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 25.
새벽 4시에 일어나 서둘러 인천공항으로 달렸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몇 시간을 기다려 드디어 오후 1시부터 런던행 아시아나 항공 521편에 탑승하였다.
우리는 친구 내외와 넷이서 떠나는 이번 여행을 배낭여행이라고 이름하였다. 사실 배낭 메고 우리끼리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이튼에 있는 아들의 도움과 함께 하는 여행이지만, 우리가 계획해서 우리가 예약하고 우리의 발로 뛰는 여행이기에 배낭여행이라는 말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내는 런던에서 6개월 만에 만날 아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고도 11000M 시속 900~1000KM를 유지하며 섭씨 -50도의 얼음 공기를 뚫고 10시간 남짓 비행 끝에 도착한 런던의 히드로 공항은 아직도 햇살이 따갑기만 한 오후 4시 경이었다. 우습게도 “이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별나게 까다로운 입국 수속이 많은 시간을 빼앗아 빨리 아들을 보고 싶어하는 아내를 애태웠다. 이렇게 이른바 선진국이란 나라들의 지은 죄는 후진국에 대한 오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오만이 과거의 지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말한다.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로 이해된다. 그런데 아무 자랑거리도 아닌 그것을 영국인들은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식민지가 거의 독립된 지금에도 영국은 해가 머뭇거리고 서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저녁 9시가 되어도 서쪽 하늘에 햇살이 비치더니, 10시가 되어야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영국은 실제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결국 해는 언젠가는 서쪽으로 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보면 오히려 해가 지는 쪽에 영국이 있다. 때문에 나는 오히려 “영국은 해가 지는 나라다.”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시계를 9시간이나 거꾸로 돌렸다. 태양의 속도보다 빨리 태양을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9시간이나 추월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루를 33시간이나 늘려 쓴 것이다. 만만찮은 '해 따라잡기'가 아닌가?
아들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고 밤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영국인은 어쩔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전통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나라라는 나의 첫인상은 결코 잘못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아래 세계는 건물과 나무와 논밭이 잘 정돈되어 있고, 오래된 건물과 낡은 집들이 화려했던 과거에 안주하려는 그들의 발버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하철, 런던의 거리, 타워브릿지 등에서 만난 사람들은 앵글로섹슨족이나 켈트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흑인, 혼혈, 아랍계, 이집트에서 건너온 듯한 사람들, 그리고 동양인들로 거리는 더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들이 과거를 아무리 유지하려 해도 과거에 그들에게 무소불위로 약탈 당했던 그 민족들이 이제는 영국의 거리를 메우고 그 거리에 이루어지는 경제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천을 미국의 붕어나 갈대가 점령하듯 이민족의 발걸음이 런던의 거리에 더욱 활기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템즈강가에서 야경을 보며 지르는 환호성에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 구김살 없이 자신감에 넘치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후끈 달아 올랐다. 또 공항에서 6개월 만에 만난 아들은 어느새 세계를 눈 안에 넣고 있는 것처럼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찢어져야 내 자식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이 낯설어 보였다. 우리가 항공기를 타고 지는 해를 따라잡을 수 있었듯이 우리의 젊은이들은 언젠가 '해가 지지않는 나라'의 오만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찌 할 수 없었다.
(2006.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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