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섬초롱꽃 인연

느림보 이방주 2016. 6. 23. 14:47

섬초롱꽃   인연


2016년 6월 2일

아파트 정원에서


아파트 정원 담 너머에 섬초롱꽃이 피었다. 이름이 섬초롱꽃이라 섬에나 피는 줄 알았더니 우리 아파트에도 피었다축대로 쌓은 커다란 돌 위 한 줌밖에 안 되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가뭄을 견디어 꽃까지 피운 것이다. 꽃은 한두 송이가 아니다. 밑동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렸다. 하얀 초롱에 박힌 보라색 점이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 가루를 뿌린 듯 화려하다. 그 중 한 가지는  밑동이 꺾여 쓰러진 채로 꽃을 피웠다.


주변의 흙을 모아 북을 주어 대궁끼리 서로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세워 주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어찌하나 했지만 섬돌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세찬 바람에 꽃을 피워 섬사람들의 마음에 초롱불을 밝혀준 공덕이 있는 꽃을 믿어볼 만했다. 마음은 자꾸 돌아 보이는데도 매정하게 돌아선다.


돌아서서 정원에서 나오려는데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붉은색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려 온다. 라면 봉지였다. 다시 분리수거장에 갖다 놓으려고 집으려 하니 숨바꼭질하듯 요리조리 피해 달아난다. 그러다가 작은 단풍나무의 버팀목 사이로 들어간다. '이젠 됐다'하고 집어 들고 일어서다가 버팀목에 머리를 '콩'하고 부딪쳤다. 순간 '이런 이런 재수 없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문득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초롱꽃만 보지 않았다면", "라면 봉지만 줍지 않았다면", "나무에 버팀목만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섬초롱꽃에서 시간을 끌었기에 라면 봉지를 만났고 그걸 줍다가 버팀목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섬초롱꽃을 보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머리를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연因緣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과 연에 의해서 또 하나의 인연이 일어난다. 인이란 내가 지은 것이고 연이란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섬초롱꽃에 북을 주느라 시간을 끌거나 라면봉지를 주우려고 머리를 구부린 것은 인이라면, 섬초롱꽃의 거친 환경이나 버팀목의 존재는 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나타난 것이다.

'액땜'이란 말이 있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업보는 언젠가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인연이고 연기라면, 오늘 머리를 부딪치는 것으로 '액땜'을 한 것이다. 과거에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대하여 그만한 업보를 받아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는데 머리 부딪치는 것으로 땜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던 말씀이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구나. 만약에 섬초롱꽃에 북을 주지 않고 돌아섰다면 라면봉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라면봉지를 만나지 못했으면 머리를 부딪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언젠가 더 큰 화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연은 복으로 올 수도 있고 재앙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또한 저것도 멸한다.

-佛說長阿含經大本經下中 十二緣起에서-

 

섬초롱꽃은 울릉도가 원산지라고 한다. 그렇게 멀리서 여기까지 와서 내게 복 짓는 일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다가올 화가 소멸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016.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