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허정진)의 수필 세계
비움, 변환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허석의 《시간 밖의 시간으로》 《꿈틀, 삶이 지나간다》에서
이방주
□ 수필이 찾아가는 길
신은 죽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말이다. 그가 왜 신은 죽었다고 말했는지는 상관할 바 아니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의탁해야 할 곳은 신이 아니라 과학이고 물질이 되었다. 과학이나 물질이 신보다 성스럽게 생각되는 시대이다.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 시대를 ‘궁핍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궁핍함도 깨닫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무지를 면하는 길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궁핍이란 존재자에만 관심이 있고 막상 존재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존재의 성스러움을 망각한 시대, 그 망각한 사실도 망각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한 말은 언뜻 ‘詩는 죽었다’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신이 죽었다는 말보다 시는 죽었다는 말이 더 아프고 절실하다. 시인은 인간의 소망을 신의 언어로 신에게 대신 들려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세계와 사물에서 성스러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자연의 성스러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가져야 한다. 시인은 존재의 성스러움을 신의 언어만큼 성스러운 언어로 형상하여 독자에게 경이와 공명(共鳴)을 주어야 한다. 그런 소망 때문에 성스러움을 잃어버린 오늘날, 신은 죽었다는 말이 시는 죽었다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궁핍의 시대란 시인의 눈이 성스러움을 보지 못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시인의 눈이 존재를 보지 못하고 존재자에게만 눈이 멀어있다는 말이다. 이미 멀어버린 눈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이미 그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수필가 허정진(필명 허석)은 끊임없이 수필을 쓰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확인한다. 세계와 존재자(存在者:존재하는 것)에게서 존재의 성스러움을 발견하려 끊임없이 정진한다. 허정진 수필가가 최근 발표한 두 권의 수필집 《시간 밖의 시간으로》(2020. 도서출판 경남), 《꿈틀, 삶이 지나간다》(2023. 나무향)에서는 창작을 통하여 존재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집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그 남편, 그 아내》가 있으나, 이 글에서 논의는 앞의 두 작품집으로 한정한다.
수필 창작은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존재자가 존재로 열어가는 길에 대하여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통하여 변환의 씨앗을 발견한다. 허정진 수필가가 발견한 변환의 씨앗은 바로 ‘관계’이다. 존재에서 관계로 가는 길은 ‘시간 밖의 시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시간이 있고 관계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 이와 같은 나아감의 ‘시간’과 길로 대유되는 ‘공간’을 통하여 완숙한 존재의 미라는 마을에 도달한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관계라는 마차를 타고 시간과 길을 지나 비움이라는 완성된 존재의 아름다운 마을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시간과 길을 따라 관계를 이루어 완성하는 존재의 미는 바로 관계가 열쇠가 되어 비움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존재를 확인하여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통하여 수필은 인간의 성숙과 변환에 기여하는 문학 양식임이 틀림없다. 허정진의 두 권의 수필집에 수록된 작품을 통하여 비움으로 완성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모습과 그 변환의 의미, 그의 인식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형상의 기법을 함께 알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 관계로 맺어지는 변환과 성장
인간은 끊임없이 변환하고 성장한다. 때에 따라 이러한 변환과 성장을 통과의례라고도 한다. 문화인류학자인 아놀드 반 헤네프(Arnold van Gennep 1873~1957)는 어떤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소속을 바꾸거나 자아를 바꿀 때 변환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숙과 변환은 ‘분리단계-변환단계-통합단계’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한 집단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불완전한 자아의 모순을 발견했을 때 그러한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의 변환 단계를 거쳐 통합단계로 이행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성숙과 변환은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허정진 수필가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산다. 그의 소망은 ‘시간 밖의 시간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아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저서 《시간 밖의 시간으로》 서문에서 인간은 ‘집착과 욕망을 부풀리며’ ‘가치보다는 성과만 요구’하며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고 삶의 모순을 성찰한다. 이러한 모순의 발견은 곧 성장과 변환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로 표현된 보편적 자아의 모순은 작품에서도 보인다. 〈숫돌을 읽다〉에서는 무디어진 연장을 자아의 마음이라 인식하고 숫돌에 갈아 벼리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숫돌과 마음의 상관성을 찾아낸 것이다. 결국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여문 것으로 구슬리는 연마의 법칙에 의해 변환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드디어 〈이제 ‘나’로 살기〉에서 평생의 과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낸다.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는 과거에 대한 미련도 평가도 벗어버리기로 한다. 그리고는 ‘이제 내가 아닌 나로 살아온 삶의 굴레를 벗어나야 할 때’라고 선언한다. 규범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세상 사람이 정해준 답’이란 바로 세계가 자아에게 강요하는 규범일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원하는 답은 소유나 집착이 아닌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변환과 성장에 대한 몸부림이다. 허물을 벗고 분리와 변환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 지름길은 바로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라 했다.
자아의 모순을 발견한 수필가 허정진은 그의 이름처럼 새로운 변환을 위하여 길을 찾는 일에 정진한다. 그것이 곧 관계이다. 그의 작품 〈문(門), 문(門)을 열다〉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연다. 그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닫힌 문을 열고 규범의 경계를 지우고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관계를 찾아 나서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빗장을 풀고 싶다’는 말로 관계를 잇고자 하는 소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관계에 대한 소망은 두 권의 수필집에 수록된 여러 편의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덩굴손〉에서는 ‘덩굴손’을 상관물로 ‘손을 잡는다는 것’의 의미를, 〈숫돌을 읽다〉에서는 누군가의 등받이가 되는 희생적 의미를, 〈거기, 빈 의자가 있었다〉에서는 혼자만의 여백 없는 자리에서 관계의 강한 소망을 명징하게 드러내었다.
