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불의 예술(멋)

흙의 상생법

느림보 이방주 2003. 4. 4. 14:04
흙에 대하여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이라고 모순된 相生의 원리를 적나라하게 읊은 시인이 있다. 인간의 실존적 존재의 고뇌에 착상한 시인 오세영님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五行의 相生 원리를 생각한다.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라는 흙에서 시작해서 트랙을 한 바퀴 돌 듯 온전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완전 상생의 원리를 떠올린다. 곰이 굴속에서 먹고 웅녀가 되었다는 쓰고 매운 쑥과 마늘 같은 고통과 시련을 견디고, 모두 이룬 후에는 결국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과 그릇의 '이룸'과 '무너짐'의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것을 '모순'이라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사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이룸'이고 무엇이 '무너짐'인지 나의 얇은 사고로는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행 상생법에서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일반적 법칙을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이면 어떠냐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金, 水, 木, 火, 土 중에서 다른 모든 것을 한 아름으로 안고 있는 것은 흙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곧 오행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흙이라는데 누가 쓸데없이 딴지를 걸겠는가?

또 흙이 다른 모든 것을 한 울로 안고 있다는 이러한 사고는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서는 '脣音'계열인 'ㅁ,ㅂ,ㅍ'을 '土性'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입술이 모든 조음기관을 머금고 있는 것은 흙이 만물은 안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후음을 '水', 어금닛소리를 '木', 잇소리를 '金', 혓소리를 '火'로 그 소리의 느낌과 견주어서 설명하였다. 입이 모든 조음 기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역시 탁월한 사고이다.

흙의 모순은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그릇으로 빚어진다는 것이다. 흙을 이기고 다지고, 두드리고 주물러서 만든 그릇이 불가마에 들어 잘 익은 홍시처럼 고통을 견디어 모두 이루어낸 가장 영광된 순간에 깨어져 흙이 되는 파멸의 아름다운 모순은 인간의 삶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릇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흙으로 빚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으로 빚어진 만물은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에 흙으로 돌아간다. 불경이나 창세기 같은 신화의 힘을 빌지 않아도 '흙의 모순'은 세상의 원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 창세기를 겉으로만 보면 누구나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를 바라보는 눈으로 깊이 사색하면 어길 수 없는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물을 마신다. 土生金, 金生水니 우리가 마시는 물의 근원은 곧 흙이다. 우리는 밥을 먹고, 김치를 먹고, 미역국도 먹는다.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이니 밥, 김치, 미역의 근원도 흙일 수밖에 없다. 고기도 먹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겠지만, 고기의 근원은 사람과 같으니까 역시 흙이 뿌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말은 天神이나 太陽神을 숭배하던 옛사람의 사고를 신성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말은 내가 얘기하고자하는 '흙의 생성법'과는 무관한 얘기지만 결국 오행 상생법의 첫 가동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예술품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생기를 얻는다고 생각하면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돌아가는 곳은 결국 어디일까? 거기는 바로 우리가 밟고 서 있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숨소리도 흙으로 스미고, 우리의 허튼 말소리도 땅 속으로 스민다. 우리가 더럽다는 모든 유형 무형의 배설물들이 땅으로 스며 흙이 된다. 우리가 알뜰히 쓰고 남은 고운 찌꺼기는 땅을 기름지게 하지만, 더럽게 쓰고 헤프게 버린 것은 땅을 더럽힌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의 나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의 육체는 이미 땅 속으로 스민 지 오래다. 우리의 신체는 날마다 조금씩 흙으로 돌아간다. 머리카락이 홀홀 날려 흙으로 돌아가고, 살갗도 한 껍질씩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이룬 만큼 우리는 날마다 흙으로 되돌린다. 하루도 흙이 내가 되지 않는 날이 없고, 내가 흙이 되지 않는 날이 없다.

'모순의 그릇' 뿐만 아니라, 흙은 이렇게 살며 이루어온 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 삶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떤 흙으로 돌아갈까? 아니, 어떤 흙이 될까? '모순의 그릇'처럼 '모순의 삶'의 최후가 궁금하다.
(200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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