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안내자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라면서 간접적으로 공산주의의 모순을 반성했다는 등소평의 말을 예로 들면서 중국의 고속도로를 자랑했다. 아울러 그는 도로를 건설하면 도로를 따라 문명이 유입된다고 했다는 등소평의 말도 덧붙였다. 스물여섯의 안내자로서는 꽤나 승객의 구미를 맞출 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끝마다 제 나라의 거대한 땅덩어리와 유구한 문화를 앞세워 은근히 배달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용안에서 청도를 거쳐 제남으로 향하는 산동성의 고속도로는 언뜻 보면 참으로 부러웠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굽잇길도 없이 그냥 서쪽으로 곧게 뻗은 4차선 도로는 그냥 4차선이 아니다. 갓길이라는 게 우리 나라에서는 1차선을 더한 것만큼 넓다. 그리고 또 갓길이 있다. 도로 양쪽에는 도로 너비만큼 나무를 심어 가로수가 아니라 숲을 만들었다. 곧게 벋은 도로는 멀리서 한 점으로 모였다. 그런 땅덩이가 부러웠다.
그러나 도로를 타고 문명이 온다던 그들의 영웅의 말은 헛말이 되어버린 듯하다. 산동성의 도로변에서는 유구하다는 중국의 문명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말라 스러지는 옥수숫대, 추위를 뚫고 기어오르는 파릇한 밀밭, 생긴 대로 버려둔 물웅덩이 뿐이다. 모택동이 인민에게 베푼 은혜라는 농민들의 집단 주거지는 꼭 우리나라의 보병 사단의 막사 같았다. 붉은 벽돌에 붉은 색 기와로 지붕을 이은 연립 가옥이 100여 채도 더 되게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어떤 것들인가 짐작이 갈만도 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혀 질서 의식이 없다. 자전거에 나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천천히 다니는가 하면, 역주행 하는 차도 있다. 신호를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삽자루를 뒷짐으로 쥐고 천천히 무단 횡단한다. 오랜 세월 감시 속에서 타율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감시를 벗어나자 무질서를 향유하고 있는 듯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눈을 들어 보면 도로가 얼마나 많은 문명을 끌어안고 있는지를 뚜렷이 볼 수 있다. 우선 야산에 흔히 바라보이는 조상들의 무덤을 볼 수 있다. 깨끗하게 다듬어 잡목하나 뿌리 내리지 못한 제절에는 알맞은 높이의 비석들이 과거와 현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곳곳의 사당, 신도비도 그렇다. 사람들이 사는 가옥의 모습도 형형색색이다. 역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장, 교회, 가로수, 도로, 골프장, 정리된 논밭, 비닐하우스, 축사나 목장, 강안, 다리, 등 모든 것이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자연에 사람의 지혜와 기술이 미친 것을 문명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의 주변은 저들에 비하면 온통 문명의 보고이다. 문명은 고급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물론 이것도 구분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지만) 똑같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우리의 고속도로는 과거와 현대, 상층과 하층의 문명이 가치의 차등 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속도로에서 가끔씩 보이는 야산의 공동묘지인 듯한 곳은 예전 우리 농촌의 마당가에 쌓아 놓았던 거름더미처럼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논밭은 비교적 정비가 되어 있지만, 시골의 개울이나, 마을로 들어가는 고샅길이나, 가옥이나 모두가 생긴 그대로이다. 또 옥수수와 밀밖에 심어 먹을 줄 모르는 그들의 농업이 우습다. 제남 가까이에 야채를 가꾸는 비닐하우스가 있다고 하나 그것도 역시 개인의 창의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13억이나 된다는 중국인들은 요즘 뭘 하며 지내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을 앞 군데군데 웅기중기 모여 서 있는 그들은 무엇을 의논하는지 도 알 수가 없다. 1960년대의 모택동의 교시대로 먹고 사는 일의 해결에 급급한 저들의 주저앉아 있는 문명이 참으로 갑갑하다. 그래서 반대로 우리 농민을 이 넓은 벌판에 쏟아 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듯했다.
북경과 상해의 화려한 거리, 우리가 하루 묵었던 유방이라는 도시의 거대함은 현대 서구 문명의 거죽을 흉내 낸 흉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시 문명은 농촌과 두메로 전파되면서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은 두메의 삶을, 두메 사람들은 도시의 삶을 동경하고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는 한국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문명 독점을 힐난하고 있으나 그들은 일부 엘리트가 꼭대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공묘의 대성문에 전을 벌이고 공자의 칠십 몇 대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조잡한 상품을 들고 “천언, 천언”하면서 애원하는 그들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공자의 무덤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잡목 등걸은 보지 못하고, 천원은 그냥 쉽게 쓰는 한국인만 눈에 들어오는 중국 서민들의 문화에 대한 감각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면서 푼돈을 모아 거대함을 꿈꾸는 대륙이 치졸해 보였다.
아무리 배고픈 사람들이 생각해 낸 정치사상이라 하더라도, 유구한 중국 문화의 맥을 끊어 놓은 우를 범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획일주의는 배부름을 지향하는 과정의 문화마저도 무시했기 때문이다. 배부름을 지상 과제로 강조하다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버리는 것이 최선인 양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배고픔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굶주림을 견디고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이 바로 문명의 수준이 아닌가 한다.
일부 도시에 도로가 넓어지고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하여 중국의 발전을 눈부시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성과 다양성에 의한 정신문화를 거부한 그들의 수정주의도 삶의 질을 개선하기에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선 과정의 문화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관계없다며 과정이 튼튼하지 못하면 결과도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하층 계급의 문화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저변의 문명이 단단하지 못하면 거대한 문명도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또한 전래의 문화에 대한 소홀함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몰두하다가 전래의 문명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 것이다. 화장 문화를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시행하면서 무덤을 없앴듯이 전통 문화의 가치를 머릿속에서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들의 유물사관은 경제 성장에 급급하면서도 일제에 말살된 전통 문화를 찾아 일으켜 세웠던 1960년대 우리의 경제 정책과 너무나 다른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그들이 ‘만만디’를 지향하면서 우리의 ‘빨리 빨리’를 비웃지만(일부에서는 ‘빨빨’이라함) 우리는 2호 다음에 13호를 건설한 북경의 지하철 같은 어리석은 서두름은 범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산동성의 텅 빈 고속도로를 간간이 달리는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원이 풍부한 그들이 우리보다 살진 쥐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기름지게 먹고 배부르게 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만드는 쥐고기 요리의 맛은 흉내 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200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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