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어느 봄날의 일기장에서
산골의 여울은 밤에 더 크게 울어댄다. 해발 500m가 넘는 이곳 추위도 오월이 되자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보이는 앞산에 소나무가 어제보다 훨씬 가까이 보이고 산모롱이에 아지랑이가 제법 따스하다. 낮에는 잘 모르던 물소리가 밤이 되면 한층 아리게 울어댄다. 형제봉의 눈이 이제 녹는가 보다.
언젠가 형제봉에 올라갔다가 미끈하게 빠진 암노루를 본적이 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놀라 단숨에 한 등성이를 넘어 계곡으로 내닫던 보습이 눈에 선하다.
호롱불 앞에 책을 펴고 혼자임을 잊으려 애를 써 본다. 물소리가 스물 세살 총각 선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통나무를 깎아 나일론 줄을 엮어 만든 침대 너머 창문에 달빛이 푸르다. 밖으로 나가 볼까? 혹시 알아, 달걀 삶아 놓고 소주 한 병 같이 기울일 벗이 있을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산골 마을 총각 선생인 내게는 마을 사람 모두가 친구가 아닌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할머니들은 그런 대로, 동리 아낙네들은 모두가 자모가 아닌가 ? 게다가 청년들은 나름대로 친구가 될 만 했고, 동리 처녀들도 가까이 하지 않아서 걱정인 판이다. 그렇다고 동네 처녀들과 소주를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가을부터 심란한 일이 있는데 말이다. 또 같은 나이 또래의 청년들과 술로 어울리기는 선생이란 직업이 짐이 되었다. 그러면 별수 없이 우리끼리 어울리는 거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나같이 심심한 선생이 누가 한 분쯤 나와 있을 것이고 없으면 사택에 가서 불러내면 된다.
옷을 갈아입었다. 부엌을 통해서 나가야 되는 출입문을 연다. 문득 부엌을 바라본다. 나로서는 참으로 부끄럽고 어색한 공간이다. 된장 고추장 국물이 말라붙은 석유 곤로, 찌그러진 양재기, 새까맣게 그은 냄비, 이 모두가 배꼽 바로 밑에 있는 흉터처럼 내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다.
그런데다가 초임 발령을 받고 와서 몇 달 하숙을 하다가, 지난 가을 이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도 서툰 내 음식 솜씨를 고민하며 퇴근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고, 석유 곤로 위에서 두부 찌개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아이들 헌 책상 다리를 잘라 만든 내 밥상에는 따뜻한 밥 냄비가 두부 부침, 고추닢무침, 배추 겉절이, 멸치 볶음, 콩자반과 같은 내 처지에서는 황홀한 반찬과 함께 차려져 있었다.
나는 우선 곤로의 불을 껐다. 누군가 어디 숨어서 내가 놀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부엌문 밖으로 나가 집을 한 바퀴 돌아도 수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옛날 얘기에서나 듣던 우렁각시가 실제로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나중에 따지고 우선 찌개 냄비를 갖고 방에 들어와 식사부터 했다. 모든 음식이 간이 맞았다. 특히 두부 부침은 일찍이 맛보지 못한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따뜻한 두부 찌개를 먹어본게 얼마만인가?
시장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나는 누구인가를 연상하기 시작했다. 우리 반 누구 엄마일까? 상현이 엄마? 아냐, 음식이 너무 깔끔해. 대국이 엄마? 아냐, 그이는 절대로 몰래 그럴 사람이 아냐. 작은 것도 크게 호들갑을 떨며 내가 있을 때 가져 올 사람이지. 그렇다면 미용이 엄마? 그 깍쟁이가? 그도 아니었다. 나는 반에서 좀 유난을 떠는 엄마들을 짚어 보았으나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일단 엄마들이 몰래 그럴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동네 처녀들 중 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소문에 망신당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마나 입이 즐거우니 사는 맛이 난다.
