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열기가 두렵다. 요 며칠 사이에 차가워진 아침 공기 때문이 아니다. 하늘빛 때문이다. 아파트 회벽
사이로 보이는 코발트 빛 하늘이 온몸을 빨아들일 듯하다.
창을 열다말고 진열장을 들여다본다. 지난 88년 단양을 떠날 때 방곡
도요의 명장 傍谷 서동규 선생으로부터 얻은 녹자(綠磁) 정호 다완(井戶茶碗)이 숨어 있는 색의 비경을 변함 없이 보인다. 오늘은 원통암이 있는
황정산 등반을 서둘러 마치고, 방곡에 들러 그간 경지에 이르렀을 명장에게 흙의 도를 들어야겠다.
황정산 원통암은 15,6년 전에
들렀을 때는 주변의 경관과 어울린 바위 아래 대웅전의 고고함이 엄청난 감동을 주었는데, 3, 4년 전 부처님 오신날에 들렀을 때는 실망만 안겨
주었었다. 땀에 젖을 정도로 경사가 심하기는 했지만 사찰로 오르는 계곡에는 한적한 오솔길이었는데, 길은 육탈(肉脫)된 해골처럼 수마에 무너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천년 고찰의 절집은 미친 화마의 불꽃으로 한 무더기 재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만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처참한
모습은 오늘도 변함 없고 스님조차도 절을 비우고 없었다. 짐짓 실망의 빛을 감추는 아내와 함께 간 친구 내외에게 미안했다.
서둘러
하산하여 방곡 도예촌에 들르기로 했다. 사인암에서 직티리를 가로질러 새로 난 도예촌 가는 길은 숲속 오솔길에 있는 그대로 아스콘을 깔아 놓은 듯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가 어우러지고, 산의 호흡에서 풍겨 나오는 자연의 향기가 불로 인해 망가진
원통암에서 남은 애잔함을 씻어줄 듯 했다.
차안에서 바라보는 방곡은 15,6년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숨어있던
도예라는 흙의 예술혼이 살아 나와 산기슭이나 밭두렁에 묻어 숨쉬고 있었다. 직티에서 옛날 방곡 분교장으로 내려가는 장작 가마가 군데군데 산재해
있던 마을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 양편에도 흙의 예술이 기어 나와 용틀임하고 있었다.
옛날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모습
때문에 나는 傍谷 선생의 방곡 도요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데나 주차하고 마을에 들어가 한 도예원에 들어갔다. 원장이라는 분의 안내로 그의
작품을 감상했다. 대부분 음각을 하여 구워낸 대작이었다. 작품은 화려하지 않지만 고졸한 빛을 내는 말하자면 현실을 초탈한 서민의 모습이었다.
작은 소품들은 생활 필수품으로 쓰이는 커피잔이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 주로 했다는 대형 벽화, 오백나한상은 스크랩으로만 볼 수
있었다.
흙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흙의 문화의 주제를 찾는 나로서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망의 빛을 감추고 자기의
색채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다. 그 분은 흙으로만 빛을 낸다고 했다. 흙으로 빚어 흙에서 나온 유약으로 윤을 내고,흙가마 속에서 구어냈으니 흙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손재주나 흙의 재질뿐 아니라 작품의 품격은 결정적으로 불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 때 그의 부인이
옆에서 '자기(磁器), 그건 불의 예술이예요' 하고 거들었다. 자기는 장인의 손끝을 벗어나 불의 결정을 기다려야하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뜻이었다.
