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 생일상
2016년 6월 18일
선영 부모님 묘소에서
생일이다.
아내의 도마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렇구나. 오늘이 생일이었구나. 문득 어머니가 그립다. 엊그제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전쟁 중에 무거운 몸으로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이틀만에 나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를 뵈러 30리를 달려갔다. 일꾼들도 나오지 않은 들이 고요하다. 봉분에 새끼 망초들이 한 뼘씩 자랐다. 그놈들이 잔디가 마실 이슬도 받아 마시고 맑은 바람도 차지해서 잘도 자랐다. 잊어버린 마음자리에나 나는 망초 새끼들을 다 뽑아 버렸다. 이것들아, 내가 어떻게 잊어버리겠느냐. 객지에 나가 있을 때 저녁마다 내 밥을 떠 놓고 기다리던 어머니를 어찌 잊을까. 여덟 남매 키우느라 달고 맛난 것은 자식에게 밀어 놓고 상하고 거친 것만 자셔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던 어머니를 어떻게 잊을까.
허리를 펴고 일어서다 보니 제절에 인동덩굴이 꽃을 피웠다. 제절을 넓히느라 쌓은 석축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 사이를 비집고 하얀 꽃 노란 꽃을 예닐곱 송이나 피웠다. 음력 오월 열나흘, 주변에 무성했던 인동꽃이 이미 시들어 다 떨어졌는데 때늦어 피어난 꽃이 반갑다. 무관심한 아버지, 넉넉지도 않으면서 크기만 했던 종부의 살림살이, 시증조부까지 층층시하, 여덟 남매 키우느라 일평생이 엄동설한이었다. 모진 풍상을 다 견디고 견디어 '후유―' 한숨 내쉴 수 있을 때쯤, 중병 얻어 이승의 강을 건너셨다. 엄동설한을 다 견디어 피워낸 꽃이 반갑다.
스산한 마음 가눌 길 없어 제절을 서성거리는데 비석 지나 제절 너머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었다. 축축 늘어진 덩굴딸기다. 해넘이에 밭일 끝내고 돌아오시면서 칡잎으로 접은 고깔에 빨갛게 익은 딸기를 한 움큼 건네주셨다. 달고 오돌오돌하게 톡톡 터지는 그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생일이면 절구에 수수를 빻아 수수팥떡을 만들어 주셨다. 장가들어 성가해서도 미역을 사가지고 오셨던 어머니, 오늘은 푸짐한 딸기 생일상을 마련하여 나를 기다리셨을까. 이른 새벽 달려오기를 참 잘했구나.
도래석을 비집고 여기저기 댕댕이덩굴이 서너 뼘씩이나 늘어졌다. 며칠 전에 다 뽑아냈는데도 기를 쓰고 뻗어간다. 어머니는 댕댕이덩굴을 끊어 모았다가 긴긴 가을밤이면 어두운 마루에 앉아 소쿠리도 만들고 채반도 만들었다. 두어 말 들이 커다란 보구리도 만들고 허리에 차는 조그만 다래끼도 만들었다. 가끔씩 사랑채 지붕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흥얼흥얼 푸념도 섞으면서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을 삭이셨다. 징글징글하다던 아버지 곁에 누웠으니 지금도 댕댕이덩굴로 더듬더듬 무엇인가 만들면서 끓는 애간장을 녹이실까.
산딸기를 두어 개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톡 터지면서 씨가 오도독 씹히는 감각이 예나 다름없다. 어리석은 막내는 어머니가 차려준 생일상이 달고도 달다. 아니 시디시다. 태중에서도 엄마에겐 고통스런 짐이었던 나를 생각하니 쓰디쓰다. 그 신산한 맛을 이제 알아본다.
(청탁원고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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