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신문의 광고를 현란한 언어로 장식하는 것이 마늘 이야기이다. 광고라는 것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인쇄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꼼꼼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남성'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요즈음 약이든 식품이든 '남성'에 관련되는 단어만큼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니 고개 숙인 남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자의든 타의든 아내에게 주도권을 거의 이양한 '고개 숙인 남자'들은 '고개 숙인 남성'이 바탕에 깔린 원인 아닌 원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는 마늘의 알라신 성분은 신경 안정 작용을 하기도 하고,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한다. 또 일종의 강장제인 마늘은 활력에 강력한 효과를 지니어 음욕(淫慾)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도 마늘을 먹으면 발음(發淫)하고 마음 속에 화가 생긴다고 하여, 오훈채(五暈菜:마늘, 달래, 무릇, 김장파, 실파)의 하나인 마늘을 수도(修道) 과정에서는 먹기를 금하고 있다. 이것은 마늘이 음성(淫性)을 강화시켜 수련을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속에서는 마늘의 독특하고 강한 향기가 악귀나 액(厄)을 쫓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악귀나 액(厄)도 따지고 보면 발음(發淫)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신화에서는 사제자(司祭者)가 입사자(入社者)를 황홀경에 이끌어 들이기에 사용한 신령스런 약을 상징한다. 여기서 황홀경이라 함은 일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늘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문화, 민속, 사고, 이념의 원형인 단군신화로부터 비롯한다. 단군신화는 우선 정치의 개념과 목적을 밝혔다. 그런데 정치의 목적이 오늘날로 말하면 교육의 그것과 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것은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어' '환인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고' '환웅이 강림하여 인간 세계를 교화하였다.'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 '천하'라는 것은 인간 세계이고 여기에 인간 중심 사상이 담겨 있으며, '뜻'이라는 것은 '다스림'에 있을 것이고, '다스림'이 '교화'로 드러난 것을 보면, 정치의 목적이 교육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 곰이 '사람되기를 빌었다.'고 한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던 교육에 대한 치열한 소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을 받고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소망이라고 생각하면 현대에 못지 않은 교육열이다. 사람다운 사람의 의미에 대하여도 빼놓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하는' 것이다. 즉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육의 방법으로 효과를 거둔 것이 마늘이다.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마늘'과 '쑥'의 효능을 빌린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람이 되기 위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본다. 마늘은 매운맛이니 '辛'이라면, 쑥은 쓴맛이니 '苦'이다. 두 글자를 합하면 '辛苦'가 되니까 사람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는 辛苦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곰 같은 사람(동물적인 사람)이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수성(獸性:동물적 본능)을 쑥과 마늘로 제거하고 자기절제를 할 줄 알고 공익에 종사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마늘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문화의 원형인 단군 신화에서 마늘은 수성을 제거하는데 중요한 한 몫을 하였다. 즉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입사자가 제정일치 시대의 성스러운 제사장으로부터 받아 자신의 수성을 제거하는 성스러운 성체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신화나 민속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삶이나 수도 과정을 돌이켜 보면 마늘은 쓸 곳과 쓰지 않을 곳을 가려서 사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통을 이기고 성스러운 곳에 사용하고 발음에는 사용을 삼가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가장 축복 받은 것은 성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성의 자유를 베풀어 은혜를 내리면서 스스로 동물적 본능을 자제하여 품위 있는 성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므로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은 성에 대한 철저한 규범과 성에 대한 최대한의 절제가 아닌가 한다. 현대에도 그것은 품위를 갖추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우주의 자율적 규제라 생각한다.
이러한 격조 높은 성문화를 어기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신은 그런 인간들에게는 성의 자유를 박탈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개 숙인 남성'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른다. 마늘에 대한 낯뜨거운 광고는 그런 죄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박탈당한 성을 다시 찾기 위한 몸부림 같아서 안쓰럽다.
수성을 제거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교육의 한 과정으로 성스럽게 여겨졌던 마늘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성을 회복하는, 다시 말하면 '사람이 곰이 되기를 비는' 영약(?)으로 광고되고 있으니, 이건 '굴'이라는 성역에서 웅녀가 수성을 씻어내는 입사의 신령스러운 약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 같아 안쓰럽다.
