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영혼의 샘물, 그리움의 언어

느림보 이방주 2025. 3. 5. 20:25

류인혜의 《새집 이야기》 서평

영혼의 샘물, 그리움의 언어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류인혜 수필집 『새집 이야기』가 담아낸 정감을 한 단어로 말하면 ‘그리움’이다. 그의 수필적 언어는 삶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이다. 그의 그리움의 언어는 깊고 맑은 영혼의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청량하고 안온하다. 시적 함축성으로 그의 수필적 언어를 규정하기에는 담긴 서사가 너무 다양하고 사유는 깊고 넓다. 그리움에 대한 수필적 사유를 시적 언어로 담아내는데 밤을 지새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쉽게 읽히면서도 독자들을 사색에 잠기게 한다. 
그의 그리움은 대상을 옆에 둘 수는 없지만, 막연하지도 않고 애를 태우지도 않는다. 그의 그리움은 애틋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그의 그리움은 아득하지만 절망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그저 잔잔하게 행복에 잠기는 순간이 된다. 그는 그리워하는 대상을 늘 사유의 품에 품고 산다. 길지 않은 줄에 매달린 두레박으로 퍼 올릴 수 있는 맑은 샘물처럼 가까운 믿음 안에 있다. 그가 그리움에 잠기는 순간이 안온한 것은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에서 행복했던 순간에 더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누군가 그를 바로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류인혜의 그리움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가 향하는 삶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이 결구되어 있다. 공간이 올이 되고 시간이 결이 되어 촘촘하게 짜여 있다. 수필집 『새집 이야기』가 품은 그리움의 세계는 우선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새집’은 학습의 공간이었고 열린 공간이었고 모든 이들과의 만남의 공간이었다. 다음으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새집에서 보내던 시간, 계절, 그때마다 이루어지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미 있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의 그리움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근원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깊은 의미가 이제는 그리운 것이다. 사람, 문화, 자연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그리움의 언어로 형상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작가가 수필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류인혜 수필가는 또 다른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책머리에에서 수필문학에 대한 생각과 창작의 방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필을 읽는 즐거움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편안함이다. 이웃들이 밥을 먹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듯이 누구나 친근함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쓰려고 한다. 가끔은 정신이 서늘해지는 치열함으로 쓴다. 수필은 삶을 따라가며 무르익는다. 수필을 읽어 진솔한 내면을 대하며 공감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수필은 삶의 가시마저 즐거움이 되도록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 수필은 만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희망을 전한다.
                                                                                                류인혜 수필집 『수필이 보인다』의 「책머리에」 중에서

그는 이 글에서 ‘수필이란 일상의 서사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 기쁨과 아울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행이 이루어져 삶의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는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수필 「가벼이 자유롭게」에서 수필문학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수필은 에세이가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남의 이야기인 듯 내 이야기이다.
-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숨기고 싶은 것 고통도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 소재는 인생의 긍정적인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 수필의 언어는 함축되고 압축되어야 한다.
- 수필가는 문학의 완성을 향하여 간다.
- 수필의 언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수필의 가치의 보편성, 고백성, 긍정적 사유, 언어의 함축성, 경험의 완성성과 서사구조의 완결성, 세련된 문장의 소중함을 갖추어 밝힌 대목이다. 또 수필의 특성과 아울러 창작과정에서 언어의 선택에 대하여도 언급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필은 서사를 뼈대로 삼고 시적 정감으로 살을 붙여 문학적 아름다움을 담아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소재 선정과 함께 대상에 대한 인식과 형상에 대한 언급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수필이 지향해야 하는 미학적 완성을 강조하였다. 수필을 하나의 수행의 문학으로 보았다. 수필은 그냥 그렇게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기존의 견해에 일침을 가하는 주장이다.
류인혜 수필가의 수필관과 창작 기법,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형상화하는 방법을 고려하여 수필집 『새집 이야기』를 읽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공간에 대한 그리움, 시간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문화에 대한 인식, 자연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다음에는 개성 있는 구성법과 표현법, 읽을수록 샘솟는 새로운 맛을 드러내는 언어의 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 수필집을 천천히 읽다보면 어린 시절 살던 집이라는 공간이 독자의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린다. 그래서 집이란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의미를 어떻게 담아냈는지 살펴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새집 이야기에서 집만큼 작가에게 구체적인 공간 인식을 가져다 준 곳은 없다. 특히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산다라는 것은 집이라는 공간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게 집은 삶의 중심이며 가족공동체의 상징이었다. 집은 또 안락과 평안함과 행복을 주는 공간이며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사랑의 공간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은 집에 대하여 ‘행복의 공간’ ‘피호성被護性의 공간’ ‘교육의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집은 우리 삶에서 모성의 가치와 보호, 비호의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작가도 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작품에 드러난 집에 대한 그리움의 근원을 찾아보면 서구적인 인식이나 우리네 공동 심의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작가에게도 집은 학습의 공간이었다.

