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아저씨

느림보 이방주 2001. 3. 16. 20:41
내가 처음 '아저씨'로 불린 것은 교복을 막 벗었을 때이다. 입을 옷이 마땅하지 않아 형님 양복을 걸치고 다녔는데, 골목에서 만난 젊은 부인들이 유달리 숙성해 뵈는 나를 '아저씨'하고 불렀다. 그 때마다 물고기를 움키려다 반쯤 썩은 쥐를 움켜쥐었을 때처럼 속이 뒤틀렸다.

그런데, 스물 몇 살 철부지로 선생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꼬박꼬박 '선생님'하고 불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내게 아랫목을 권했고, 으레 첫잔을 내게 주었다. 길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멈춰서서 허리를 공손히 굽히고 절을 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혹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으로 보였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렇게 나를 실속없이 오만(傲慢)한 두꺼비로 만들었다. 하늘을 향해서 열리는 이상한 고추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커가는 나의 오만은 '선생을 뭘로 아는거야'하고 내뱉을 정도로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갔다.

그런 오만으로 20년 선생을 했다. 그런데 남들이 불혹(不惑)이라고 하는 나이가 되어 필부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허름한 오막살이를 장만하고, 그 기쁨으로 새벽에 골목청소를 하는 내게 한 노파가 "이 아저씨, 명예 반장 시켜야 되겠네"하고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그 때도 오만한 나는 빨리 그 마을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맞이꽃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사람만이 살 것 같은 아파트에 이사했는데, 한 술 더 떠 이번엔 '403호 아저씨'가 되었다. 반장 아줌마나, 수위 아저씨가 모두 날 '403호 아저씨'로 불렀다.

그후 나의 전락(轉落)은 더욱 파국의 날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문학 모임에 나갔는데, 여자 회원 한 분이 내가 타고 간 차에 기대어 '무쏘 아저씨'하고 불렀다. 그건 참으로 '선생님'이라는 나의 오만에 황산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락이 아니다. 나는 이제 이웃집 아줌마의 눈에도, 여류 수필가의 눈에도 텁텁하고 무해무덕(無害無德)한 아저씨가 되어 있는 것이다. 순진한 초동(樵童)과 함께 할 수 있는 필부(匹夫)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세상은 온통 오만한 장부(丈夫)의 차지가 되었다. 아니, 스스로 장부로 착각한 졸장부들의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까맣게 높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렇고, 심지어 그들의 아들이나 아내까지 높이 쳐든 턱 위로 안경알을 번뜩여 성한 사람을 실없이 웃게 만든다. 나를 '아저씨'하고 불러 오만에서 벗어나게 해준 그 '아줌마'가 고맙기만 하다.

(1999. 9. 21. 충청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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