도대체 내가 요즘 사는 것인가, 생활을 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결혼을 해서 꽃같이 예쁜 색시와 이렇게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서둘러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또 한 번 놀랐다. 곤로는 물에 불려서 닦아서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었고, 냄비들도 모두 깨끗했다. 게다가 부엌 바닥도 깨끗하다. 그날은 우렁각시 꿈을 열 번도 더 꾸었다.
그후 일주일이 멀다 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 마른반찬이 떨어지지 않고, 부엌 살림이 모두 깨끗해 졌다. 심지어 일요일 한꺼번에 빨려고 모아 놓은 속옷까지도 빨아서 줄에 가득 널어놓기도 하였다. 나는 속옷 감추기에 여념이 없고, 조금이라도 더 깨끗이 하느라고 아침 시간이 바빴다. 소문이 났는지 안 났는지 내게는 들리지 않았고 알려고 하기도 부끄러웠다.
겨울이 오자 그런 일이 좀 줄었다. 하기는 겨울엔 반찬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네서 돼지를 잡는 날 다리 한 짝을 사다 부엌에 걸어 놓으면 훌륭한 자연 냉장고이다. 끼니마다 조금씩 떼어서 김치찌개를 해 먹으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우렁각시는 두 번인가 나타났다. 한 번은 이불 홑청을 뜯어 가더니 다음에는 보송보송하게 내 이불을 시쳐 놓았다. 우렁각시여, 오늘같이 달 밝고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날 나타나서 소주나 한잔합시다.
숙직실에 가 보았다. 학교 아저씨 김씨가 새끼를 꼬고 있다. 운동장을 건너 사택에 가 보았다. 교장 사택에서는 가늘게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빛에 그림자는 이미 짧아진지 오래다. 이 선생님, 신 선생님은 이미 잠이 들었나 보다. 학교 앞 주막에 가 보았다. 예비군 소대장과 이장이 소주를 마시고 있다가 반긴다.
"아 이 총각 선생님께서 달이 발그이 바램이 나셨는 둥, 이리 오시소 고만, 소주 한잔 하시더."
"그럽시다. 여이 김형, 여기 달걀 한 판만 삶고 소주 몇 병 더 주십시오. 상도 다시 좀 차려 주시고. 이제부터 제가 삽니다."
나는 그야 말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달이 기우는 새벽길을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나섰다. 울퉁불퉁 자갈이 걸려 더욱 몸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학교 앞을 지나 들판을 한 15분쯤 지나야 내가 사는 움막 같은 집이 나온다. 마차가 다닐 정도인 길은 온통 자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돌이 깔려 있다. 길이 앞에서 좌우로 왔다갔다하는가 하면 어느새 15 도쯤 앞으로 솟아 하늘로 뻗어 나간다. 나는 비탈길을 오르듯 발을 디딘다. 그러면 헛디딘 발이 푹푹 주저앉는다.
몇 번이나 넘어질 듯한 몸을 가누며 간신히 집 앞까지 왔다. 열쇠 구멍이 보일 리 없다. 우렁각시 사건 이후 공연히 문을 잠그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잠그나마나인 것을……. 구멍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 문에 기대섰다. 그 때 누군가 이쪽으로 온다. 긴머리 여자다. 장터거리 가게 강씨 딸 영화다. 제 나이 열 아홉보다 숙성하여 사람들이 시집보내야 한다고 하던 그 처녀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장터거리에서부터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렸단 말인가? 영화는 화장품 냄새를 훅 풍기며 내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든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맡겼다. 능숙하게 열쇠를 비틀어 문을 따 준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이부자리를 펴고 나를 부축하여 누인다.
"영화야, 네가 웬 일이냐? 너 혹시 수시로 내집에 드나든 것 아니냐? "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닫고 도망치듯 가 버린다. 나는 손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곧 곯아 떨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렁각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한없이 궁금하였지만 영화가 우렁각시였나 아니었나 하는 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산골 여울은 더욱 소리 높여 울고, 달 밝은 밤이면 나는 더욱 술을 마시고…….