새집은 내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가족에게서 받는 사랑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보냈던 매일은 신기함으로 가득했다. 집 밖에서 배우는 낯선 지식은 새집을 통해 다시 정리되었다.
                                                                                                                                                         「새집 이야기 1」

작가는 집을 ‘학습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일곱 살 어린이에게 집의 구조나 살아가는 풍경이 모두 학습이었다. 집은 ‘동서남북’의 개념과 생활에 관련된 방향성의 의미를 가르쳤고, 대문은 열림과 닫힘과 드나듦의 의미, 지나는 사람들의 평안함에서 가정의 근원을 배웠다. ‘열린 환경에서 자라난 의식은 늘 자신감에 넘치는 즐거움’을 동반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사는 집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집에서 학습한 진실이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집을 그리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누구나 어린 시절의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음식에는 음식을 해주는 어른들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음식은 재료보다도 어머니나 할머니의 손맛이 먼저이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 가족이 모여서 함께 먹는 즐거움, 나누어 먹는 즐거움, 음식을 통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배려하는 아름다움, 밥의 철학적 의미 같은 소중한 화소는 체험하지 않고는 느낄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맛 너머의 맛이다. 이것이 곧 맛으로 기억되고 맛으로 그리워하는 사랑이다. 집에 대한 그리움 가운데 음식에 대한 그리움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집은 구조성, 문화성,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곧 집은 가족, 사회제도나 질서전통적인 관습의 보기나 지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공간의 분할에 바깥의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의 의미를 지니며 외부, 남과 접촉이 가능한 남성 중심의 공적, 사교적 열린 공간이었다. 안채는 가족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닫혀있는 사적, 가족적인 여성 중심의 공간이다.
전통적인 가옥이면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초월하여 열린 공간에서 열린 사고를 했던 어른들 덕택으로 집에 대하여 행복한 그리움을 간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원으로 조부모의 사람에 대한 인식이었다. 조부모는 집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식구로 생각했다. 식구란 밥을 함께 먹는다는 말이다. 밥이든 다과든 차별 없이 수평적으로 나눈다는 의미이다. 교회 성도들이건, 목사님이건, 이웃이건, 지나는 과객이건 모두를 식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집에는 항상 평화로움이 떠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어린 시절이었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서로를 대함에 수평적인 사고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학습 공간인 집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집에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도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구, 조리용품, 농기구, 재봉틀, 다리미, 항아리, 장독대에 늘어선 장 단지, 댓돌 위에 놓였던 신발이 모두 그리움의 대상이다. 모두가 따뜻하고 즐겁고 평화로운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아름다움은 다 지나가버리고 AI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한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의 집은 학습의 공간이었고 열린 의식과 당당한 자신감을 심어준 평화의 공간이었다. 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의 상징이다.

삶의 세계에서 공간의 의미만큼 중요한 것이 시간이고 그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존재와 자연에 대한 인식의 과정에 근본적으로 전제되는 개념이다. 한국인의 시간에 대한 관념은 대체로 무상성無常性을 전제로 한다. 무상이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성, 성장, 소멸을 거듭함을 의미한다. 니체는 무상성을 ‘영원회귀’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영원회귀는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해는 뜨면 지고,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된다. 생성과 소멸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영원히 반복된다. 이러한 단순한 반복도 일종의 순환이기는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와 우리네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무상성의 순환은 많이 다르다. 무상이란 개념에는 순환의 과정에 변환과 성숙이 동반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변환이란 단순한 ‘바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뀜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한다. 시간은 때로 별처럼 빛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에 타서 사라지는 재처럼 허무하기도 하다. 그 가운데 변환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신령스럽다. 그런 변환이 우리네 삶의 여정에 전제된다. 사월은 목련처럼 피어나기도 하지만 우리네 4월에는 잔인한 총성도 있었다. 잔인한 총성은 사월의 함성을 불렀던 사실을 작품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사월의 함성은 역사의 변환이고 성숙이다. 이것이 곧 생성의 섭리이다.

