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6월 18일 맑음
6월 들어 일기장을 처음 만난다. 시간이 없는 건지 마음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위한 생활은 점점 잃어 가고 있다. 3월에 시작한 야학 때문에 그렇고, 사택에서 시작한 자취 생활 때문에 그렇다. 피로가 쌓여 죽을 지경이다. 밤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침에 몸이 천근이다. 보람? 보람이라고 하기에는 생활이 너무 비참하다.
교육장 시찰이 있다고 야간 수업을 중지하란다. 밤에도 시찰하는가? 교감이 담임하는 1학년 교실에 걸려 있는 호롱을 걷어 창고에 감췄다. 이 고장 교육장에게 이 고장 사회교육 현장을 내세우기는커녕 감추어야 한다. 그 분이 나의 이 야학을 교육 공무원의 본분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호통을 칠까? 긁어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거겠지. 편한 게 좋은 거니까. 어젯밤에는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이발사를 깨워 이발을 했다.
그래도 이 선생님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그는 아침잠이 많으니. 그 대신 점심 저녁 준비는 선배인 그이 차지다.
1974년 6월 20일 흐림
어제 교육장 시찰이 있었다. 작년에는 긴장되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신상에 무슨 문제가 따를 리도 없고, 1년만에 심상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이는 수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훈시를 했다. 우리가 언제 수업 소홀히 한 적이 있는가? 밤중에도 하는걸 아십니까?
하루가 지루하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 밥을 끓이고 반찬을 만드는 일이 이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든다. O 선생으로부터 벽지에 근무하는 나를 위로하는 편지가 왔다. 바라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P 선생으로부터 언제나 그랬듯이 엽서가 왔다. 이 엽서가 언제라도 봉함 편지가 될 수 있을까? 그런 편지를 받고 나면 갑갑하기만 한 이 고을이 싫어진다.
피곤하고,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 시달리고, 밥해 먹어야 하니 현실이 자꾸 비참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는 표정을 고치자. 금방금방 솟아오르는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이들의 가슴에 못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1974년 10월 17일 맑음
가을 날씨가 참 맑다. 그리고 단풍이 아름답다. 교정에 단풍나무가 서러울 정도로 붉게 물드니 정말 가을이 내게도 온 것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 동안 밀린 빨래 거리를 갖고 개울로 나가 물에 손을 넣으니 싸늘한 기운이 전신을 찌른다. 물은 한없이 맑다. 와이셔츠, 내복 같은 것에 비누칠을 해서 바위 위에 뭉쳐 놓고, 바지를 빨았다. 사계절 변하지 않는 내 바지, 작업복이며 동시에 근무복이다. 밥 지을 때도 입고 술 마실 때도 변함없이 입는 내 바지다. 동네 임씨가 '전근갈 때 그 바지 나 주쇼. 액자에 넣어 걸어 두게' 했을 정도로 곧 내 자신이다. 시커먼 때국물이 흐른다. 선생하면서 묻은 사회의 때이다. 맑은 물에 풀려 나가는 때, 그것은 바로 내 육신의 때다. 바지가 한결 가벼워졌다. 기분도 죄를 덜어낸 것처럼 홀가분하다.
동네를 지나가다가 6학년 학생이 제 엄마더러 '이방주 간다'하는 말을 들었다. 그 애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나는 '이방주 선생님'이 아니라 그냥 '이방주'였다. '이방주 새끼'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존경받는 선생이 되고 싶다. 그러나, 부끄럽다. 애들을 원망하기 전에 내 안을 채워야 한다. 그러고 보니 술 마실 때는 동네 사람이 모두 내게 그냥 '이방주'라고 한게 생각난다. 그러면서 '선생님같지 않애. 그냥 동네 사람이지 뭐' 하곤 했다. 맞아, 그냥 동네 사람이지 뭐.
야학을 내 반 교실로 옮겼다. 새로 온 교감도 싫어하고 교무 주임도 자꾸 딴 소리를 한다. 옮기니 깨끗하고 홀가분한데 왜 그리 못했는고. 야학 학생의 성적도 냈다. 오늘밤에는 좀 성의 있는 수업을 했다.
1974년 11월 3일 맑음
일요일. 이 선생님과 지게를 지고 용소에 갔다. 궁상이라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겨울 땔감을 준비해야 하니까. 선생이라고 누가 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져다 주는 것 받아도 안된다. 산에 가면 산판에서 베어 버린 나뭇가지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냥 지게에 얹어 오기만 하면 된다.
