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국어교육의 등대 -연수를 마치며-

느림보 이방주 2003. 7. 22. 21:28
김 교수님!
교수님과 선생님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後生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先成者에 대한 최소의 예우를 담은 마음으로 김 교수님을 불러 봅니다. 학급 담임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 선생님'이라 불렸을 때 좋았던 기분을 뒤로 하고 말입니다.

연수 첫날, 현관에 붙은 대자보에서 '민족 ○○대, 참교육 사범대'란 표지를 보고 이 대학에서 강의라고는 1급 정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연수 외에는 받아본 일이 없는 저로서는 참으로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첫날 어떤 교수의 첫 강의를 듣고 '그러면 국어교육과 앞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어야 하나'하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일선에서 국어교육과를 가도록 설득하여 보냈던 내 자신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날까봐 식당에서나, 복도에서나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연수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인가 김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지금까지 국어 교육에 대한 잘못되었던 생각이 한 순간에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국어 교사가 되었을 때는 민족 문학이니, 민족 의식 교육이니, 하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제에 짓밟힌 우리의 가치를 부활하기에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청동경을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러나 한때, 국어 교과는 도구 교과이므로 언어사용 능력을 신장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지, 지나치게 이상주의에 빠지는 것은 국어 교과를 정치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는 기막힌 말에 내가 정말 촌스러운 국어 교사였다는 자괴지심에 빠졌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옛날 선생을 찾아온 국어교육과 학생에게 '배달 만족이기를 거부한 놈이 무슨 민족의식 교육을 하겠느냐'고 꾸짖던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언어사용 능력 신장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아이들이 아무런 의식도 없이, 아무런 가치 척도도 없이, 독해의 기계로, 청해의 기계로, 작문의 기계로, 말하는 기계로 만드는데 열을 올린 것 같아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노랑머리 국어교육과 제자를 나무라고 민족의식을 심어왔던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새로운 거울에서 비쳐보았습니다. 김 교수님의 강의에서 '민족'이라는 심장으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것이 진정한 언어 능력이라는 나의 생각이 옳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옛날의 나로 돌아가 민족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다시 할 수 있었던 것도 김 교수님의 타는 심장에서 쏟아지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장 국어 교육의 지남차인 김 교수님,
김교수의 열정에는 뜨거움만 존재하지, 차가운 이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국어 교육이 지향해야할 정남방은 어느 곳입니까? 오늘날 사범대학의 교수들은 비판만 있지 남쪽 가리킬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대안이 없는 비판은 푸념이고 넋두리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나는 일개 시골 군청소재지 인문학교 국어교사이지만 지나온 과거 국어 교육을 반성하면서 메아리조차도 없을 것이 뻔한 하소연을 김 교수님께 소리쳐 보고 싶습니다.

먼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찾는 국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은 과연 무엇입니까? 조선시대 이 나라 사람들이 신앙처럼 믿고 따르던 유교 사상입니까? 유교 사상은 양반을 위한 이념이라고, 윗사람만을 위한 빌미라고, 군주는 충신이라는 허울을 주고 忠을 바꾸어 가졌고, 부모는 효자라는 옷을 주고 孝를 바꾸어 가졌고, 지아비는 열녀라는 사탕으로 烈을 바꾸어 가졌고, 양반은 忠直이라는 엿을 먹이고, 종을 부렸다고 비판을 받는 그 몹쓸 유교 이념이 우리를 묶는 구심점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이미 아니라고 이른바 신시대 신문학을 하던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그러면 불교입니까? 아니면 민족의 과거를 부정하고 경멸하는 기독교입니까? 야소가 부활해서 우리 민족의 손을 몇이나 잡아 들어올려 주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인지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며 살아왔습니다. 유교적 이념은 물론이고, 우리의 가슴속까지 뼛속까지, 손끝까지 발끝까지 스며있는 토속 신앙도, 조상 숭배도 부정했고, 단군도 우상이고, 마을 앞 장승도 톱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눈먼 대장 기러기가 소리친 '세계화'는 이미 이념이 없이 따르는 다른 기러기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말도 익히기 전에 외국어 학원에 나가 코쟁이에게 성조기 그리기를 배워서 우리를 세계 속에 아무렇게나 내동갱이쳐지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세계는 곧 어디인가요? 우리가 하는 교육이 길 잃은 기러기들에게 '그것은 미국이다'라고 잘못 이끌고 있는 건 아닙니까? 미국을 중심으로 우리를 재고,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를 재는 교육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과거를 인정하고, 과거의 가치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가치 있는 현재에 서서 미래를 설계하게 하는 국어 교육이 되어야겠습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가치 기준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교수의 강의 시간인지 '우리 근대 문학의 기점이 어디냐' 묻는 물음에, 무식하면 용감한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언뜻 '영·정 시대'라고 대답했다가 웃음을 샀습니다. 저는 황당했지만 기가 죽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고소설론 시험에서 '연암 소설에 대해 쓰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근대문학의 기점이 그 강좌를 맡은 교수의 말대로 갑오경장이라는 말도 옳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문학에 있어서 '근대'는 무엇입니까? 서구 문화의 유입이 근대입니까? 기독교가 일반화되는 것이 근대입니까? 양반, 유교, 같은 것들이 무너지는 것이 근대입니까? 이광수의 사랑만이 자유 연애고, 춘향이의 사랑은 자유 연애가 아닙니까? 윤지경이 최소저를 사랑해서 임금에게 저항한 것은 자유 연애가 아닙니까?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만이 근대사상이고 연암의 현실 비판은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인가요? 아니, 이미 梅月堂은 그의 남염부주지에서 '蓋國者民之國也, 라고 서구를 깨우친 것을 잊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근대를 찾는 것이 곧 우리의 가치 기준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님, 교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심점과 가치를 찾아 주실 사명을 가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고유 문화와 고유 사상과 우리 스스로 찾은 '근대'가 담긴 문학 작품을 찾아서 교재로 삼고, 우리를 기준해서 우리의 가치를 평가하고, 세계를 보는 안목을 길러서, 세계에 의지하는 미래도 아니고, 아집에 얽매인 미래도 아닌 능력 있는 아이들을 기르는 동안 언어사용 능력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보면 국어 교육은 언어사용 능력 신장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학 작품을 통하여 인간교육, 가치 교육을 이루어내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김 교수께서는 未堂 서정주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문학적 진실과 인간적 진실은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로 충격이고 충격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말이 맞는다면 문학 작품을 통해서 인간을 교육하고 올바른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던 김 교수님의 말은 어떻게 자가당착이 아니라고 설명하겠습니까? 문학 작품에 담겨 있는 삶의 모습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진실에서 가치를 찾아, 아이들이 제것으로 만들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제 생각은 아주 틀린 것입니까.

