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개소리

느림보 이방주 2004. 8. 1. 09:54

   

더위에 찌든 아파트에서 새벽에 개가 짖어댄다. 응석받이 어린애가 울듯이 찡찡댄다. 정말 요즘 흔히 말하는 개소리다. 아파트 너른 거실에서 종횡으로 다니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그렇게 짖어대는가 보다. 원래 마당에서 살아야 할 놈이 방으로 들어와 아기만큼 귀염을 받으며 살아보니 대를 이을 어린 자식이라도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 ‘케리’라는 잡종 진돗개가 있었다. 케리의 몸집은 다른 개들에 비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위엄이 있었다. 잘 생긴 얼굴에 지조 있는 귀가 쫑긋하게 솟아있고, 눈에는 눈곱 한번 끼는 법이 없었다. 떡 벌어진 가슴, 가슴을 수직으로 받치는 기둥 같은 다리, 어른 주먹을 엎어놓은 것 같이 소복한 발이 다른 개와 달랐다. 또 아무리 가족들의 사랑을 받아도 방은 물론 마루에 올라오는 일도 없었다. 제가 설 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커다란 대문간에 떡 버티고 있다가 사랑채 뜰 아래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우렁차게 짖었다. 그렇다고 눈이라도 흘기면 이웃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까지 따라가 위엄 있게 짖어댔다. 자신의 관할권내에 어둠과 부정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다.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밤에도 케리가 짖어서 내다보면 닭장 앞에 검은 그림자가 기웃거렸다. 우렁찬 개소리의 위엄에 질려 검은 그림자는 제 발로 도망갔다. 가족들이 반가워하는 이웃이 오면 꼬리를 치며 함께 반가워하고, 그렇지  않는 이가 오면 따라다니면서 짖었다.

 

감나무에 매미 소리도 지루한 여름 오후에는 사랑 뜨락에 엎드려 주인의 졸음을 함께 졸며 지키다가도 갑자기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모롱이를 바라보며 짖어댄다. 그러면 몇 순간이 지나 삼촌이나 숙모가 모롱이를 돌아 올라오신다. 삼촌임을 확인한 케리는 꼬리를 치며 마중 나갔다.

 

케리는 항상 같은 소리를 내어 짖은 것은 아니었다. 내면의 변화에 따라 성조(聲調)가 달랐다. 우리 가족은 케리가 짖는 성조를 가려 상황이나 그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높은 소리로 위엄을 갖추어 짖으면, 불의의 손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모롱이를 바라보면서 맑고 통랑한 궁조(宮調)로 짖으면,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 장바구니를 받으러 모롱이로 다투어 뛰어 내려갔다. 또 때로 날카롭고 빠른 소리로 짖으면 급박해진 상황을 알리는 비상 경보였다. 또 가끔씩 외로움을 달랠 길 없으면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보면서 우조(羽調)로 짖기도 하였다.

 

가끔은 달을 바라보며 짖기도 했다. 멀리 동산 위에서 보름달이 솟아 안산 소나무 사이에 걸리면 마당 끝에 서서 우성(羽聲)의 굵은 소리로 구슬프게 짖었다. 아니, 짖음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실연당한 사내가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울부짖듯이 가라앉은 소리로 주인의 가슴을 울렸다. 외딴집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면서도 달을 보면 한없이 고독했었나 보다. 아니면 케리에게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 세계에 대한 좌절의 울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개소리는 세태를 드러내는 소리이다. 세상의 불의의 쫓는 소리이다. 개소리는 어둠속에서 불의를 찾아내어 세상에 드러내고, 나아가 어둠을 가져오는 불의의 세력을 쫓아내는 저항의 절규이다. 혹 그 불의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 해도 개는 짖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부당한 억압에 짖는 목소리를 낮춘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는 우습지도 않은 인간 세상을 보면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쫓아내야 한다고 나약한 우리를 깨우치고 꾸짖듯이 짖어댄다. 개는 세상의 어둠을 쫓아내는 것이 그의 사명인 것처럼 그렇게 짖어댄다. 사람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할 때 ‘개소리’라 하면서 진정 개소리의 명예를 떨어뜨려도 불평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의 어둠을 쫓던 제 조상들의 그 거룩한 임무를 묵묵히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마당에서 살지 않고 방에서 생활하는 개들이 본분을 잃고 이러한 개소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아파트에 도둑이 들 리도 없는 새벽에도 낑낑대는 것이 그 예이다. 어둠이 이미 저절로 다 가버린 새벽에 개가 짖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둠의 역사 속에서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던’ 제 조상의 거룩한 사명을 잊은 지 오래다. 그건 분명 제 앞에 돌아오는 몫이 적은 것에 대한 투정이다. 개도 시대의 어둠에 약삭빠른 사람을 닮아 가치 없는 개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의 미혹함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모자란 새벽잠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놈도 TV를 보는지 되지도 않는 언론의 낑낑거림을 흉내 내고 있다. 잠자리가 포근하고 먹는 것이 기름지니, 이놈도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오려하는 모양이다.

 

어둠이 이미 가버린 새벽에 찡찡대며 본분을 잃은 개소리를 들으니, 시대의 어둠을, 시대의 불의를, 자신의 고독과 좌절을 절규하듯 짖어대던 케리의 지조 높은 개소리가 새삼 견딜 수 없게 그립다.


(200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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