산골의 여울은 밤에 더 크게 울어댄다. 해발 500m가 넘는 이곳 추위도 오월이 되자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보이는 앞산에 소나무가 어제보다 훨씬 가까이 보이고 산모롱이에 아지랑이가 제법 따스하다. 낮에는 잘 모르던 물소리가 밤이 되면 한층 아리게 울어댄다. 형제봉의 눈이 이제 녹는가 보다.
언젠가 형제봉에 올라갔다가 미끈하게 빠진 암노루를 본적이 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놀라 단숨에 한 등성이를 넘어 계곡으로 내닫던 보습이 눈에 선하다.
호롱불 앞에 책을 펴고 혼자임을 잊으려 애를 써 본다. 물소리가 스물 세살 총각 선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통나무를 깎아 나일론 줄을 엮어 만든 침대 너머 창문에 달빛이 푸르다. 밖으로 나가 볼까? 혹시 알아, 달걀 삶아 놓고 소주 한 병 같이 기울일 벗이 있을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산골 마을 총각 선생인 내게는 마을 사람 모두가 친구가 아닌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할머니들은 그런 대로, 동리 아낙네들은 모두가 자모가 아닌가 ? 게다가 청년들은 나름대로 친구가 될 만 했고, 동리 처녀들도 가까이 하지 않아서 걱정인 판이다. 그렇다고 동네 처녀들과 소주를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가을부터 심란한 일이 있는데 말이다. 또 같은 나이 또래의 청년들과 술로 어울리기는 선생이란 직업이 짐이 되었다. 그러면 별수 없이 우리끼리 어울리는 거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면 나같이 심심한 선생이 누가 한 분쯤 나와 있을 것이고 없으면 사택에 가서 불러내면 된다.
옷을 갈아입었다. 부엌을 통해서 나가야 되는 출입문을 연다. 문득 부엌을 바라본다. 나로서는 참으로 부끄럽고 어색한 공간이다. 된장 고추장 국물이 말라붙은 석유 곤로, 찌그러진 양재기, 새까맣게 그은 냄비, 이 모두가 배꼽 바로 밑에 있는 흉터처럼 내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다.
그런데다가 초임 발령을 받고 와서 몇 달 하숙을 하다가, 지난 가을 이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도 서툰 내 음식 솜씨를 고민하며 퇴근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고, 석유 곤로 위에서 두부 찌개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아이들 헌 책상 다리를 잘라 만든 내 밥상에는 따뜻한 밥 냄비가 두부 부침, 고추닢무침, 배추 겉절이, 멸치 볶음, 콩자반과 같은 내 처지에서는 황홀한 반찬과 함께 차려져 있었다.
나는 우선 곤로의 불을 껐다. 누군가 어디 숨어서 내가 놀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부엌문 밖으로 나가 집을 한 바퀴 돌아도 수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옛날 얘기에서나 듣던 우렁각시가 실제로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나중에 따지고 우선 찌개 냄비를 갖고 방에 들어와 식사부터 했다. 모든 음식이 간이 맞았다. 특히 두부 부침은 일찍이 맛보지 못한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따뜻한 두부 찌개를 먹어본게 얼마만인가?
시장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나는 누구인가를 연상하기 시작했다. 우리 반 누구 엄마일까? 상현이 엄마? 아냐, 음식이 너무 깔끔해. 대국이 엄마? 아냐, 그이는 절대로 몰래 그럴 사람이 아냐. 작은 것도 크게 호들갑을 떨며 내가 있을 때 가져 올 사람이지. 그렇다면 미용이 엄마? 그 깍쟁이가? 그도 아니었다. 나는 반에서 좀 유난을 떠는 엄마들을 짚어 보았으나 확신이 가지 않았다. 일단 엄마들이 몰래 그럴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동네 처녀들 중 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소문에 망신당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마나 입이 즐거우니 사는 맛이 난다.
