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 한코 들고 찾아가고 싶은 윗버들미
-목성균의 <명태에 관한 추억>을 읽고
이방주
그날은 가랑비가 내렸다. 목성균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는 날이다. 사과덩이가 불그스름하게 살을 찌우는 과수원 골짜기를 지나자 산협촌 막다른 길 끝자락에 산기슭을 따라 새로 지은 벽돌집들이 모여 앉았다. 마을 정자나무 밑에 차를 세우고 지나는 사람에게 선생의 생가를 물었다.
골목을 20m쯤 들어가서 선생이 살던 집을 허물고 부친에게 지어드린 아담한 집이 보였다. 골목에 백일홍이 빨갛게 피고 마당에는 잔디가 파랗다. 마당에서 차양을 타고 오르는 박덩굴에 하얀 조롱박이 대롱대롱 깔끔하다. 둘러보아도 명태 두 마리가 매달릴 만한 부엌기둥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부인이 돌아가서 마음을 달랬다는 부엌궁둥이도 보이지 않았다. 노쇠하신 부친이 살기 편하도록 대대로 살아오던 옛집을 허물고 지었다는 새집은 깔끔하지만 명태에 관한 추억은도 옛집과 함께 허물어진 것 같아 섭섭하다. 선생과는 옛 친구라는 주인이 이것저것 사연을 들려주었다.
수필 <명태에 관한 추억>은 목성균의 첫 수필집의 표제작이다. 《명태에 관한 추억》은 그가 1995년 57세에 월간 《수필문학》에 천료 등단하여 8년 만에 낸 수필집이다. 2003년 이 책을 내고 2004년 3월에 현대수필문학상을 받고 그해 5월에 타계하였다. 목성균 문학사는 참으로 굵지만 너무 쩗았다. 늦은 나이에 수필 공부를 하고 늦게 작품집 한 권 내고 바로 모두 내려놓은 것이다. 작품 활동하는 8년 동안 청주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수필가였다. 그런데 그의 유고집 《생명》이 수필과비평사에서 나오고 그의 수필 <세한도>가 문학교과서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유명해지자 자신이 그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기 때문이라는 평론가들이 몇몇 나오기도 했다. 그후 연암서가에서 《명태에 관한 추억》과 《생명》에 수록된 작품을 모아 이를테면 목성균 전집인 《누비처네》를 발간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 전통수필은 ‘사실 체험+해석’의 구조를 원형(原型archetype)으로 한다. 이러한 구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고려시대 이규보 이곡의 수필에 이어 조선의 박지원과 그 외 여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근현대수필도 법정스님이나 윤오영의 수필이 이에 따른다. 《누비처네》에 수록된 작품 101편을 살펴보면 목성균 선생의 수필도 한국 전통수필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성균 수필가가 이러한 전통수필의 원형을 의도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사유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구조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이 많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공감하는 것은 독자들도 역시 이러한 사유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보에서 윤오영의 수필에 이르기까지 계승 발전된 전통 수필보다 목성균의 작품이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인의 토속적인 정서와 생활의 규범을 자연스럽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수필이나 조선시대 수필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면 법정이나 윤오영은 보다 주관적인 규범을 객관화하는데 노력했다고 본다. 그런데 목성균 수필은 여기에 한국인의 토속적인 정서와 감추고 싶지만 드러낼 수밖에 없는 내면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고백한 언어들이 더 큰 공명을 일으켰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생활철학까지 은근히 내비쳐서 전통 계승과 창조적 발전의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으로 느낄 수 있지만 <명태에 관한 추억>은 이러한 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선 ‘명태’라는 소재를 통하여 가족들 간의 정과 규범과 심지어 세대교체라는 삶의 의미까지 담겨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교체가 마냥 즐겁고 뿌듯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 서사를 통해 배어나고 있어서 다른 작품에 비해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여기에 ‘무’라는 소재가 갑자기 개입하여 처음에 다소 지루한 감이 있지만 명탯국에서 명태와 무의 조화로 산해진미가 이루어지듯 명태의 상징성과 무의 상징성의 조화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 지루하지 않게 술술 풀어내는 기술이 독자를 빨려들게 한다.
<명태에 관한 추억>은 한국 전통수필의 구조로 한국인의 정서와 삶의 철학을 잘 담아내어 우리네 모두가 명태나 무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이 이 작품을 마다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성을 갖춘 작품이다. 삽입된 일화가 흥미롭고 서사나 소재마다 매우 자연스럽게 의미화와 해석이 이루어졌다. 특히 중심 소재인 명태와 무의 본질 추구를 통하여 주제를 이끌어내는 상상의 과정이 독창적이고 경이롭다. 명태와 무가 명탯국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듯이 그 의미도 하나가 된다. 비유나 묘사로 형상화한 기법이 미적 감동과 문학적 긴장감을 이루어내었다. 열 번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작품이다.
