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토우(土偶)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도예가이며 토우 작가인 김용문님의 작품이다. 곱고 차진 황토로 빚어 만든 작은 인형 모양이다. 혼자 있을 때에는 금방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이 저절로 배어 나온 그의 슬픔을 바라보며 씁쓸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고운 황토 한 두어 줌을 물에 차지게 이겨 손으로 주물러서 온갖 아픔을 얼굴 가득 담아낸 명품이다. 약간 일그러졌으나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있고, 도톰한 입술이 약간 헤벌어진 입은 그냥 천진한 울상이다. 오른손으로는 일그러진 볼을 어루만지고, 좀더 길어 보이는 왼팔 그리고 근육의 움직임이 힘있게 드러나는 왼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콧물까지 훔치는 표정이다. 이마는 좁고 턱은 넓은 역삼각형 모양의 얼굴은 금방 산골짜기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다 내려온 듯한 토종 한국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찡그린 눈, 삐뚤어져 벌어진 입, 쳐진 아래턱이 삶의 온갖 고통을 혼자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깊게 패인 눈자위, 그의 뭉그러진 콧잔등, 그의 헤벌어진 입술의 깊은 골짜기에서 꾸역꾸역 수몰민이 눈물을 훔치며 걸어나올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신라에서부터 내려온 토우를 바탕으로 한다. 본래 토우는 5,6세기경 신라에서 무덤에 껴묻기 용으로 유행했다.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믿음이 컸던 신라인들이 풍요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등의 주술적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신라 토우는 크기가 5cm에서 9cm 가량 되는데, 김용문님의 이 작품은 한 14, 5cm쯤 된다. 크기는 약간 다르다 하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절제된 모습이면서도 내면을 표출시킨 세련된 모습은 옛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고통을 추상화한 얼굴 표정이나, 철저하게 생략하여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해 보이는 고뇌하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꾸밈없는 내면의 표출이라 생각되어 들여다 볼 수록 가슴 아프다.
특히 신라의 토우는 다산을 소망하는 뜻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나, 성적인 표현을 한 것이 많다. 특히 여성의 유방, 엉덩이, 허리 등을 풍만하게 과장한 나체상이 많다. 이것은 생식 능력과 여성의 생산성을 신성시했던 신라인의 사고와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신라의 토우에 한국인의 현대적 고뇌를 담는데 성공한 김용문씨와의 만남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열정적으로 도예 수련에 빠져 있을 때라고 생각된다. 도예가인 그가 토우 제작에 몰두하게 된 것은 아마 수몰지역인 단양과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통 도예지인 방곡리에 은거하면서 도예 수련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충주댐 공사로 수몰 직전의 단양은 거리나 건물이나 사람들의 표정이나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예술인의 측인지심이 머잖아 고향을 떠날 단양 사람들의 스산한 표정을 토우에 담아 형상화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날 지금은 물 속에 들어간 구단양 하진 나루에서 토우의 수장제가 있다는 얘길 듣고 강가로 나갔다. 금수산을 넘는 해넘이의 황홀한 빛으로 물든 남한강 둔치에는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강둑에 서성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을에 언뜻언뜻 비치는 주인공은 허름한 두루마기에 황토 물에 얼룩진 듯한 헝겊 조각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수염까지 덥수룩한 젊은 사람이었다.
굵은 자갈밭 위에 격식 없는 제상이 놓이고, 그 주변에 작은 흙덩이처럼 보이는 토우 작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가까이 가서 보니 하나하나 모두 다른 각색의 표정들로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초로 군청 소재지가 수몰되고, 힘없는 민중이 고향을 잃고 떠나야 하는 핍박의 아픔을 담은 모습이었다.
