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나리에 불을 당기는 보약 같은 바람이 되자
지난 강원도 양양의 산불은 참으로 무시무시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치솟는 불길이 수십 미터씩 하늘을 찌르고
순식간에 천년 고찰인 낙산사를 삼켜버렸다고 합니다.
불을 끄기 위해서 출동한 소방차를 녹여 버리고
낙산사 동종이 녹아 물흐르듯 흘러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변했다고 하니
미친 화마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짐작할 만 합니다.
어린 시절 나는 등잔불 아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입바람으로 불어 불을 끕니다.
등잔불은 '팔랑'춤을 한 번 추고는 숨을 거둡니다.
새벽까지 공부한 날은 젊은 날에도 힘이 부족했는지 서너 번 입바람을 불어야 팔랑거리는 불춤이 멎고 불이 꺼집니다.
그 어린 시절
때로 새벽에 일어나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기도 했습니다.
희나리를 밑에 깔고 위에 참나무 장작을 올려놓으면
희나리에 남아 있는 물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지 않습니다.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불기도 하고, 풀무로 좀더 센 바람을 불어 부치면 불이 일어납니다.
일단 희나리에 불이 붙으면 금방 팬 참나무 장작이 '치지직'하고 김을 내품으며 강한 열을 내면서 무섭게 타오릅니다.
양양의 산불이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불에 바람은 무엇일까요?
불을 꺼버리기도 하는가 하면, 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화마로 변해버리게도 합니다.
바람은 때로 보약이 되기도 하고 독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최근, 우리학교는
선생님, 학생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라 생각하고 가림없이 귀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진정으로 가르쳐 주는 분이라 생각하고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의도적 행동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금년 들어 이렇게 변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가슴 뿌듯했습니다.
좀 더 책을 읽고 밀도 있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엄하게 아이들을 이끌어야겠고, 마음속으로는 좀더 따뜻하게 아이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양식을 덜어 이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우리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이들도 이런 속내를 다 이해하는지
평소와 다른 정도로 엄한 가르침에도 신뢰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에서 신뢰와 공감을 읽었습니다.
아마 모든 아이들의 마음이 다 이러했을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는 힘이 나고, 이런 아이들이 더없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빠른 시간 안에 우리는 쇠내에서 금을 몇 가마니고 캘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은 한 마음으로 금맥을 찾아 오늘도 땅을 파고 모래를 헤집는데 땀을 흘립니다.
그런데 학생과 교사 말고 꼭 있어야 할 한 사람은 바람이 되려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되어 미풍으로 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학생과 선생이 만나는 본질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존경이라는 주춧돌이고, 그 위에 학문의 집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기둥을 세우려는데 바람이 붑니다.
이제 철기둥을 세우고 용접을 하면 골격이 완성되는데 바람이 붑니다.
이제 모래알에 섞인 금가루를 골라내야 하는데 바람이 붑니다.
미풍으로 모래알만 살살 날려 금가루를 잘 보이게 해야 할 텐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광풍으로 바뀔지 모르는 이 대책 없는 미풍을 어찌해야 합니까?
이 바람 속에는 느긋한 사랑에 앞서 언 발에 우줌 누는 성급한 서두름이
푸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경에 앞서 바알간 눈꼬리의 이해와 타산이
신뢰에 앞서 허망한 욕심으로 휘몰아치려는 광풍의 씨앗이 숨어있는 듯합니다.
바람은 모래알만이 아니라, 금가루까지 날려 버릴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세상모르는 바람이 다시 평정을 찾고 잔잔하게 멈추기를 바랍니다.
칠월칠석에 한번 견우를 만나기 위해 일년 내내 베틀에 앉아 있는 직녀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아무래도 갈 수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그네를 밀어 올리라 하소연하는 춘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얻기까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낙산사를 불태우는 화마에 부채질하는 광풍이라는 독약이 되지 맙시다.
그저 미풍에 머물러 꺼야할 때 등잔불을 끌 수 있고, 일으켜야 할 때 희나리에 불을 당기는 보약이 됩시다.
나는 오늘 아침에
아픔 없이 성숙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금천고등학교와 금천고등학교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로 아프게 이 글을 올립니다.
2005년 4월 25일 새벽 학교 칼럼에 올렸던 글
(출근하여 바로 삭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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