'불의 예술', 나는 흙으로 빚어 불로 구워낸 흙과 불의 오묘한 빛깔이 영원 불변한 것이기를 바랐다. 진품인지는 잘
모르지만 금나라 때의 천목 다완(天目茶碗)을 내 놓았다. 짙은 코발트빛의 너부죽한 찻잔이다. 코발트빛은 평면이면서도 입체의 느낌을 주는 수많은
이슬방울 같은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늘의 수많은 눈망울들이 마음 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그 신비스러운 빛깔과 무늬가
1200년을 넘어 오늘까지도 방금 구워낸 것처럼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녹자가 보여주는 옅은 녹두빛도 그의 말대로 운명처럼 불에
맡겨진 불의 예술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불의 예술의 극치라면서 잘 익은 자두 빛의 진사 자기(辰砂磁器) 항아리를 보여 주었지만,
녹자를 발견하지 못해서 자꾸 전시된 작품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시내 성안길 길바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반야심경을 담은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건 가스불로 구워낸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녹자를 찾지 않기로 했다. 이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기억을
더듬고 사람들에게 물어 방곡 도요를 찾았다. 직티에서 넘어오는 길과 문경 단양을 잇는 도로가 만나는 삼거리 지점에 있었다. 傍谷 선생의 도요에서
녹자의 진경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전시실을 기웃거렸다. 선생은 출타했는지 문을 열어 주는 젊은 친구는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 고장 학교에 근무할 때 잠시 가르친 적이 있는 傍谷 선생의 아들 서 군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잇는 그는 학생시절의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이마에는 어느덧 연륜을 얹고 있었다.
전시실은 예전보다 정리가 잘 되고 작품도 다양하다. 선생의 녹자는 예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빛을 내고 있었다. 은은한 녹두색 바탕에 무르익은 살구의 속살에서나 얻을 수 있는 화려한 분홍빛
무늬로 매화꽃이 만발한 다완을 보며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정호 다완의 분홍빛 매화꽃 무늬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 가 없었다.
은은한 듯하면서도 화려하고, 화려한 듯하면서도 결코 천박하거나 싫증나지 않으며, 억지로 눈을 빨아들이지도 않았다.
흙과 불의 예술이
꽃피운 매화는 녹자 이도항아리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맑고 깨끗한 녹두색 항아리에는 엷은 윤기가 흐르고, 온 세상이 그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거기에 방곡 산야에 널부러진 흙이, 그리고 대를 이어온 명장의 손길과 땀과 숨결이, 소박하면서도 수려한 황정산 자락이, 선암 계곡으로 흘러드는
옥같이 맑은 물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傍谷 선생이 땀흘리며 흙을 다지는 모습도 보이고, 물레를 돌리는
섬세한 손길도 보이고, 장작 가마의 타오르는 불길도 보이고, 그 불길 사이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발갛게 익어가는 자기도 보이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흙으로 향한 정진의 목소리를 바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다완에 차를 따라서 왼손으로 받쳐 들고 중지로 가만히
찻잔의 밑바닥을 더듬어 보면 도도록한 감촉을 느끼게 된다. 어릴 때 만지작거리던 어머니 젖꼭지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뾰족하고 단단함이 어쩐지
더 여린 그것에서 오는 느낌인건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손가락으로는 가만히 성의 감촉을 혀로는 은은한 녹차의 향기를 느끼는 것을 보면 방곡
선생의 열려있는 탐미에 대한 배려가 감동스럽다.
정호 다완은 우리나라에서 서민들이 쓰는 막사발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막사발이 임란을
전후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 아름다움에 감복한 일본인들이 최고급의 찻잔으로 쓰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문화의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녹자는 傍谷 선생이 방곡의 흙과 느릅나무 재를 원료로 최초로 빚어낸 흙예술의 극치라 한다.
나는 여기서
불의 예술이란, 흙으로 빚어 인간의 손길을 떠나 불에 맡겨져 운명처럼 기다려 나오는 우연이 아니라, 명장에 의해서 빚어진 흙이 다시 한 번
인간의 예술 혼이 빚어내는 불길에 의해서 표출되는 자연을 떠난 자연임을 깨달았다. 불의 예술은 곧 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명장이 빚어낸 불에
의한 것임을 매화무늬 이도항아리는 깨우치고 있었다.
불은 황정산 너머 원통암에서 천년 고찰을 재로 만들어 우리를 애잔하게 하더니,
날망을 넘어와 이곳 방곡에서 명장의 호된 손길을 맞고 길들여져서 온통 자연을 휩쓸어 녹자에 담아 은은하면서도 황홀한 살구빛 매화로 꽃피우는 불의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돌아오는 길, 주흘산이 버리고 간 여인의 어깨처럼 부드럽고 애잔한 산자락에는 지는 해가 뒷좌석 아내들의
흐뭇한 대화를 듣는지 마는지 이미 비취색으로 변한 하늘을 배경으로 또 하나의 불의 예술을 연출하고 있었다.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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