제가 끝나자 가슴을 찢는 듯한 사물의 절규와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토우를 강물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수몰민들의 고통과 서러움과 원한의 아픔으로 빚은 흙덩어리들이 강물 속에 잠기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아픔이 물에 잠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아주 먼 훗날, 이날이 전설처럼 생각되는 그 날에, 이날 묻힌 고뇌의 흙이 건져 올려지는 날, 과연 그들이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은 오늘의 원통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신라인들이 그들의 소망을 흙에 담아 땅에 묻었듯이, 오늘의 고뇌를 물에 장사지내는 이날을 무어라고 일컬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저 다만 역사의 한 단면으로 객관화될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잡초처럼 솟은 수염발 사이로 보이는 이방의 한 예술인이 이 고장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회색으로 숨을 거두는 하늘에 반사되는 하진 나루의 은빛 물결을 돌아보며 발길을 옮겼다.
그날 강물 속에 수장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 토우들의 갖가지 표정을 떠올리면서 흙으로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신화는 흙을 빚어 인간의 육신을 만들었다지만, 흙으로 인간의 오묘한 마음까지 빚어내는 도예가의 신화를 뛰어넘는 예술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 愛惡慾)을 창조적 주체로서의 예술가의 숨결로 불어넣어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이 언덕 이 물에는 재울 한(恨)도 많고, 우리 삶의 치욕마다 깨울 혼(魂)도 많이 있네. 재울 한 깨울 혼, 이 손으로 모두 모여, 혼 깨워서 한 재우고 한 재워서 혼 깨우면, 이 몸이 눈물에 풀려 뜨겠네. 흙을 빚어 토우를 만드는 뜻은 한을 풀어내고자 함이요.' 라 하여 흙으로 한을 빚는 의미를 한의 공동체적 의식과 함께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불과 흙 두어 줌으로 인간의 갖가지 내면을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선 신라인의 피를 이어받은 손이 아니면 안될 것이고, 대대로 밟고 살아온 살아있는 흙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또한 흙 속에서 살아온 수몰민에 대한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순간 순간 수없이 변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마음이 흙으로 빚어져 형상화될 수 있는 흙의 영적인 아우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흙의 예술'을 보면 예술은 경직된 관념이나 형식의 결합일 수 없으며 섣부른 논리의 주장이어서는 더욱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흙에서 만물이 생성하듯, 흙이 인간의 고통을 빚어내듯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가 밟고 있는 이 흙도 이 땅을 디디고 살아온 핏줄의 고통과 통한의 화신인 듯하여 발 아래가 뜨끔하다.
(2003. 4. 27.)
고운 황토 한 두어 줌을 물에 차지게 이겨 손으로 주물러서 온갖 아픔을 얼굴 가득 담아낸 명품이다. 약간 일그러졌으나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있고, 도톰한 입술이 약간 헤벌어진 입은 그냥 천진한 울상이다. 오른손으로는 일그러진 볼을 어루만지고, 좀더 길어 보이는 왼팔 그리고 근육의 움직임이 힘있게 드러나는 왼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콧물까지 훔치는 표정이다. 이마는 좁고 턱은 넓은 역삼각형 모양의 얼굴은 금방 산골짜기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다 내려온 듯한 토종 한국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찡그린 눈, 삐뚤어져 벌어진 입, 쳐진 아래턱이 삶의 온갖 고통을 혼자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깊게 패인 눈자위, 그의 뭉그러진 콧잔등, 그의 헤벌어진 입술의 깊은 골짜기에서 꾸역꾸역 수몰민이 눈물을 훔치며 걸어나올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신라에서부터 내려온 토우를 바탕으로 한다. 본래 토우는 5,6세기경 신라에서 무덤에 껴묻기 용으로 유행했다.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믿음이 컸던 신라인들이 풍요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등의 주술적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신라 토우는 크기가 5cm에서 9cm 가량 되는데, 김용문님의 이 작품은 한 14, 5cm쯤 된다. 크기는 약간 다르다 하더라도, 소박하고 단순하며 절제된 모습이면서도 내면을 표출시킨 세련된 모습은 옛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고통을 추상화한 얼굴 표정이나, 철저하게 생략하여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해 보이는 고뇌하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꾸밈없는 내면의 표출이라 생각되어 들여다 볼 수록 가슴 아프다.
