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삼송리 왕소나무를 다시 찾아 갔다. 왕소나무는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 있다. 청주에서 화양동을 지나 송면에서 상주 쪽으로 가다보면 송면중학교가 있다. 거기를 돌아볼 필요는 없다. 그냥 지나서 대야산 입구 폐교된 삼송초등학교 쪽으로 가지도 말고, 옥양동으로 자꾸 올라가면 조항산, 청화산 입구가 나온다. 거기서 동쪽 구름에 가린 조항산을 바라보면 거대한 소나무 군락이 보인다.
좁은 마을 진입로로 들어가다가 교회쪽으로 죄회전하면, 소나무 앞까지 차를 들이댈 수 있다. 그러나 소나무가 차 냄새를 고약하다고 할 테니까 마을 어귀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것이 600살이나 된 어른을 대하는 예의일 것이다.
하나로 그리고 전체로 존재하는 삼송리 왕소나무
삼송리 왕소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라 왕소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크고 작은 소나무 10여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대개 연륜이 깊은 소나무일수록 그 지내온 풍상에 겨워서 힘없이 외로이 서있게
마련이다. 또 가지나 잎이 드뭇하고 큰 줄기만 고고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왕소나무는 그와 다르다. 여럿 가운데 서서
키가 제일 큰 것은 아니지만 밑동의 둘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밑동이 굵고 짧아서 마치 우리에게 명쾌한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듯하다. 밑동에서 바로 갈라진 두 가지는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한 마리 승천하는 용의 모습으로 꿈틀거리며 하늘로
치솟는다.
가지도 가장 왕성하게 번성하여 소나무 군락의 삼분의
일을 차지 한다. 가지에서 다시 가지가 벋고 그 가지가 다시 가지를 벋어서 잔가지가 땅에 끌릴 정도이다. 잔가지 끝에 소복소복하게 매달린 솔잎
무더기들은 봄빛을 받으며 하나하나 하늘을 향해 발기하는 듯한 모습이라 차라리 민망하다. 그 굵고 가는 가지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향하여 꿈틀거리며
치솟는 모습이다. 낙락장송의 가지 끝이 축축 늘어져 그 위로 하늘을 드러내야 노년의 여유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노년에도 왕성한 생명력이
부럽다.
왕중왕 소나무는 빛깔도 다르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붉은 기운이 넘쳐 흘러서 마치 한국형 호랑이의 붉은 빛을 생각나게 한다. 대개 소나무가 두툼한 보굿으로 밑동을 감싸고 있는데, 이
왕소나무는 두꺼운 솜바지 저고리가 오히려 귀찮은지 훌훌 벗어던지고 붉은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부터 붉게 성낸 모습이 금방이라도
누구에게 기어 오를 듯한 기세이다.
또 밑동부터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용틀임한다. 밑동은
밑동대로 가지는 가지대로 잔가지는 잔가지대로 숙일 줄 모르는 생명력이다. 꿈틀꿈틀 용을 쓰다가 땅이 꺼지는 듯 한 소리를 지르고, 하늘로 치솟을
기세이다. 솟아나는 기운을 어찌할 줄 모르는 스무살 청년의 모습이다. 모두가 힘이고 생명력이다. 쳐다 볼수록 발바닥에 힘이 주어지고
공연히 어깨가 움쭉움쭉해진다.
왕중왕소나무에 비해서 그 옆의 다른 소나무들은 고요하고 겸손하게 서
있는 모습이 흡사 시봉의 맡은 시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비굴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나름대로의 개성을 보이면서 제 주인을 존경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에 대하여 성실하고 소신있는 삶의 자세이다. 역시 무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소나무 군락의 또하나 감동스런 것은 여러 그루가 모여 왕과
시봉을 맡고 있으면서 먼데서 보면 마치 한 그루 커다란 소나무 모양이라는 점이다. 하나하나가 하나로 존재하면서 전체에 기여하여 자신이
하나임을 잊어버리면서 민중과 벗하는 성자를 닮아 있다. 松자를 파자해 보면 나무중의 귀공자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럴
것이다. 힘과 겸허함을 함께 지니고 사는 그런 모습이 내가
소나무를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사실 오늘은 칠보산 정상 바위틈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언젠가 정상 바위 틈에서 앉아서 도시락을 먹으며 내려다 본 쌍곡 계곡의 아름다움이 소나무에 의한 것임을 깨달았다. 칠보산은 산은 크지
않지만 바위와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적절히 어우러진 그 고고한 맛이 좋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오르리라 했었다. 이른 아침 친구
연선생을 꼬드겼다. 그래서 넷이서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칠보산 소나무와 연이 닿지 않았나 보다. 초입부터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우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봄비 치고는 좀 사나운 편이었다. 한동안 몸살을 앓고 난 아내들이 머뭇거려서 미련
없이 내려 왔다. 그러니 삼송리 왕소나무는 꿩대신 닭인 격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꿩을 보는 것보다 더 호사스러운 눈 복을
누린 것이다.
가뭄에도 만수인 의상저수지
벌써 한 십오년 전에 올랐던 조항산 구름이 그리워 의상 저수지에
들러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의상 저수지는왕소나무에서 조금더 조항산 길목으로 올라가면 된다. 저수지는 가뭄에도
만수였다.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물이 모여 마치 천지의 모습이다. 둑에 자리를 펴고 찰밥에 무짱아찌를 올리며 조항산과 청화산을 기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칠보산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소나무와 물과 구름으로 충분히 하루를
양을 채웠다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소나무를 만나기 위해 서원계곡으로 차를 돌렸다.
(2005.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