목성균 선생을 생전에 어느 행사장에서 딱 한 번 만나고 얼마 후에 그의 부음을 들었다. 단 한 번 만나서도 나는 그분의 작품 이야기를 하고 그분은 나의 작품 이야기를 했다. 말씀이 겸손하고 따뜻했다.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말이 통할 것 같다.’라고 하던 그분의 말씀을 단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다. 수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스승의 가르침이나 사형(師兄) 같은 문우가 도반(道伴)으로 함께 할 때 작품성을 좌우하기도 한다. 수필쓰기의 스승을 두지 못한 나는 이 점이 늘 아쉽다. 선생을 사형으로 모시고 다만 열 번만 소주를 마셨더라도 나의 수필이 이렇게 머뭇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고향인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윗버들미는 <명태에 관한 추억>에서 잔잔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었다. 이 마을을 찾아갔을 때 선생의 친구라는 분이 그랬고 그 친구의 부인이 그랬다. 눈이 살짝 내리는 날, 괴산 장에서 명태 한코 사고 막걸리 두어 병 받아 윗버들미를 찾아가면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 같은 날은 선생이 놀던 개울가 정자나무 아래에 앉아 명태찌개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
명태에 관한 추억
목성균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명태 한 코가 우리 집 부엌 기둥에 걸려 있었다. 그을음 투성이의 산골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주검 한 쌍의 모습은 제자리를 옳게 차지한 때문인지 '천생연분'이란 제목을 달고 싶은 한 폭의 정물화였다.
밤이 이슥해서 취기가 도도하신 아버지가 명태 한 코를 들고 와서 마중하는 며느리에게 “옛다!” 하며 건네주시는 걸 본 적이 있다. 남용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아버지의 호기가 참 보기 좋았다.
그날 “아버님, 저녁 진짓상 차릴까요?” 며느리가 묻자 아버지는 “먹었다” 하시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며느리에게 건네주시고 사랑으로 들어가셨다. 며느리는 두루마기 자락을 추녀 밑에 걸어놓은 등불에 비춰 보더니 즉시 우물로 가지고 가서 빨았다. 아버지는 취한 걸음으로 이강들을 건너서, 은고개를 넘어서, 하골 산모랭이를 돌아서 확장되는 대륙성 고기압에 두루마기 앞섶을 휘날리며 오셨을 것이다. 삶의 어느 경지에 취해서 맘껏 활개 젓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온 명태 두 마리가 얼마나 요동을 쳤으면 두루마기 자락을 다 더럽혔을까.
아침에 아버지가 “아가, 두루마기 내오너라.” 했을 때, 며느리는 그 지엄한 분부에 차질 없이 대령할 수 있도록 푸새다림질을 해서 늘 횃대에 걸어 둔 두루마기를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내다 드렸다. 그 두루마기 자락에 온통 명태 비린내를 칠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그 명태를 며느리에게 건네고, 며느리는 공손히 받아서 부엌 기둥에 걸었다. 한 집안 대주(大主)의 권위가 나를 감동시켰다.
젊은 날의 어느 늦가을, 갈걷이를 끝내고 어디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막차에서 내린 나는 차부 건너편에 있는 전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등피(燈皮)를 잘 닦은 남포 불빛 아래 놓인 어상자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명태들이 왜 그리 정답던지, 마치 우리 사랑간에 모여 놀다가 제사를 보고 가려고 가지런히 누워 곤하게 등걸잠이 든 마실꾼들 같았다. 그 명태를 한 코 샀다.
아버지가 두루마기 자락에 명태 비린내를 묻혀 가지고 왔다고 젊은 자식놈도 그러면 불경(不敬)이다. 옷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으려고 각별히 조심을 해서 명태 한 코를 들고 밤길 십리를 걸어 집에 오니까 팔이 아팠다. 연만하신 아버지가 취중에 두루마기 자락에 비린내를 묻히지 않고 명태 한 코를 들고 밤길 십리를 걸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결코 아버지는 당신의 출입 위상을 위해서 정성을 다한 며느리의 침선(針線)을 소홀히 여기신 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명태국을 끓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면서 “웬 명태냐?”고 하셨다. 아내가 “애비가 사 왔어요.” 하자 아버지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우리 집에 나 말고 명태 사 들고 올 사람이 또 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야전 지휘관이 지원군이라도 보충받은 것처럼 사기가 진작된 아버지의 그 말씀이 왜 그리 눈물겹던지. 그날 아침 햇살 가득 찬 안방에서 아버지와 겸상을 한 담백하고 시원한 명탯국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잦히는 밥솥처럼 마음이 자작자작 눋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는 명탯국을 안 먹는 놈이 있어서 나는 일단 그를 경멸한다. 명태는 맛이 없는 생선이라는 것이다. 생선 맛이야 비린 맛일 터인데 그놈은 비린 맛을 되 좋아하는 놈이다. 사실 맨 북어포를 먹어보면 알지만 솜을 씹는 것처럼 맛이 없긴 하다. 그런데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숨어 있던 북어살의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 살아난다. 그래서 말이지만 명태가 맛이 없는 것은 우리 입맛에 순응하기 위한 담백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태의 그 담백성을 몰개성적이라고 매도한다면 잘못이다. 생선은 비린 만큼 교만하다. 비린 생선들은 비린 그의 개성을 우선 존중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의도하는 맛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명태는 맛에 대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않는다. 줏대도 없는 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고 줏대 없는 그의 본성 자체가 그의 줏대인 것이다.