특히 신라의 토우는 다산을 소망하는 뜻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나, 성적인 표현을 한 것이 많다. 특히 여성의 유방, 엉덩이, 허리 등을 풍만하게 과장한 나체상이 많다. 이것은 생식 능력과 여성의 생산성을 신성시했던 신라인의 사고와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신라의 토우에 한국인의 현대적 고뇌를 담는데 성공한 김용문씨와의 만남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열정적으로 도예 수련에 빠져 있을 때라고 생각된다. 도예가인 그가 토우 제작에 몰두하게 된 것은 아마 수몰지역인 단양과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통 도예지인 방곡리에 은거하면서 도예 수련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충주댐 공사로 수몰 직전의 단양은 거리나 건물이나 사람들의 표정이나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예술인의 측인지심이 머잖아 고향을 떠날 단양 사람들의 스산한 표정을 토우에 담아 형상화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날 지금은 물 속에 들어간 구단양 하진 나루에서 토우의 수장제가 있다는 얘길 듣고 강가로 나갔다. 금수산을 넘는 해넘이의 황홀한 빛으로 물든 남한강 둔치에는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강둑에 서성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을에 언뜻언뜻 비치는 주인공은 허름한 두루마기에 황토 물에 얼룩진 듯한 헝겊 조각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수염까지 덥수룩한 젊은 사람이었다.
굵은 자갈밭 위에 격식 없는 제상이 놓이고, 그 주변에 작은 흙덩이처럼 보이는 토우 작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가까이 가서 보니 하나하나 모두 다른 각색의 표정들로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초로 군청 소재지가 수몰되고, 힘없는 민중이 고향을 잃고 떠나야 하는 핍박의 아픔을 담은 모습이었다.
제가 끝나자 가슴을 찢는 듯한 사물의 절규와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토우를 강물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수몰민들의 고통과 서러움과 원한의 아픔으로 빚은 흙덩어리들이 강물 속에 잠기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아픔이 물에 잠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아주 먼 훗날, 이날이 전설처럼 생각되는 그 날에, 이날 묻힌 고뇌의 흙이 건져 올려지는 날, 과연 그들이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은 오늘의 원통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신라인들이 그들의 소망을 흙에 담아 땅에 묻었듯이, 오늘의 고뇌를 물에 장사지내는 이날을 무어라고 일컬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저 다만 역사의 한 단면으로 객관화될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잡초처럼 솟은 수염발 사이로 보이는 이방의 한 예술인이 이 고장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회색으로 숨을 거두는 하늘에 반사되는 하진 나루의 은빛 물결을 돌아보며 발길을 옮겼다.
그날 강물 속에 수장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간 토우들의 갖가지 표정을 떠올리면서 흙으로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신화는 흙을 빚어 인간의 육신을 만들었다지만, 흙으로 인간의 오묘한 마음까지 빚어내는 도예가의 신화를 뛰어넘는 예술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 愛惡慾)을 창조적 주체로서의 예술가의 숨결로 불어넣어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이 언덕 이 물에는 재울 한(恨)도 많고, 우리 삶의 치욕마다 깨울 혼(魂)도 많이 있네. 재울 한 깨울 혼, 이 손으로 모두 모여, 혼 깨워서 한 재우고 한 재워서 혼 깨우면, 이 몸이 눈물에 풀려 뜨겠네. 흙을 빚어 토우를 만드는 뜻은 한을 풀어내고자 함이요.' 라 하여 흙으로 한을 빚는 의미를 한의 공동체적 의식과 함께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불과 흙 두어 줌으로 인간의 갖가지 내면을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선 신라인의 피를 이어받은 손이 아니면 안될 것이고, 대대로 밟고 살아온 살아있는 흙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또한 흙 속에서 살아온 수몰민에 대한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순간 순간 수없이 변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마음이 흙으로 빚어져 형상화될 수 있는 흙의 영적인 아우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흙의 예술'을 보면 예술은 경직된 관념이나 형식의 결합일 수 없으며 섣부른 논리의 주장이어서는 더욱 곤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흙에서 만물이 생성하듯, 흙이 인간의 고통을 빚어내듯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가 밟고 있는 이 흙도 이 땅을 디디고 살아온 핏줄의 고통과 통한의 화신인 듯하여 발 아래가 뜨끔하다.
(2003.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