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취에 대한 이견

느림보 이방주 2005. 7. 1. 22:41
 

누군가 백악산에는 뱀이 많다고 했다. 살모사나 독사 같은 것들이 거뭇거뭇한 몸뚱어리에 희끗희끗한 무늬를 띠고 바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영락없이 바위 모습 그대로라고 했다. 잘못하면 손으로 짚을 수도 있고 깔고 앉을 수도 있다고 했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산에 오르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다. 백악산은 충북의 명산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공림사 입구를 지나 대방리로 들어가는 골짜기의 좁은 비포장도로를 나의 무쏘가 꿈틀꿈틀 뒤뚱뒤뚱 기어 올라가니 윗대방리 인삼밭 옆에 목장이 있다. 사람 손길이 구석구석 스친 기미로 보아 단순한 목장은 아닌 성 싶다. 마사를 깔아 기생 치맛자락처럼 다진 진입로, 자연석으로 둑을 쌓은 개울, 백악산 나무가 아닌 미끈한 정원수가 덮은 양옥집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너른 마당에는 서양 잔디까지 깔려 있다.

 

함께 간 사람들이 자꾸 별장 얘기를 하면서 부러워한다. 살모사 새끼들이 스멀스멀 나의 사고의 울타리 속으로 기어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꾸 입으로만 ‘하나도 안 부러워.’를 되뇌면서 별장 쪽으로 돌아가는 눈길을 잡아매느라 무진 애를 썼다. 백악산이 이고 있는 하얀 바위 덩이나, 푸른 녹음을 바라보면서 살모사 새끼가 우글거리는 세계로 치닫는 생각을 붙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사람의 열등 의식만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다.

 

인삼밭 모롱이를 돌아 산기슭을 허물고 낸 경운기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 걷는데 누군가 저거 취 아니냐고 소릴 지른다. 소리를 따라 가보니 길에서 손이 닿을만한 기슭에 빗물에 씻겨 깨끗하고 연한 취가 못자리처럼 널려 있다. 두어 잎을 뜯어보았다. 상처가 난 취의 대궁에서는 코까지 가져갈 새도 없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 취는 금세 한 주먹이 되었다. 아내는 이제 그만 가요. 남자가 뭐 나물을 그렇게 밝힐까? 하면서도 크게 싫지는 않은 듯한 투정을 했다.

 

본래 산에 가면 그냥 쓰레기만 되가져온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고 그렇게 실천해 왔다. 버섯도, 고사리도, 가을에는 도토리도, 다 그냥 거기 두는 것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의 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언젠가 가령산 기슭에서 취를 한 번 뜯어보고는 취만 만나면 정신이 그만 혼미해져 버린다.

 

주능선 안부인 수안재로 오르는 길목의 산기슭마다 취가 지천이다. 취는 종류별로 여러 가지가 있다지만, 나는 모양과 종류를 잘 알지 못한다. 그냥 산에 널려 있는 취라고 하는 것도 잘 구분하지 못해서 한 잎을 뜯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확인하곤 한다. 취는 가장자리의 굵은 톱니 모양만 아니면 꼭 심장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우아한 향이 심장을 감싸는 듯하다. 그래서 그 향에 매료되어 버린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취는 초가을에 하얀 꽃이 핀다. 봄에 만난 취의 여린 잎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다란 자주색 대궁 위에, 자잘한 여러 개의 꽃잎이 합쳐져서 하나의 꽃처럼 청초하게 피어난다. 취를 뜯을 때마다 그 우아한 향기를 맡으며 초가을에 필 어머니 무명 치맛자락 같은 꽃을 연상한다.

 

산에 다니면서 무엇이든 가져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꾸 되새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번 탐욕에 빠지면 산이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 취가 취로 보이지 않는다. 알량한 풍수 상식을 밑천으로 산에서 별장 터를 찾고, 겨울 밥상을 걱정하며 초목을 바라보게 된다. 우아한 향기와 손에 쥐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까끌까끌한 감촉, 그리고 초록의 뿌듯함에 그만 홀려 버린다. 그렇게 한 번 빠지면 살모사가 새끼를 낳을 때 잔 소나무에 올라가 떨어뜨린다는 목덜미까지 선뜩선뜩해지는 속설도 다 잊어버린다. 오직 탐욕만이 살모사 혓바닥이 되어 의식 속에서 날름거린다.

 

수안재를 거쳐 능선을 타고 대왕봉을 지나 정상으로 올라야 길이 순탄하고 전망이 좋다는 안내서의 설명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배낭이 불룩하도록 취만을 취했다. 나를 앞잡이로 뒤를 따라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오직 취만을 따른 것이다. 우리는 순간에 길을 잃었다. 하는 수없이 대왕봉으로 직접 오르는 가파른 길을 택했다. 전망도 그렇지만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숨이 턱에 닿았다. 탐욕의 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버티고 서서 길을 막았다. 참나무 잔가지들이 회초리가 되어 나를 마구 휘갈긴다. 거미줄이 포승줄처럼 얼굴을 휘감는다. 하찮은 취에 대한 욕망의 대가였다.

 

그제야 백악산 뱀이 또 생각났다. 디디는 바위마다 새까만 살모사나 진한 갈색의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취를 좇던 저급한 나의 탐욕이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백악산 살모사는 취에 대한 탐욕을 두고 하는 말인 듯 했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면서도 쉽게 살모사를 쫓아 보낼 수 없었다. 정상은 기다란 반석으로 되어 있었다. 반석에 앉으니 멀리 조항산, 청화산이 다 보인다. 조항산과 청화산이 흘려보낸 물이 의상저수지에 괴어 멀리서 보아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푸르다. 그 아래 왕소나무 숲이 뚜렷이 보인다. 모두 아름다운 세계이다.

 

정상 바위틈에서는 취를 볼 수 없었다. 거대한 소나무 아래 바위가 있고, 산목련만이 하얗게 피었다. 어떤 소나무는 잎을 떨구고 까맣게 미라가 되어 있었다. 온 세상을 다 내려다보면서, 세상의 갖은 바람을 다 맞으면서, 그들이 전하는 온갖 세상 이야기를 안으로 새기다가, 그 아픈 이야기들이 뼈에 사무치고 사무쳐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는 숨을 거둔 모양이다.

 

소나무 미라를 보고 있는 동안, 내 안에 살모사가 되어 자리 잡고 있던 취에 대한 욕망은 어느새 스르르 꼬리를 감추었다. 똬리를 틀고 독살스러운 눈으로 사방을 응시하던 살모사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소주 두서너 잔으로 마지막 남은 탐욕을 씻어내고 내려오는 길에는 취는 한 잎도 보이지 않았다. 박달나무인지 계곡에 늘비한 활엽수들만이 하얗고 깨끗한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었다. 계곡은 온통  자연 그대로 순백의 세계로 정화되었다.

(2005.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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