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눈내리는 날의 김치찌개

느림보 이방주 2004. 3. 20. 13:32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봄눈이 이렇게 많이 내린 것도 참 드문 일이다. 김치 냉장고에서 갓 꺼낸 김치맛이 신선하다. 이렇게 눈이 소복이 쌓인 날 아침에는 게으른 눈을 비비고 두어 걸음으로도 넉넉한 좁은 마당에 겨우 길을 내고, 눈을 파헤쳐 김치를 꺼내던 가련한 산골 총각 선생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날은 그리운 고향을 아예 눈 더미에 묻어두어야 했다. 다 모지라진 비사리춤을 툭툭 털어 들고 사택 마당 끝에 묻어둔 김치를 꺼내야 한다. 파묻힌 김치독을 겨우 찾아 뚜껑을 열면, 그 때 알맞게 숙성된 단지 안에서 나던 냄새가 바로 이런 냄새였다.

 

30년 전, 참으로 궁색한 자취 생활을 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배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바로 돼지고기김치찌개였다. 김치는 가을에 학교 실습지에 농사지은 배추나 무에 양념을 아무렇게나 버물여 땅에 묻으면 된다. 그 김치가 노랗게 익으면 그냥 그렇게 오늘 같은 맛이었던 것 같다. 돼지고기는 그냥 마을에서 구할 수 있다.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오지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신선들만 먹는 산채의 찌꺼기를 먹은 돼지를 잡는다. 거기서 때로는 갈비나 다리를 하나씩 사서 사택 마당 대추나무에 걸어 두면 된다.

 

처음부터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누구나 먹을 수 있을 만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냥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냄비에 넣고, 사택 마당 대추나무에 걸려 있는 돼지 다리에서 주먹만큼 떼어내어 차가운 물 한 컵을 넣고 그냥 마구 끓여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도 맛이 있었다. 그러나 초겨울에 사 놓은 돼지 갈비 한 짝이 거의 없어질 무렵, 봄눈이 이렇게 푹 쌓일 때쯤, 온 방안이 돼지고기 김치찌개 냄새로 절어 있을 때쯤, 나는 아무도 낼 수 없는 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지난 3월 초, 해발 500m가 넘는 그 산골에 무섭게 쌓이던 눈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눈 탓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돼지고기김치찌개 만드는 나만의 비법을 공개한다.

우선 김치는 새곰새곰할 정도로 잘 익은 것이 좋다. 김치통을 열었을 때 특유의 김치향이 얼굴에 묻어나야 한다. 온도가 잘 맞추어져 배추청이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 듯하면서도 아랫도리는 노릇노릇 양념이 밴 것이면 좋다. 그래도 속살은 속살이니 만큼 아직도 하얗게 남아 있으면 더욱 좋다. 도마에 놓고 칼로 꽁지 부분을 ‘쓱-’ 도려 낼 때 그 소리가 ‘아사삭-’ 경쾌해야 하고, 초여름 대야산 조양골 숲에 숨어 있는 작은 폭포에서 나는 안개같이 신선한 냄새가 나는 놈이어야 한다.

 

꽁지를 잘랐으면 꽁지 부분부터 왼 손으로 모아 쥐고, 오른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양념 국물을 쥐어짜야 한다. 이때 나온 김치 국물은 따로 그릇에 담아 둔다. 더 이상 국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짜냈으면, 도마에 올려놓고 보통 때의 삼분의 일 정도의 넓이로 잘게 썬다.

이때, 미리부터 그렇게 깊지도 않으며 밑이 펑퍼짐한 냄비를 미리 불에 얹어 달군다. 냄비 밑바닥이 뜨거워져서 단내가 솔솔 피어오르면 들기름을 두르고 썰어놓은 김치를 넣어 달달 볶는다. 김치가 숨이 죽을 정도로 볶아지면, 연기처럼 짙은 김이 솔솔 피어오르고 냄새부터 다르다. 이때 미리 잘게 저미어 준비한 돼지고기를 넣는다. 남들은 씹는 맛이 좋아 큼직큼직하게 썰어야 한다지만, 도톰하면서도 좁고 기다랗게, 꼭 처음 김치를 썰어 놓았을 때 그 모습으로 썰어야 좋다. 돼지고기는 결을 잘 살펴서 썰어야 팍팍하거나 질기지 않다. 이렇게 해서 돼지고기와 김치가 잘 섞일 정도로 자꾸 뒤적여 주면, 어느새 돼지고기는 핏빛을 거두고 입안에서는 침이 돌기 시작한다.

 

이때쯤, 손을 재게 놀리지 못하면 배춧잎 몇 쪽이 냄비 가장자리에 늘어붙어 탄내가 난다. 김치가 몇 쪼가리만 타도 찌개에서 불내음이 난다. 그래서 음식은 숟가락 끝에 조금 묻혀 맛만 보아도 정성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받아놓은 김치 국물을 잽싸게 넣어야 한다. 찌적찌적할 정도가 되면 고추장을 넣고 김치나 돼지고기에 고루 섞이도록 뒤적인다.

 

고추장이 고루 섞이면 물을 조금 더 붓고 간장으로 간을 한다. 소금간이 맑고 깨끗하다지만,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화학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깊은 맛이 난다. 사람이나 음식이나 정성을 다하면 그 정성이 거기에 괴고, 깊고 오랫동안 숙성되면 깊은 맛이 샘솟는 법이 아닌가? 간장처럼 오랫동안 어두운 독 안에서 오랫동안 도를 닦으며 오늘을 기다려온 조미료를 화학 조미료가 당하겠는가? 그 자체가 조미료이고 그 자체가 바로 맛이고 삶의 전부이다. 찌개가 바글바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고춧가루를 조금 더 넣고 취향에 따라 후춧가루를 넣어도 좋다. 마늘 파 같은 것들도 취향에 따라 더 넣는다.

 

이제 냄비 뚜껑을 조금 열어 놓고 잠시후의 황홀한 맛을 생각하면서 그윽하게 기다린다. 조급하면 낭패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윽한 삶의 참맛을 보기 위해서는 그윽하게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이무것도 아닌 것 같은 짧은 순간에도,  그윽하게 참는 방법을 학습한다. 그러면 길게 생각되는 실제로는 짧은 순간이 지나면 꿈같은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을 회관처럼 작은 학교 건물에서 보면, 운동장 건너에 산골 마을에 어울리지도 않는 슬라브집 두 채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 살았다. 눈이 오지 않아도 차가운 하얀 색 슬라브집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사택 바로 아래 흐르는 제법 큰 개울에는 초겨울에 얼기 시작한 얼음이 사택을 향하여 칼바람을 보내고, 두어 배미밖에 안 되는 논다랭이를 지나 하늘에 솟아 있는 산꼭대기에는 산신령 머리처럼 서슬이 퍼런 눈덩어리를 이고 차가운 기운을 내리 붓는다. 나는 그 차가운 젊은날의 바람을 돼지고기김치찌개가 익을 때까지 그렇게 짧은 순간이지만 한없이 길었던 그 시간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듯이 오늘의 참맛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넓고 따뜻한 아파트에서 눈 덮인 소나무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오늘을 말이다.

(200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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