(2003. 4. 7.)
한방에서는 마늘의 알라신 성분은 신경 안정 작용을 하기도 하고,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한다. 또 일종의 강장제인 마늘은 활력에 강력한 효과를 지니어 음욕(淫慾)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도 마늘을 먹으면 발음(發淫)하고 마음 속에 화가 생긴다고 하여, 오훈채(五暈菜:마늘, 달래, 무릇, 김장파, 실파)의 하나인 마늘을 수도(修道) 과정에서는 먹기를 금하고 있다. 이것은 마늘이 음성(淫性)을 강화시켜 수련을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속에서는 마늘의 독특하고 강한 향기가 악귀나 액(厄)을 쫓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악귀나 액(厄)도 따지고 보면 발음(發淫)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신화에서는 사제자(司祭者)가 입사자(入社者)를 황홀경에 이끌어 들이기에 사용한 신령스런 약을 상징한다. 여기서 황홀경이라 함은 일상적인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에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늘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문화, 민속, 사고, 이념의 원형인 단군신화로부터 비롯한다. 단군신화는 우선 정치의 개념과 목적을 밝혔다. 그런데 정치의 목적이 오늘날로 말하면 교육의 그것과 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것은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어' '환인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고' '환웅이 강림하여 인간 세계를 교화하였다.'고 한데서 발견할 수 있다. '천하'라는 것은 인간 세계이고 여기에 인간 중심 사상이 담겨 있으며, '뜻'이라는 것은 '다스림'에 있을 것이고, '다스림'이 '교화'로 드러난 것을 보면, 정치의 목적이 교육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 곰이 '사람되기를 빌었다.'고 한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던 교육에 대한 치열한 소망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육을 받고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소망이라고 생각하면 현대에 못지 않은 교육열이다. 사람다운 사람의 의미에 대하여도 빼놓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하는' 것이다. 즉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육의 방법으로 효과를 거둔 것이 마늘이다.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마늘'과 '쑥'의 효능을 빌린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람이 되기 위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본다. 마늘은 매운맛이니 '辛'이라면, 쑥은 쓴맛이니 '苦'이다. 두 글자를 합하면 '辛苦'가 되니까 사람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는 辛苦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곰 같은 사람(동물적인 사람)이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수성(獸性:동물적 본능)을 쑥과 마늘로 제거하고 자기절제를 할 줄 알고 공익에 종사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마늘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문화의 원형인 단군 신화에서 마늘은 수성을 제거하는데 중요한 한 몫을 하였다. 즉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입사자가 제정일치 시대의 성스러운 제사장으로부터 받아 자신의 수성을 제거하는 성스러운 성체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신화나 민속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삶이나 수도 과정을 돌이켜 보면 마늘은 쓸 곳과 쓰지 않을 곳을 가려서 사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통을 이기고 성스러운 곳에 사용하고 발음에는 사용을 삼가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가장 축복 받은 것은 성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성의 자유를 베풀어 은혜를 내리면서 스스로 동물적 본능을 자제하여 품위 있는 성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므로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은 성에 대한 철저한 규범과 성에 대한 최대한의 절제가 아닌가 한다. 현대에도 그것은 품위를 갖추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우주의 자율적 규제라 생각한다.
이러한 격조 높은 성문화를 어기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신은 그런 인간들에게는 성의 자유를 박탈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개 숙인 남성'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른다. 마늘에 대한 낯뜨거운 광고는 그런 죄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박탈당한 성을 다시 찾기 위한 몸부림 같아서 안쓰럽다.
수성을 제거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교육의 한 과정으로 성스럽게 여겨졌던 마늘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성을 회복하는, 다시 말하면 '사람이 곰이 되기를 비는' 영약(?)으로 광고되고 있으니, 이건 '굴'이라는 성역에서 웅녀가 수성을 씻어내는 입사의 신령스러운 약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 같아 안쓰럽다.
(200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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