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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 52] 김종희의 수필 「바닥, 그 깊은 언어」250304

느림보 이방주 2025. 2. 15. 21:08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52] 이방주

김종희 수필 바닥, 그 깊은 언어---수필오디세이2024년 겨울호 게재

언어, 사유를 이끄는 변환의 에너지

이방주

언어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원하지 않아도 마음은 언어라는


거울에 비쳐진다. 말이 사유를 이끌고 사유가 말을 유도한다. 언어와 사유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장한다. 언어로 인해 성품이 격을 갖추고 성품으로 언어가 품격을 지닌다. 언어로 과거를 고백하고 현재를 다짐하고 미래를 맹세한다. 언어가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라는 말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언어는 표현하고 이해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언어습관에 의해 사고가 변환하고 성장한다.

김종희의 수필 「바닥, 그 깊은 언어」(『수필오디세이』 2024년 겨울호 게재)는 언어와 사유의 관계를 제재로 언어가 사유를 이끄는 변환의 에너지라는 주제를 형상화하였다.

이 작품은 언어의 연상 작용에 의해 정신적 불면의 밤이 바닥을 치고 변환하고 상승하는 과정에서의 심리를 묘사와 비유를 통해 그려냈다. 작가는 경매 물건이 있다는 지인의 편지를 받고 ‘경매’라는 잔인한 언어가 발단이 되어 절망으로 향하는 연상이 시작된다. 연상이란 하나의 어떤 관념에 의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작가는 마치 혼자 하는 브레인스토밍처럼 인접해 있는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연상한다. 경매의 심정은 ‘창백한 나무의 비쩍 마른 나뭇잎’이라는 이미지에 투영된다. 경매에서 ‘붉은 딱지’라는 언어의 잔인성을, 거기에서 ‘보트피플’을 연상한다. 경매는 삶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논리적인 사유 없이도 ‘무게’ ‘수렁’으로, 거기서 다시 ‘원망’ ‘비난’을 낳고 비난은 감정의 극단인 ‘비관’으로 몰아가게 된다고 했다. 비관은 바닥에 이르는 길이다. 생각이 비관에 이르면 ‘차라리’ 바닥으로 흘러가게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물이 바닥으로 흘러가는 물의 법칙이 보인다.

작가는 바닥을 ‘지난한 삶이 응집된 세계’라고 규정한다. 바닥의 이미지는 탄탄하고, 끄트머리가 아니고, 가장자리도 없는 근원이며 응축과 응집으로 결구되어 있다고 했다. 응축이 결이 되고 응집이 올이 된다는 말이다. 바닥에 이르면 누구든 삶의 근원적 물음을 갖게 된다. 언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가치 있는 존재로 자아를 재구성한다. 존재자가 존재로 나아가는 변환과 성장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여기에 수필적 상상의 미감이 숨어있다. 작가는 이쯤에서 바닥의 깊은 의미를 한 번 더 강조한다. 이언적이 탄핵과 유배를 겪고 현실적 자아의 수용을 통하여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 성숙에 이르는 서사 한 꼭지를 삽화로 들여온 것이다. 이 삽화는 바닥을 만나 힘차게 발 구르기를 할 때 삶의 의미가 상승하는 결과에 설리(說理)를 더해준다.

이 작품은 ‘바닥’이라는 언어의 본질적 속성을 추구하여 언어가 사유를 이끄는 변환과 성숙의 에너지라는 깊은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52] 이방주 '언어, 사유를 이끄는 변환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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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그 깊은 언어

김종희

불면의 모서리가 돌아눕습니다. 어둠은 경계가 없고 눈빛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합니다. 하얀 뼈가 드러난 앙상한 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잠의 언어를 기다립니다. 어쩌면 기다림이란 물기 빠진 등에 흐르는 입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경매 물건이 있다는 지인의 짧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경매라는 말에 잎 떨군 마른 나무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리저리 바람에 팔랑거릴 이파리 하나 건사하지 못한 창백한 나무의 비쩍 마른입이 경매라는 이름으로 비틀거렸습니다. 파리하게 드러난 맨살위로 집행영장 같은 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을 나무를 생각하면 경매는 참으로 잔인한 언어입니다. 그래서인지 경매물건이 있다는 말에 나는 보트피플이 된 한 가정이 떠올랐습니다.

삶의 과정이야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든 그만큼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테지요. 그 대상이 무엇이었든 어깨에 눌러 붙은 무게로 차라리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움직일수록 아니 몸부림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 때, 처지를 원망하게 됩니다. 원망은 비난을 낳고 비난은 비관을 낳으며 마침내 감정의 극단으로 매몰아갑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차라리 물처럼 흘러가도록 힘을 빼는 게 살아남는 길입니다. 흘러가는 일은 바닥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닥은 지난한 삶이 응집된 세계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바닥은 탄탄합니다. 바닥이란 위를 향한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바닥은 끄트머리가 아닙니다. 바닥은 가장자리가 없습니다. 가장자리가 없다는 것은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근원으로서의 바닥이니 당연 응축과 응집이 교직으로 결구되어 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삶이 무엇이냐 물어본다 해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부지런히 걸어야하는 동사 아닐까요. 바닥을 만나는 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수용입니다. 운명과 숙명사이 자아라는 끈을 놓지 않은 결과입니다. 대범하게, 호탕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로서 삶을 발견할 때 비로소 만나게 되겠지요. 가장자리가 없는 바닥을 생각하면서 무변루(無邊樓)를 세워 부릅니다.

회재 이언적이 이십대에 정립한 태극무변론은 조선성리학의 터를 열었습니다. 회재는 탄핵과 유배라는 삶의 바닥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형벌 가운데 하나인 유배는 주로 반란죄에 해당되는데 이는 정치적 사형을 의미합니다.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유배자의 삶은 매 순간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의 삶은 또 다른 세계로의 길을 열어가는 창이 되기도 했습니다. 생의 가장 절박한 순간 엄습하는 불안함 가운데서도 결코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지식인들의 삶. 그들은 닫힌 세계에서 또 다시 열린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유배는 절망이고, 좌절이고 삶이 끊어지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좌절의 시기에 자신을 가다듬은 학자들은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배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생을 빛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주어진 현실이 녹록치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절망을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하는가에 따라 삶의 시간은 달라집니다. 생은 서로의 바닥으로 만나 더욱 성숙해지는가 봅니다.

내 터를 갖는다는 것은 정박할 공간이 있다는 안정감이겠지요. 그러나 생사의 경계를 지켜보면 그 터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허무한 것이던가요. 평생을 일궈낸 터를 두고 결국은 소멸되고 마는 것이 생이잖아요. 생의 모든 것을 정박했던 터가 경매에 내몰린 현실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냉혹한 시장에 팔리는 불안한 눈빛의 난민으로 전락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것은 바닥을 향한 길 찾기를 하는 것입니다. 중력이 없는 우주의 유영처럼 그럴 때 시간의 흐름에 그냥 나를 맡겨야겠지요.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을 때까지...

바닥을 힘차게 발 구르기 할 때 삶은 상승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드러나듯 바닥이 밀어 올리는 삶의 그 깊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면의 밤,바늘 없는 시계에 고여 있을 잠의 바닥을 봅니다. 바닥, 그 깊은 언어에 경의를 표합니다.

 

김종희

1999 농민신문 신춘문예

저서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 <슈만의 문장으로 오는 달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