또 교수님은 이 나라에 문학한다는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 모두 돈을 주고 '문인'이란 이름을 사서 '글씀네'하고 우쭐대는데 과연 이중에 문학사를 바꿔놓을 수 있는 문인이 몇 명이나 되냐고 비아냥거려서 몇 달 전 수필가로 등단한 저를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그런 문인들 때문에 이 땅의 문학이 지켜지고 있는 열악한 문단에 교수로서 힘을 보태줄 수는 없습니까?

교수님, 이 땅의 국립 사범대학 교수들 중에 교과교육을 연구하고, 교육 현장에 가치 있는 교육 이론을 제시하고, 훌륭한 교사를 배출하면서 지역 중등 교육의 산실이라는 제 역할을 올바로 하는 진정한 교수가 몇이나 되냐고 반문하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과연 이 땅의 국립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중에 우리 국어교육사의 한 귀퉁이라도 차지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라고 반문하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미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교육과정이나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비겁한 교수라는 비판은 어쩌시겠습니까?

다음으로 국어 교육의 평가 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평가는 교과 교육의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현재 국어 교과 교육의 결과의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마다 이루어지는 형성 평가, 정기 고사, 모의 고사가 있고, 국가에서 실시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의 모든 평가는 어쩔 수 없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평가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민족정신을 국어 교육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김 교수님,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김교수께서도 출제에 참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국어 교과의 모든 영역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못하겠지요. 여건이 그렇지 못하니까요. 또 그것은 국어 교과가 아니라, 언어 영역이라는 다른 옷을 입었으니까요. 그래서 교실 현장에서는 말하기도, 쓰기도, 듣기도 팽개치고, 다만 의미도 모르는 글의 요지만 찾는 훈련을 시키고, 또 훈련시켜 독해하는 로봇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문학 작품은 얼마나 실렸습니까? 수학능력시험 문제에는 문학이 과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현장에서는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래서 저희 교사들은 설 땅이 없습니다.

평가의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겨우 수행 평가 방법이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교실에 50명씩 집어넣고, 한 교사가 200명씩 맡아서 수행 평가를 하라니 신이 아닌 저희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문학 작품을 위주로 교육하고 작품 감상 능력, 창작 능력, 비판 능력, 토론 능력 등을 평가하는 방법을 교육 연구가들이 창안하여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립사범대학 교수님들에게 기대를 걸어 봅니다.

존경하는 김 교수님! 이제 휘갑을 치겠습니다.
저는 한 번도 학문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존경하지 않는 교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학문적 열정만은 존경하고, 민족 문학 교육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만은 존경합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대로 한국국어교육사의 한 면을 장식할만한 학문적 업적을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여러 가지로 모자란 저는, 사범 대학을 나오지 못했으면서도 먹고살기 위해서 감히 국어 교사가 되었는데, 이십여 년 국어 선생을 하다 보니, 애착이 생기기도 하고 바늘구멍 만한 겨를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국어 교육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우왕좌왕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희미한 샛별 등대를 찾았나 봅니다. 그래서 주제넘게 이렇게 주접을 떨었나 봅니다. 모자란 소견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저의 소견이 잘못된 것이라면 깨우쳐 주십시오. 또 손끝이 무디어 매끄럽지 못한 글은 시간이 충분히 없어 서둘러 그러려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무지로 인하여 교수님과 이 땅의 모든 사범대 교수들에게 누가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민족 ○○대, 참교육 사범대'라는 학생들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저의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1999. 1. )

* 蓋國者民之國, 命者天之命也. 天命已去, 民心已離, 則雖欲保身, 將何爲哉?" (김시습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중 남염부주지에 나오는 한 구절임 여기서 김시습은 자신의 정치에 관한 소신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음 : 대개 나라는 백성의 나라고 명은 하늘의 것이다. 하늘의 명이 이미 떠나고 백성의 마음이 이미 떠나면, 임금이 비록 자신을 보전하려하나 장차 어떻게 보전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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