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한글 오백년

느림보 이방주 2005. 4. 26. 22:20
 

한글이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쓰기 쉽고 과학적이며, 우리 말소리를 표현하기 적절하다는 정도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 ‘왜 과학적이냐’, ‘제정 과정이 왜 창조적이냐’를 물으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글의 훌륭한 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몇 가지만 나열해 보기로 한다. 우선 한글은 세종대왕(諱 : 李祹)이 정치 지도자의 자격으로 기획하고, 언어학자의 자격으로 추진한 하나의 문화정책이었다. 그는 집현전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을 한글 제정에 관한 계획과 연구의 중심이 되게 하고, 자신도 연구원의 핵심이 되었다. 한글을 제정하고 나서는 언문청이라는 전문기관을 설치하여 훈민 정음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다음으로 제정 동기가 민본정신에 바탕을 두는 점이라고 하겠다. 문자 생활의 이중성이라는 모순으로 상층계급만이 누리던 문화의 그릇을 모든 민중에게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글의 창제로 인하여 문화의 보급이 한층 빨라지고, 훗날 자생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우리말에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말소리를 분석하여 우리말 음운 체계를 정리하고, 거기에 맞는 글자를 제정하였는데, 당시에 여건으로 음운체계 정리의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 제정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의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三極)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과 양(陽)을 말하는데, 우주의 일체 사상(事象)은 삼재와 음양을 벗어나서 생성할 수 없기에 인간의 성음(聲音)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원리다. 그래서 음의 분석이나 글자의 모양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이었다. 이런 철학적 배경 아래 자음은 조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먼저 기본자를 정하고, 발음기관을 본떠 기본자를 만들고 음의 성질에 따라 가획자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오묘한 한글 제정의 원리를 보통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만이 눈에 보이고, 보이는 사람만이 진정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라도 7차 교육과정에서는 국민공통과정에 삽입하여 국자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국민으로 가르쳐야 하겠다.

(1999. 10. 14.충청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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