. 윤동주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하늘을 향하여 바람에 부대끼면서 살아야만 하는 자신을 무수히 반성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이 소망하는 별을 갈구했다. 나는 사실 부끄러운 나이인 이 나이를 맞아서 겨우 에너지를 받아야 할 하늘의 의미를, 발딛고 비벼야할 언덕배기인 땅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스물 아홉 그 어린 나이에 죽어가면서도 이미 깨달은 하늘과 땅과 자연과 부대껴야 할 바람에 대한 삶의 줄기를 놓치지 않았다. 바윗돌에 새겨진 한 줄의 시가 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윤동주의 서시를 읽었다.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사람들은 우르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속 모르는 안내원은 나를 재촉했다.
대성중학교의 윤동주 시비
끊임없이 순수를 지향했던 시인 윤동주와 초현실주의 시를 이 땅에 실험한 시인 이상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둘 다 일제 치하라는 역사 속에서 불운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서른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지만 두 시인은 많이 다르다. 내 생각에 이상은 일제 치하라는 지독한 현실에서 탈출하고, 규범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면서 자신을 수없이 학대하다가 결핵으로 숨을 거둔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지식인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가져야할 사명이라는 철저한 규범의 틀 안에 자신을 쓸어 담지 못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꾸짖다가 결국은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조금씩 조금씩 생명의 에너지를 빼앗겨 죽어간 시인이다. 그래서 이상은 자신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자 했고, 윤동주는 녹쓴 청동경을 닦으면서 거기에 비친 자신의 부끄런 얼굴을 보면서 참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둘 다 방법은 달라도 일제 치하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지식인의 고뇌를 견디지 못해 방황을 거듭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넓고 비옥한 땅을 잃어버린 역사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그저 역사를 놓친 조상들만 원망해야 하는가? 해란강을 건너 멀리 일송정을 바라보면서 용정을 돌아나오는 길이 착잡하기만 하다.
3. 도문에서
한만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두만강 변 도문에는 가고 싶지 않다. 멀리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피할 수 없는 우리 역사인 것을-----. 언젠가는 이 땅에도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누군가 새로운 시대를 이루어낼 것이다. 그게 우리 세대가 되었든 훗날의 새로운 세대가 되었든 간에 말이다. 바로 물 건너 강둑은 북한이라고 한다. 그 너머에서 언제든 북한의 병사가 튀어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즐겁게 뱃놀이를 하고 강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지만, 넓고 비옥한 땅을 잃어버린 가슴은 쓰리고 아플 것이다. 어찌 그들의 속이 편하고 즐겁기만 하겠는가?
강건너 멀리 큰 마을이 보이고 길에는 오토바이가 달리고 사람들이 느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산은 중국과 대조되리 만큼 황폐한 모습이다. 그 높은 비탈에도 밭을 일구었다. 동포의 주린 배가 보이는 듯하다.
한만국경의 도문 두만강 변 강 건너가 북한이다.
우리강 두만강에 뱃놀이 하는 중국인들, 둑에 올라서면 북한, 그 너머 황폐한 모습의 산
도문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강 건너 북한 마을, 황폐한 산에 희끗희끗 허망한 구호가 보인다.
4. 코끼리 같이 살아가는 중국
덩치 큰 중국은 대충대충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너른 땅의 구석구석까지 정리하고 보살필 틈이 없을 것이다. 식당, 화장실,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접객업소들이 나름대로 최선의 서비스를 하고 있으나 어설프기 짝이 없다. 특히 화장실은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마지막날 타고 밤을 새운 선반 같은 침대열차도 그렇다. 중국인들은 그런 속에서 적응하면서 대충대충 살아가고 있다.
선반 같은 침대 열차
거리 질서도 우리 눈으로 바라보면 무질서의 천국이다. 신호도 횡단보도도 없다. 있어도 지키지 않는다. 차도 사람도 누구도 지키지 않고 고급 승용차와 삼륜차, 자전거, 인력거, 웃통 벗은 사람들이 뒤섞여 거리를 마음대로 횡단하고 역주행하고 다닌다. 그래도 화를 내는 운전 기사도 없고, 조금도 서두르는 빛도 아니다. 경찰도 없다. 간혹 공안이라고 쓴 순찰차가 지나가면서도 대충 그냥 함께 섞여 자기 갈 길이 바쁘다.
밭도 그냥 옥수수면 옥수수로 온 들판을 덮는다. 사과나무 한 가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야산을 뒤덮었다. 그런 들을 지나면 붉은 벽돌 붉은 기와로 지은 시골집 수천호가 이루어낸 시골 마을을 만난다. 마을길이 정돈된 것도 아니고 잡초가 그대로다. 작물을 심은 들판도 있고 잡초만 우거진 논도 있다. 도로 공사도 차가 다니는데 불편이 있거나 말거나 그냥 진행하고 차들도 아무 불평없이 기다렸다가 지나간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중국이 코끼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코기리 같이 덩치 큰 짐승이 어떻게 귓속까지 파내며 살 수 있겠는가? 또 발톱에 낀 때가지 깔끔하게 벗기며 살 수 있겠는가? 코로 물을 뿜어 대충 닦아내고 사는 코끼리의 저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대충 살아가더라도 그들의 저력은 엄청나다. 그래서 그 저력이 두렵다.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않고 대충 아무렇게 여민다 하더라도 그들의 할 일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그 일을 대충 다 마무리하면 세계에서 누가 그들을 따를 수 있겠는가? 이미 인류의 문명을 발생시켰던 시대에 그들이 가졌던 도도한 자존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2년 반 전에 갔던 중국과는 한국인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부터 달랐다. 그들은 이미 진나라나 당나라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경제력을 그들에게 뽑낼 단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辛라면, 마티즈 승용차, 핸드폰, 경운기 등 수많은 우리 문명의 짝퉁을 만들면서 역사 속에서 우월했던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 습득한 기술로 언젠가 우리를 앞지를 날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대충대충 살아가면서도 묘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그 무시무시한 저력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또 다시 중국 남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2007.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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