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제자
윤선생이 왔다가 급히 돌아가는
멀 발치에 아카시아 향이 밟힌다.
나의 영원한 스승이신
한국교원대학교 최운식 교수님께 전화를 드릴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엄마가 된 제자 윤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최운식 선생님께 드릴 말씀은
"선생님 아무래도 올해는 시간을 못내겠습니다" 였었다.
그런데 엄마가 된 윤선생은
"선생님 언제 시간나세요?"이다.
나는 예리한 송곳으로 가슴을 찔리는 듯했다.
스승의 날은 '나의 날'이 아니라 '나의 스승의 날'이라고 강조했던 내가
스승을 만날 시간은 내지 못하면서 엄마가 된 제자에게 내줄 시간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제 그만 우리 마음만으로 만족하자."
이렇게 제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나의 양심을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저 깊은 구석에서는 그가 나를 잊지않는 것에 대한 감사와,
아무리 사양하는 것 같아도 찾아와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속물 근성이 꿈틀거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 선생니냐?
13일 오후
6시 10분에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오니 엄마가 된 윤선생이 주차장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30년 넘은 속물 선생은 그 아이를 그만 아이로 착각하고 말았다.
엄마였다는 것도 마흔이 가까운 선생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교무실에 오게 해서 오랜지라도 마시게 하고
선생이 된 그 대견한 얼굴과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런데 복도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났다.
아기를 데리고 온 것이다.
퇴근하면서 아기 보는 유아원에서 아기를 데리고 들른 것이다.
그렇게 시간 내기 어려운 엄마이고, 선생이고 또 제자였다.
엄마가 된 제자 윤선생은 선물 꾸러미만 던지고 황황히 가버렸다.
옆에서 교감 선생님이 건네준 오렌지도, 아가 줄 사탕 한 알도 입에 물지 못하고…….
현관에 나와
아기를 달래며 차에 오르는 엄마가 된 제자 윤선생을 바라보는데
교정까지 스며든 아카시아 향이 가시를 단 채 내 등줄기를 마구 후리는 듯했다.
여덟시 넘어 집에 돌아와 엄마가 된 제자 윤선생의 선물을 풀면서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마흔 가까운 나이에 두 아이를 기르는
제자의 시간 내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의 늙은 속물근성이 미웠다.
언제
정말 사람들이 바라는
아니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정말 이쯤이면 되겠다는
그런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언제 그 언제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은가? 손에 때는 없는가? 가난이 용기에 상처는 주지 않는가 살피시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언제 그 언제
제자의 글을 한자 한자 다 읽으며 철자까지 챙겨 주고
과정 수료 후까지 하나하나 챙겨 주시는 석사과정 지도교수이신 그런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언제
나의 선생님께
정말 진정으로 바쁜 시간을 아깝지 않게 쪼개 드리는 그런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은
두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정말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리고
"올해는 정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바보 같은 핑계만은 피해야 겠다.
스승의 날
이제 선생이 된 제자에게 배워야 하는 이 날
이 날은 정말 '나의 스승의 날'이다.
2005년 5월 14일 새벽에 학교 칼럼에 썼다가 지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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