요술 지팡이가 허공에 뿌리는 영령처럼 생성의 섭리가 흩날리는 봄날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더욱 절실하다. 만물이 살아나는 때, 해마다 사월이면 묵은 기억이 다시 새롭게 겹쳐지는 무력감으로 힘이 든다. 습관처럼 아린 마음이 되어 통곡하고 싶다.
절대 어리지 않던 정신의 반사反射를 어린 나이를 핑계로 외면했기에 늘 그때로 되돌아가 텅 빈 길가에 멈추어 선다. 비겁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자책감으로 시달린다. 오래 묵은 그 아픔이 햇살만 머금으면 하얗게 반사된다.
지나간 것은 잊으려는 흩어짐이 완벽한데 이 봄에 무엇을 더 이룰 것인가. 해보지 못한 일과 가보지 못한 곳,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근질거림이 만개하는 봄. 가장 기초적인 욕망이 끓는다. 뜨거운 감성은 여린 이성을 덮어버린다.
사월의 함성이 이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뜨거움을 애써 진정시켜야 했던 시간.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겪어내었던 모진 봄날이 온다. 늙지 않는 열망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아련하다. 그 끈질김에 놀란다. 목청껏 소리 질러 사월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외침이 아직 남아있다.
「4월의 노래」 중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여 보존하고 생성과 창조와 도취의 경험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고 공허와 소멸을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시간은 끊임없이 순환과 변화와 지속의 질서를 주재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존재를 빚어내기도 하며 소멸시키기도 한다. 시간은 인간의 생활을 편성하고 시간 속에 가두어 구속하기도 한다. 때로 이별, 망각, 허무의 근원이 된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그 불가사의함으로 종교와 철학, 과학과 심리학, 예술을 만들어 냈다. 작가는 무상성無常性과 연결된 ‘무정無情’의 시간관, 길흉의 운명적 시간관, 과거 지향적인 상고적 시간관으로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그날의 함성을 그리워하고 있다. 작품 「시간의 말」에서 ‘시간의 눈은 투시하고, 시간의 귀는 기울이고, 시간의 코는 공기의 맑음을 느낀다.’라면서 시간이 감각하는 것들에 마음을 기울인다. 시간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므로 생존을 위해서 시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생존을 위해서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았기에 시간은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누구에게나 변화를 가져온다. ‘시어머니의 시간’은 일상 용품을 옮기는 수단이 트럭에서 보퉁이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분의 자존심의 변화를 발견한다. 이 또한 시간의 무상성을 언급한 것이다. 류인혜 수필에는 이러한 초월의 순환이 담겨있다.
공간과 시간이 삶의 세계와 역사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거기에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관계를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속내에 보이지 않는 성을 쌓고 산다. 남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쌓은 성문을 닫아놓을 때도 있고 열어줄 때도 있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른 사람의 열린 마음을 받아들일 때 이것을 관계關係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빗장이 풀리고 문으로 연결된 것이다.
류인혜 수필가는 사람뿐 아니라 삶의 세계의 모든 것과 관계를 지으면서 살았다. 관계를 지으면서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둘 사이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가족이 중심이 되는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친구, 책, 음악, 식물, 계절, 문화 등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의미를 소중하게 기억했다. 그는 사람이 없는 부재는 침묵을 동반한 외로움을 가르쳤다고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본분을 다해야 화목을 불러온다고 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라는 단어에 의미를 두었는데 「우리가 이루는 기적」에서는 우리를 이루는 조건을 ‘비슷한 모습, 같은 언어’를 제시하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도 힘을 실었다. 같은 말이란 말에 담긴 의미나 정서 정감까지 같아야 하는 이른바 공동심의를 가져야 관계가 두터워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밥 친구, 문단의 인맥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어머니나 아버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작품마다 진하게 담겨 있다.

집안을 지키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 경우에도 무심히 기다려야 한다. 아직 집으로 오는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구나, 믿음이 중요하다. 누군가 남편이 어떻다 소리 높여 이야기할 때도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을 정성껏 예쁘게 하고 기다리라 말했다. 한 사람의 무책임이 원인이 아니라 서로가 자기의 본분本分에 책임을 져야 가정이 화목하고 든든하다.
내 아버지가 가신 지 20년이 넘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떠난 지도 10년이 되어간다. 죽음은 인생의 한 부분이 사라짐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빈자리에 소중한 추억이 남는다. 살아 있을 때 공유했던 따뜻함이 클수록 가정은 무너지지 않고 풍부해진다.
「풍산 류가 내 아버지」