나는 여태껏 썩은 명태를 보지 못했다. 오늘날의 명태 말고, 냉동 산업과 운송 여건이 불비한 시절, 동해안에서 태산준령을 넘어 충청도 산읍 오일장의 어물전까지 실려 온 명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연하다. 명태는 썩지 않는 철에만 잡히기 때문이다. 명태는 바닷물이 섭씨 1도에서 5도가 되어야 산란을 하러 북태평양에서 동해로 떼지어 내려오는데, 그때가 명태의 어획기다. 부패의 철을 비켜서 어획기를 설정한 주체는 어부가 아니라 명태다. 가급적 주검을 부패시키지 않으려는 명태의 의지가 진화된 결과로 보고 싶다. 어차피 그물코에 걸릴 수밖에 없는 회유성(回游性)이 운명일 바에는 죽음을 부패시켜 가지고 혐오스러워하는 사람의 손길에 뒤채이며 어물전의 천덕꾸러기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게 명태의 결론이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생선다운 고결한 결론인가.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다. 참 가소롭기 그지없는 말이다. 명태가 들으면 “무슨 소리야, 썩으면 썩은 것이지-” 하고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부패 직전의 살코기에서는 글리코겐이 분해되어 젖산을 발생시켜서 구수하고 단맛을 낸다는 요리학적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건 숙성을 뜻하는 것이지 부패를 이른 말이 아니다. 자연에서 생선의 숙성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숙성을 보전하는 것은 기술이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요리사의 몫이지 준치의 몫이 아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꼭 청문회장에 나온 사람의 뻔뻔스러운 변명 같아서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준치는 4월에서 7월까지 부태가 촉진되는 철에 잡힌다. 제 주검의 선도(鮮度)에 대한 대책도 없는 주제에 ‘썩어도 준치’라니 명태에 비하면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본성이다.
보릿고개가 준치의 어획기다. 배가 고픈 백성들은 준치의 어획을 고마워하며 먹었으리라. 어쩌다 숙성된 준치를 먹었을지 모르지만 대개 썩은 준치를 먹고 삶의 비애를 개탄하는 마음으로 짐짓 ‘썩어도 준치’라고 역설적인 감탄을 했을지 모른다. 얼마나 우리들의 슬픈 시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감탄구인가.
명태는 무욕으로 일관한 제 생의 담백한 육질을 신선하게 보전해서 사람들에게 보시(布施)했다. 명태는 제 속을 비워 창난젓과 명란젓을 담게 주고 몸뚱이만 바닷가의 덕장에서 바닷바람에 말려 북어가 되고, 대관령 너머 눈벌판의 덕장에서 눈바람에 말라 더덕북어가 되었는데, 알다시피 제상의 좌포(左脯)로 진설되거나, 고삿상 떡시루 위에 실타래를 감고 누워 사람들의 국궁재배(鞠躬再拜)를 받은 귀물(貴物)로 받들어졌다.
명태를 생각하면 언뜻 늦가을 텃밭의 황토 흙에 하반신을 묻고 상반신을 햇살에 파랗게 드러낸 채 서 있던 청정한 조선무가 떠오른다. 그 순박무구하고 건강하기가 과년한 산골 큰아기 같은 조선무가 없으면 명태의 담백한 맛을 살려내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산골 동네 텃밭에서 그 청정한 무가 가으내 담백한 맛의 진수를 보여 주려고 뼈무르면서 명태를 기다렸다. 순박한 무와 단백한 생선의 만남, 그야말로 산해(山海)가 진미로 만나는 것이다.
명탯국을 끓이는 아침, 아내는 내게 텃밭에 가서 무를 두어 개 뽑아다 달라고 했다. 하얗게 무서리가 내린 늦가을 텃밭에 가서 몸을 추스르고 뽑혀 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클 대로 다 큰 조선무를 뽑아들면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이 결코 하찮은 삶이란 없다는 방자한 생각을 하게 부추기는 것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호기가 그립다. 아침 햇살 가득 차오르던 산골 초가집 부엌 기둥에 긍정적인 모습으로 걸려 있던 순박한 명태 한 코가 집안 대주의 권위로 바라보이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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