도대체 내가 요즘 사는 것인가, 생활을 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결혼을 해서 꽃같이 예쁜 색시와 이렇게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서둘러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다가 또 한 번 놀랐다. 곤로는 물에 불려서 닦아서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었고, 냄비들도 모두 깨끗했다. 게다가 부엌 바닥도 깨끗하다. 그날은 우렁각시 꿈을 열 번도 더 꾸었다.
그후 일주일이 멀다 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 마른반찬이 떨어지지 않고, 부엌 살림이 모두 깨끗해 졌다. 심지어 일요일 한꺼번에 빨려고 모아 놓은 속옷까지도 빨아서 줄에 가득 널어놓기도 하였다. 나는 속옷 감추기에 여념이 없고, 조금이라도 더 깨끗이 하느라고 아침 시간이 바빴다. 소문이 났는지 안 났는지 내게는 들리지 않았고 알려고 하기도 부끄러웠다.
겨울이 오자 그런 일이 좀 줄었다. 하기는 겨울엔 반찬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동네서 돼지를 잡는 날 다리 한 짝을 사다 부엌에 걸어 놓으면 훌륭한 자연 냉장고이다. 끼니마다 조금씩 떼어서 김치찌개를 해 먹으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우렁각시는 두 번인가 나타났다. 한 번은 이불 홑청을 뜯어 가더니 다음에는 보송보송하게 내 이불을 시쳐 놓았다. 우렁각시여, 오늘같이 달 밝고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날 나타나서 소주나 한잔합시다.
숙직실에 가 보았다. 학교 아저씨 김씨가 새끼를 꼬고 있다. 운동장을 건너 사택에 가 보았다. 교장 사택에서는 가늘게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왔다. 달빛에 그림자는 이미 짧아진지 오래다. 이 선생님, 신 선생님은 이미 잠이 들었나 보다. 학교 앞 주막에 가 보았다. 예비군 소대장과 이장이 소주를 마시고 있다가 반긴다.
"아 이 총각 선생님께서 달이 발그이 바램이 나셨는 둥, 이리 오시소 고만, 소주 한잔 하시더."
"그럽시다. 여이 김형, 여기 달걀 한 판만 삶고 소주 몇 병 더 주십시오. 상도 다시 좀 차려 주시고. 이제부터 제가 삽니다."
나는 그야 말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달이 기우는 새벽길을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나섰다. 울퉁불퉁 자갈이 걸려 더욱 몸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학교 앞을 지나 들판을 한 15분쯤 지나야 내가 사는 움막 같은 집이 나온다. 마차가 다닐 정도인 길은 온통 자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돌이 깔려 있다. 길이 앞에서 좌우로 왔다갔다하는가 하면 어느새 15 도쯤 앞으로 솟아 하늘로 뻗어 나간다. 나는 비탈길을 오르듯 발을 디딘다. 그러면 헛디딘 발이 푹푹 주저앉는다.
몇 번이나 넘어질 듯한 몸을 가누며 간신히 집 앞까지 왔다. 열쇠 구멍이 보일 리 없다. 우렁각시 사건 이후 공연히 문을 잠그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잠그나마나인 것을……. 구멍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 문에 기대섰다. 그 때 누군가 이쪽으로 온다. 긴머리 여자다. 장터거리 가게 강씨 딸 영화다. 제 나이 열 아홉보다 숙성하여 사람들이 시집보내야 한다고 하던 그 처녀다. 그런데 그 처녀가 장터거리에서부터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계속 기다렸단 말인가? 영화는 화장품 냄새를 훅 풍기며 내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든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맡겼다. 능숙하게 열쇠를 비틀어 문을 따 준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이부자리를 펴고 나를 부축하여 누인다.
"영화야, 네가 웬 일이냐? 너 혹시 수시로 내집에 드나든 것 아니냐? "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닫고 도망치듯 가 버린다. 나는 손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곧 곯아 떨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렁각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한없이 궁금하였지만 영화가 우렁각시였나 아니었나 하는 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산골 여울은 더욱 소리 높여 울고, 달 밝은 밤이면 나는 더욱 술을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