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꽃 피는 이유
2006년 7월 9일
미호천에서
떠난 사람들의 자리에는 개망초가 꽃을 피운다. 개망초꽃은 떠난 사람들의 자리에 떠난 사람들의 한처럼 하얗고 하얗게 피어난다. 길가, 논두렁, 밭둑, 산기슭 절개지 뿐만 아니라, 자손의 마음이 떠나 낮아진 묘의 봉분에도 피고, 묵정밭, 오래된 집 마당에도 피어난다. 자손 잃은 사당의 기왓장 사이에도 피고, 주인 떠난 농촌 허전한 뒷간의 문턱에도 핀다. 개망초는 도회에도 핀다. 아파트 정원 구석에도 피어나고, 전봇대 아래에도 피고, 가로수 곁에서도 하얗게 꽃을 피운다. 마치 떠난 사람들의 입김처럼, 떠난 사람들이 한스럽게 내뱉는 노랫가락처럼 하얗게 피어난다. 개망초꽃은 사람들의 발길 뿐만 아니라 마음만 떠나도 피어난다.
6월에 보일 듯 말 듯 엷은 자줏빛을 띠면서 피어나기 시작한 개망초꽃은 7월의 햇살에 새하얗게 정화되어 8월까지 간다. 엷은 자줏빛 한가운데 처음에는 초록 섞인 노란색 꽃술이 소복하다가, 꽃잎이 자줏빛을 잃어갈 무렵 그 꽃술 다발은 샛노랗게 성숙한다. 손길 보드라운 여인이 만들어낸 달걀프라이 같다. 그래서 재미있는 사람들은 이 꽃을 ‘달걀프라이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망초는 줄기나 잎에 보송보송한 털이 있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늘어지기 시작한 줄기에 난 솜털은 꼭 초겨울 쇠잔한 노인의 팔뚝에 난 솜털 같다. 9월이 되어 꽃대궁이 마르기 시작하면 논둑에 앉아 담배 피우는 노농老農의 장딴지처럼 여위어 간다. 그러다가 저보다 대궁이 훨씬 더 굵고 키도 큰 망초가 그 무성한 곁가지에 한여름 떼를 지어 몰려드는 하루살이 같은 어수선한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슬며시 자취를 감춘다.
개망초는 아무리 메마른 땅이라도, 아무리 사람들이 들끓던 장마당이라도 1,2년만 마음이 떠나 있으면 살림을 차린다. 한번 씨가 떨어지면 하얗게 군락을 이룬다. 속설로는 개망초와 사촌 격인 망초가 자리를 잡으면 농사를 망친다고 해서 망초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농민에게 한을 준 망초처럼 개망초는 농민의 한을 대변한다.
올해는 개망초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출근길에 고개를 넘다가 언뜻 바라보이는 묘지는 온통 개망초꽃으로 뒤덮여 있다. 자손들이 묘지를 돌아보던 자취만 남은 오솔길에도 하얗게 꽃으로 덮이었고, 봉분도 제절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키 큰 꽃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잔바람이 불면 돌아간 사람의 수의가 날리듯 그렇게 일렁거린다. 조상의 음덕에 감동할 줄 모르는 자손에 대한 원망처럼, 자손에게 감동을 남기지 못한 삶의 여한처럼, 개망초꽃은 그렇게 바람에 일렁인다.
묵정밭에 피어나는 개망초꽃은 동학의 흰 저고리 같다. 묵은 따비든 텃밭이든 고래실이든 2년만 묵으면 개망초가 꽃을 피운다. 세상 사람들의 인정에 굶주린 농민의 넋이 흰 저고리를 입고 몰려 나와 함성을 지르는 것 같다. ‘하늘 아래 대본’이란 말이 진정이 아니라 말 뿐이었다 걸 이제 알아차린 농민의 아픔이 하얗게 출렁거린다. 소박했던 소망이 무너져 하얗게 하늘을 덮는다.
보리마당질하던 시골 마당에도, 잘 가꾸어 봉숭아, 분꽃, 상사화가 피던 뜨락의 화단에도, 무너진 뒷간 흙벽돌 위에도, 연장방아 돌다 멈춘 그 자리에도, 밥 짓다가도 두어 걸음에 고추를 한 줌 따올 수 있던 텃밭에도 개망초꽃이 피었다. 개망초꽃은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귀밑머리 검은 어린누이가 이삭 줍던’ 아직도 햇살은 따가운 텃논에도 피었다. 개망초는 떠나는 이들의 자리를 바라보는 우리들 가슴에도 하얗게 꽃을 피운다.
개망초꽃이 시대를 아는가? 농민이 버리고 떠난 논과 밭에, 마음 떠난 빈 집에 숲을 이루었다. 개망초꽃이 떠난 사람들의 한의 표출이라면 올해는 그들의 한이 한 층 더 깊은 모양이다. 떠난 사람들의 한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시대의 절규처럼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었다.
개망초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꽃을 피운다.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 버린 땅에서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은 개망초꽃을 보면서 푸근하지만은 않은 것은 떠난 자리에 피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온 천지를 하얗게 지천으로 피어난 개망초꽃은 무엇으로 피었을까? 소망일까, 한일까. 원망일까, 절망일까. 아니, 누군가의 절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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