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내안의 소나무

느림보 이방주 2006. 4. 11. 15:36
 

괴산으로 넘어 가는 모래재는 이제 시속 100킬로미터 정도로도 넘을 수 있다. 고개를 거의 다 오른 시점에서 오른쪽 산을 흘낏 바라보면 작은 소나무들이 낙락장송 흉내를 내면서 서 있다. 군데군데 바위벽이 있고, 바위벽의 잡목을 헤치고 뿌리를 내린 한 일 이십년생쯤으로 보이는 소나무들이 오만하다. 마치 털갈이를 막 끝낸 수평아리처럼 장닭 흉내를 내는 것 같아 가소롭다. 휘늘어진 가지마다 한줌씩 쥐고 있는 푸른 솔가지들은 제법 장송의 위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석벽에 지탱하는 줄기만은 아직도 유아의 여린 다리 모양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다.

 

내안에는 낙락장송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내안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밑동에서부터 적당히 구불구불한 줄기를 타고 두툼한 보굿이 고졸해 보이는 낙락장송만이 뿌리 내리고 있는 줄 알았다. 가지마다 푸른 솔잎을 쥐고 하늘을 향하여 휘늘어진 낙락장송만 위용을 지니고 서 있는 줄 알았다. 겨울에는 푸른 솔잎 위에 한 무더기씩 뿌듯하게 얼어붙은 흰 눈을 싣고, 여름에는 백학이 몇 마리 날아드는 포근한 가슴을 지닌 낙락장송만이 우뚝 서 있는 줄 알았다.

 

땅위로 뿌리가 드러나도록 꿈틀거리며 바위틈으로 길을 내다가 자신의 상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송진으로 치유할 줄 아는 것이 낙락장송이다. 가을이면 휘늘어진 가지마다 쥐고 있던 푸른 솔잎을 금빛으로 물들여 한 줌씩 쏟아놓을 줄 아는 낙락장송만이 살고 있는 줄 알았다.

 

모래재를 넘으며 나는 문득 내안의 잡목을 발견하였다. 아니 온통 잡목투성이라는 걸 알았다. 내안에는 아카시아도 있고, 옻나무도 있고, 노간주나무도 어느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내안의 아카시아는 제법 꽃을 피울 줄도 안다. 향기와 꿀로 벌을 유혹한다. 향기로 유혹하다 꽃이 떨어지면 소복하게 열매를 맺는다. 가을에 열매가 떨어지면 또 다른 아카시아를 만든다. 그런 아카시아 그늘에는 초목이 자랄 수 없다. 다른 나무들은 그늘을 지워 사랑을 베풀지만 내 안의 아카시아 그늘에는 저주의 노랑 냄새뿐이라 초목이 견딜 수 없다. 내 안의 아카시아는 한없이 뻗어갈 줄밖에 모르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낙락장송처럼 꿈틀거리면서 바위틈에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길게 뻗어 가면서 주변을 점령한다.

 

내안에는 옻나무도 있다. 5월의 햇살 아래 날카롭게 붉은 잎을 빛내는 듯하지만 검은색으로 변하는 하얀 진액도 있다. 내안의 옻나무는 때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체질을 주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섣불리 달려드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문둥이처럼 만들어 버리는 독이 되기도 한다.

 

내안의 노간주나무는 잎인가 하고 다가가면 모두 바늘이다. 푸르게 품위를 갖춘 늘푸른나무인가 하면 항상 푸른 그리움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안의 노간주나무는 섣불리 달려들면 수많은 가지가 달려들어 그들을 응징한다. 소나무와 닮은꼴이란 것도 옛말이다. 볼품없이 키만 커서 마치 댑싸리 모양이다. 내안의 노간주나무는 척박하여 버려진 땅에서도 잘 자란다. 적당히 향을 낼 줄도 알아 예전에는 술을 만드는 향료로도 쓰였지만, 그 향은 해충을 끌어들여 과일나무를 병들게도 한다. 옛날에는 불에 달구어 잘 구부려 우공(牛公)들의 코뚜레로 쓰여 영원한 악마가 되기도 했다. 내안의 노간주나무는 향 깊은 늘푸른나무 같지만 사실은 남을 찌를 줄도 알고, 굴레를 씌울 줄도 알고, 죽일 줄도 안다.

 

내안에는 사실 낙락장송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내 안의 소나무는 낙락장송이 아니었다. 그것을 흉내 내는 모래재 잔솔 같은 것들이었다. 내안에는 소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꿀인 듯하나 사실은 심술보일 수도 있는 아카시아도 있고, 약인가 하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옻나무도 있고, 늘푸른 지조인가 하면 가시투성이인 노간주나무도 있다. 아니 어느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것들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 나는 바보처럼 내안에는 향 깊은 낙락장송만 있는 줄 알았다. 온통 가소로운 잔솔뿐인 것을……. 온통 저주의 잡목뿐인 것을……. 아니 낙락장송을 흉내 내던 잔솔들도 아카시아 그늘 아래에서는 맥도 못 추고 있는 것을…….

(2006. 4. 11.)

'느림보 창작 수필 > 껍질벗기(깨달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 햇살 같은 고독  (0) 2006.12.25
안개 속의 소나무는  (0) 2006.11.23
취에 대한 이견  (0) 2005.07.01
개소리  (0) 2004.08.01
여름날의 補閑  (0) 2004.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