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불의 예술(멋)

지붕 위의 갈대

느림보 이방주 2006. 9. 22. 09:21

 

토종 갈대(사진은 '들꽃누리집"에서 http://delta001.com.ne.kr/)

 

  지붕 위에 갈대가 꼿꼿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더니 잔바람 정도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복도에서 유리창을 열면 바로 손을 뻗어 뽑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지의 칼날 같은 이파리의 서슬에 손을 내놓지 못한다.

“지붕 위의 갈대” 나는 그렇게 이름 지었다.

 

철제 기둥에 지붕만 얹은 주차장은 빗물이 교사 쪽으로 흘러내리도록 비스듬한 파란 함석지붕이다. 주차장 함석지붕은 여름철 정오가 지나면, 손대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 파란 지붕 위에 쌓인 먼지는 빗물에 흘러내려 물받이에 쌓인다. 그 한 줌도 안 되는 뜨거운 흙에서도 싹을 틔우는 생명력이 놀랍다. 불가마처럼 데워진 한 줌의 흙도 질긴 생명들에겐 충분한 삶의 영토가 되는 모양이다.

 

끈질긴 생명을 말하기 가장 좋은 것은 민들레꽃이다. 불가마같은 주차장 함석지붕 위에도 민들레 씨나래가 날아들어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일교차가 심해진 탓인지 작고 연약한 민들레들이 이미 자주색으로 숨을 거두고 있다. 이렇게 생명력의 상징인 민들레도 선들바람에 제빛을 잃어가는데,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갈대의 씨나래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선들바람도 아랑곳없이 청청한 잎사귀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잎의 본성을 잃지 않은 날카로움이 하늘에 칼질을 하는 듯하다.

 

갈대는 본래 해발 400m이상에서는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벼과 식물에 속하기 때문에 개천가나 호수가, 논둑, 늪지대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물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산기슭에도 어렵지만 습기가 많으면 군락을 이루며 살기도 한다. 습지에서 한번 뿌리를 내리면 해마다 더욱 무성해진다. 그런데 습지도 아닌 뜨겁고 메마른 지붕 위에서 싹을 틔운 그의 생명력이 무섭다.

 

 연풍의 개천을 뒤덮은 키작은 갈대(원 안은 그와 같은 종류의 지붕 위의 갈대)

을숙도 같은 큰 강의 하구를 뒤덮던 갈대가 최근에는 산골의 온 개천을 뒤덮기 시작했다. 갈대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성해졌는지 모른다. 연풍에서 괴산에 이르는 괴강 지류는 온통 갈대로 뒤덮였다. 신선암봉에서 내려오는 물과 백화산과 희양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되는 연풍면 소재지 앞 그 맑은 계수도 갈대가 뒤덮었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골짜기의 물이 연풍면 오수리를 지나 갈길 마을 앞에 다다르면 갈대는 더욱 무성해진다. 그러다가 장연면 장풍 마을 앞개울에 이르러서는 온통 갈대 천지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늘어난 갈대 군락은 칠성면에 이르러 외사리 괴산댐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수되는 지점에서는 그 넓은 둔치를 온통 갈대의 천국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아무리 물을 정화시키는 갈대라 하더라도 온 개천을 메우는 갈대가 두려워졌다.

 

처음에는 물을 정화시키는 갈대가 이렇게 시냇물을 뒤덮으니 물은 깨끗하게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갈대가 우리나라 토종 갈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수입 사료에 섞여 들어온 갈대 씨앗이 가축의 배설물을 통하여 흘러들어 우리의 개천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메말라도 바람에 흔들리는 토종 갈대와는 다른 그 지독한 생명력으로 온 세상을 제 영토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침 안개 속에서 이슬을 함뿍 머금은 강아지풀도 사라지고, 노을 아래 노랗게 피어나던 달맞이꽃도 자취를 감추었다. 물가에 소복하게 모여 피라미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여뀌도 제자리를 잃었다. 겉으로는 정화하는 듯하나 안으로는 온 세상을 오염시킨 것이다.

 

그 지독한 갈대가 학교 부속 시설인 주차장 파란 함석지붕까지 날아와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한 뼘 남짓밖에 자라지 못했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오만으로 하늘을 찌르는 갈대를 바라본다. 뿌리가 굵어지면 두 뼘도 되고 한 길도 될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교실 벽이라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기세다. 악착스런 저 놈이 우리 아이들의 천사 같이 순진한 머리에 뿌리를 내릴 것 같아 몸서리쳐진다.

 

최근 백년간 우리의 일상은 온통 서구의 것으로 점령당했다. 한복이 양복으로, 댕기머리가 하이칼라머리로, 고의적삼이 청바지와 티셔츠로 변하는가 싶더니, 최근에 더 가속화하여 잔치국수를 후루룩 들이키던 우리 나무젓가락에 스파게티가 배배 똬리를 틀고 있다.

 

외래의 갈대가 개천을 뒤덮는 아픔을 알 까닭이 없는 아이들은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말에서 “내”와 “네”의 발음을 분명하게 구별해 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내 갈대와 네 갈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욱 심각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내”와 “네”의 발음을 반복 훈련시킨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못하는 입말이 굳어버리면, 결국에는 글말로도 구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우리 아이들은 “나”를 상실하고 만다. 이 땅에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혼돈이 올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네”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나의 이런 기우(杞憂)를 알 턱이 없는 아이들이 “내”, “네”를 아무렇게나 소리지르는 동안에도, 지붕 위의 제 영토를 구별하지 못하는 갈대는 흔들릴 줄 모른다. 계절이 저렇게 바뀌는데도 색깔조차 변할 줄 모른다. 따라할 줄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 서 있는 불쌍한 국어 선생의 안타까움을 비웃기나 하는듯 고운 가을 햇살에 부서지는 진초록의 윤기가 눈부시게 반사한다. 점령군의 포악한 욕망처럼 서슬만 시퍼렇다.

(2006. 9. 22.)

'느림보 창작 수필 > 불의 예술(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직지  (0) 2007.05.27
산수유  (0) 2006.12.15
불의 예술  (0) 2003.12.10
永生의 흙  (0) 2003.08.21
질마재에는 비가 내리고  (0) 200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