나는 머릿기름을 바른 채 소주와 안주 봉지를 흔들며 뒤따르고, 빈 지게는 이 선생님이 지고 갔다. 용소의 물은 언제나 그대로 떨어지고 있다. 바위의 육중함도 맴도는 소용돌이의 어지러움도 늘 그대로다. 그러나 그 감회는 볼 때마다 다르다. 소리는 우렁차지만 모습이 단순하고 변함없어서 오히려 조용하게 들렸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주워 지게에 지고 갈 만큼 짊어 놓고 바위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소주 기운이 남아 둘 다 조금 비틀거렸다. 교대로 지고 왔지만, 이 선생님은 귀하게 성장해서 지게질을 나만큼 하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웬 궁상이니껴?' 하면서 비아냥거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난에 찌들고 배운 것이 없어 비아냥거림이 습관이 되었다. 다음 주에는 손수레까지 가지고 가기로 했다. 이 선생님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나는 장작을 팼다. 도끼로 나무를 패다 튀는 나무 조각에 눈 밑에 상처를 입었다. 그냥 우리는 이렇게 멋있게 산다고 생각하자.
1975년 1월 25일 눈
담북장은 바글바글 끓여 놓았고 밥은 지금 열나게 끓고 있다. 담북장은 가을에 실습지에서 거둔 콩을 챙겨 두었다 초겨울에 띄운 것이다. 사택 앞에 묻어 둔 김장 김치로 돼지고기 김치 찌개를 해 먹으면 일품이겠지만, 12월에 사 놓은 돼지 뒷다리가 집에 갔다 오니 다 먹고 족발만 남았다. 이 선생님이 소주 한 잔 했겠지. 그 구수하던 담북장도 일주일을 계속 먹으니 지겹다. 거기 두부를 넣어도 한두 끼지 맛이 날 리 만무하다. 장 냄비를 들고 흔들면 바닥에서 달그락달그락 돌 구르는 소리가 난다. 콩을 일어 돌을 골라야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요즘은 방학 중 근무고 보니 외톨이라 하루 두 끼로 때우니 전신이 노골노골해져서 죽을 지경이다. 바쁘게 살아야 할 일을 다하고 산다. 시간이 많으니 더욱 게으르다. 밥상도 닦지 않고 말라빠진 단무지, 짠지 같은 것들이 그대로다. 그래도 밥 끓는 냄새는 참으로 구수하다. 주전자 들고 개울에 물 길러 가기가 쑥스럽다.
내일이면 다시 집에 간다. 오후에는 밀린 사무를 정리할 생각으로 찬물에 빨래를 했다. 개울에 얼음을 꽝꽝 두드려 깨고 크게 구멍을 내어 그 밑에 흐르는 물에 빨래를 한다. 손이 잘 펴지지 않는다. 빨아 얼음 위에 놓은 내의가 얼어붙는다. 이곳의 추위는 정말 매섭다. 빨래를 사택에 널어놓고 학교에 가니, 신 선생님이 퉁퉁 부은 내 손을 잡고 '미련한 사람, 숙직실에 물을 데워서 하지. 그래서 때가 빠지냐?'하고 나무랐다. 그래서 선배가 좋다.
눈은 계속 내린다. 온 천지가 희게 변한 이 경이로움에도 감탄하지 못하는 나는 벌써 애늙은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나는 초라하게 변해 가고 있다.
에라, 내일 집에는 어차피 못 가게 생겼다. 술판이나 벌이자. 교무실 난로에 장작불을 활활 피워 놓고 김형을 시켜 소주와 두부라도 좀 사 오게 했다. 잠시 후에 김형이 눈을 하얗게 맞고 되돌아 왔다. 누가 멧돼지를 잡았는데 어쩔 거냐고. 좋다. 우리는 열 네 근이나 되는 갈비 한 짝을 샀다. 다 못 먹으면 눈 속에 묻어 놓으면 된다. 난로 뚜껑을 열고 철판을 올려놓은 다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신 선생님과 김형과 셋이서. 정말로 오붓하다. 김형은 술을 못 마신다. 연신 장작을 지피며 고기를 굽고, 우리는 먹고 마시며 속에 있는 얘기를 했다. 이제 신 선생님은 3월이면 간다. 이 선생님도 간다. 나만 남는다. 일년 선배인 이들은 친구나 형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다. 술기운이 돌자 갑자기 서러워졌다.
지난 12월 야학을 그만 둔 게 갑자기 생각난다. 야학에 열심히 나오던 38명에게 죄지은 것 같았다. 신 선생님은 결실은 못 보았으나 인생에 많은 보탬이 될 거라고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했다. 김형은 주정뱅이들 잔소리에 지쳐서 졸다가 숙직실로 가고, 둘이서 새벽까지 마시다 술에 떨어져 숙직실로 기어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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