서로가 ‘자기의 본분에 책임’져야 하는 관계의 중요성과 죽음과 인생의 무상성을 언급한 부분이다. 시간이 무상하듯이 시간의 영역에서 순환할 수밖에 없는 관계도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안타깝고 슬프지만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아픔을 이겨내는 변환과 성숙이라는 바뀜을 넘어선 바뀜을 깨우치는 글이다.
오래된 서책의 기억은 그 ‘묵은 냄새’가 그립고, 망건과 갓도 그 주인이 사라짐으로 그리움을 부르고, 영원할 수 없는 친구는 배신으로 또한 그리움을 갖게 한다. 소멸은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관계를 잉태하지만 그리움까지 불러오는 것은 하나의 섭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물들과의 작별」에서 ‘주인의 부재’는 침묵을 동반한 외로움을 가르친다고 했다. 여기에서 주인이 사라지고 나면 꿈을 담은 모든 사물이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기에 슬픔을 더해 준다고 했다. 그 사례로 ‘문살, 옹기그릇, 할머니의 의걸이, 다락, 고방, 그릇 닦기, 품위를 더하던 유기, 등잔’ 등의 문화는 문명의 이기利器에 의해 사라진 소중한 문화이기에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문화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수필쓰기의 대상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자연에 대한 관점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은 곧 삶의 가치체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구의 개발 중심의 자연관에 비해 우리 민족은 자연과 조화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순환을 순리라 생각하고 그에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섭리를 교훈으로 삼기도 하고, 괴롭고 힘겨울 때는 자연에 의지하거나 귀의하기도 한다. 때로 자연을 풍류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식은 선인들의 문학 작품에 잘 수용되어 전해오고 있다. 작품 「무심히 지나가는 것」에서는 생성의 계절인 ‘봄’에 여러 가지 반어적인 상황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꽃이 떠나듯 사람들도 떠났다고 토로한다. 봄에 받는 ‘부고訃告’ 외에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라졌다’ ‘소용돌이’ ‘절박함’ ‘막막함’ ‘만사가 초조하다’와 같은 어휘로 부정적인 상황을 드러내었다. 봄이라는 생성의 계절에 느끼는 반어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조와 불안은 이렇게 해소된다.

다행히 자연은 사람을 위로한다. 햇볕이 뜨거워져 불안하고 차가운 마음을 데운다. 초록으로 치장할 나무들은 이미 준비를 마쳤다. 산으로 혹은 식물원으로 가야 볼 수 있던 나무들이 생육의 조건에 상관없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가지를 흔든다. 잎사귀와 어울린 하얀 꽃이 활짝 핀 이팝나무 가로수가 눈길을 잡는다. 아름답고 풍성한 꽃자루를 보며 저절로 고맙다.
「무심히 지나가는 것」

부정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어휘들은 이 부분에서 ‘위로한다’ ‘마음을 데운다’ ‘초록으로 치장한 나무’ ‘가로수가 눈길을 잡는다’ ‘고맙다’ 같은 생성을 의미하는 어휘들을 불러들여서 밝은 곳으로 자아를 이끌어간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은 자연의 소멸과 생성의 섭리를 닮았다. 자연에 대한 믿음은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순리와 하늘의 섭리를 당연한 듯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러기에 자연도 생몰의 과정을 겪으면서 순환한다.’라며 매듭짓는다.

이제 수필집 『새집 이야기』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한 권의 수필집에는 4, 50편 많게는 100편까지 작품이 수록되지만 작품에 내재한 가치관과 철학은 그것을 대변할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류인혜 수필가가 창작에 많이 사용하는 어휘는 그리움이나 추억 이외에도 ‘사랑, 생명, 사람, 침묵, 기억’ 같은 어휘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이다. 이런 몇 개의 어휘로 작품 전체를 축약할 수는 없지만, 사람과 주변에 대한 사랑,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소중함,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 자연의 섭리에 대한 순응 등으로 그의 주제의식을 정리할 수 있었다. 수필은 언어를 통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춤 없이 고백하게 되는 고백의 문학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류인혜 수필가는 도회에서 작품 활동을 하지만 그의 작품에 쓰이는 어휘나 묘사를 위한 비유어, 또는 문장 내면에 숨은 분위기는 민속마을 참판댁 기와지붕이나 그 마을의 옹기종기 들어선 초가집 사립 같은 고색창연함을 발견할 수 있다. ‘벼락장조림, 애벌빨래, 애벌방아, 가마솥, 우물, 망건, 갓, 다락, 고방, 고리’ 같은 단어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이러한 어휘는 어휘가 지정하는 대상만큼 작품의 품격을 달리한다. 이에 따른 묘사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은 짧은 산문이기에 구성이 매우 중요하다. 수필은 개별적인 체험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체험으로 개념화하여 주제를 드러내는 구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록된 모든 작품에서 이러한 구조를 보이는 점이 그의 작품을 탄탄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풍산 류가 내 아버지에서 내 아버지에 대한 개별적인 체험은 남편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 대한 체험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을 읽는 동안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나 균제미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배려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창작하고 정성을 다하여 편집하여 상재하는 작품집에 대하여 둔하기 짝이 없는 필력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달리 매듭을 짓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류인혜 수필집 『새집 이야기』는 삶의 세계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고색창연한 그리움의 언어로 보편화하여 형상함으로써 모든 독자에게 공명共鳴을 일으키는 영혼의 샘물이라고 평할 만하다.

(2025.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