관계에 대한 소망은 자아의 모순 발견에서 비롯된다. 작품 〈밥상〉에서는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방법으로 관계와 관계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일상에서 익명으로 함몰되어가는 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감’은 자아를 무기력하게 한다고 고백한다. 존재에 대한 고민이다. 이 작품에서 존재의 불안감을 치유하는 것은 관계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는 식구와 식구들이 차려 주는 밥상이었다. ‘따뜻한 밥상’만으로도 존재의 결핍은 해소되고 불안이 치유된다. 치유의 효과는 ‘나’로부터 고립과 소외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된다. 수필은 자아의 문제 해결로 인한 변환과 성장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치유를 지향하는 효과를 지닌다.
관계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작품이 여러 작품이 있지만 몇 작품만 제시해 보려고 한다. 작품 〈길 위에서 길을 찾다〉에서 작가는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일 때마다 길을 나선다고 했다. 그의 길은 ‘마음이 시공간이고 자아로 가는 통로’라고 했다. 그러므로 길은 삶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인류만이 아니라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체들에게는 길이 있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에는 항로가 있고, 물에는 물길이 있다. 보이지 않는 바람도 길이 있다. 길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에 규정할 수도 이름 지을 수도 없다. 그래서 노자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고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것도 항상 그것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개념 지을 수 없는 수많은 길에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규범에서 주체를 가늠할 수 없는 깨달음의 길과 위안의 길을 찾는다. 〈고향, 풍경으로 읽다〉에서 어린 시절의 삶의 감각을, 〈옛길을 걷다〉에서 길의 근원과 이울러 만남이고 소통이라는 의미를, 〈신발, 그 속살을 보다〉에서 길과 자아를 이어주는 신발의 의미를 관계라는 측면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는 길을 우주의 성지로 인식한다. 길은 변해도 길이라는 것이다. 공간은 변해도 공간이고 시간은 변해도 시간이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작가는 관계를 맺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의 모순을 완전한 존재로 변환한다. 〈늙어, 그래도 봄날이다〉에는 완성된 존재로 가는 길에는 시간의 자각이 있다. ‘노년의 시간’을 인정하고 수직과 수평의 시간으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직선을 버리고 곡선으로 살기를 희망한다. 규범과 관습 밖에서 세상을 보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시간 밖에서 시간을 바라본 결과 얻어낸 소득이다.
□ 완성된 존재의 아름다움
존재의 완성은 자아의 모순을 발견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환과 성장의 아름다운 모습은 작품 〈여백이 머무는 정자(亭子)〉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경북 예천의 초간정(草澗亭)에 찾아간다. 여기서 자연의 말씀을 듣는다.
여백이 있는 삶은 비움이 아닐까 싶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대나무가 곧게 자라는 것도, 범종이 멀리 울려 퍼지는 것도---(중간 부분 생략)---알고 보면 다 제 속을 비웠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일도 삶의 여백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고 너그러워져야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인가 보다.
〈여백이 머무는 정자〉에서
이른바 궁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어떤 문인이, 성스러움을 읽을 수 없어 ‘詩는 죽었다’는 절망에서 허덕이던 어떤 수필가가 바람으로부터 성스러운 말씀을 들은 것이다. 바람의 말씀을 듣고, 소나무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계수(溪水)가 불러주는 옛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에 빈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성스러움의 말씀을 듣는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여기에 완성된 존재의 미가 있다.
□ 상상 기법과 구성
문학은 인식과 형상의 산물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을 인상적으로 전달하여 독자의 가슴에 공명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형상 기법이다.
허정진 수필가는 형상화 기법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수필 창작법에 의한 인식의 과정과 상상의 전략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구성법이 다양하게 수용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덩굴손〉은 제재인 식물의 ‘덩굴손’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첫 단계에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물리적으로 묘사하면서 질료미를 찾아낸다. 다음 단계에서는 덩굴손의 추상적 속성을 추구한다. 그런 다음 삶의 진리를 이끌어내면서 주제인 관계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즉 ‘손을 잡는다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고 세상을 확장하는 일’이라는 삶의 원리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방법은 덩굴손이 생태적 특성에서 ‘관계’라는 상관성을 찾아 밝힘으로써 주제를 강화하는 형상화의 한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 이규보, 이곡의 작품에서 보이는 구성법으로 한국 전통 수필의 맥을 자연스럽게 계승한 것이다. 상관성을 통한 수필적 상상의 방법은 작품 〈안개에 대한 기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살다보면 자주 만나는’ 안개의 구체적 속성에서 인생의 추상적 속성을 찾아 상관성으로 주제를 강화한다. 안개는 곧 걷힐 것이므로 삶의 길에서 부닥치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상관성을 추구하는 기법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적절하게 활용하여 설리(說理)에 어긋나지 않고 문학적 긴장감과 함께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수필은 교술과 문학의 중간 지점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지닌다. 사실의 기록이라면 교술이겠지만 수필적 상상에 의한 진술이면 문학이다. 그래서 수필이 문학으로서 예술성을 지니려면 수필적 상상이 단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작품 〈숫돌을 읽다〉에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상상의 전략적 단계를 살펴보면, 그 첫 단계는 물리적 상상으로 ‘거뭇하지만 미끈한 피부를 가진 쑥돌’로 숫돌의 물리적이고 표면적인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다음 단계에서 ‘팥죽 같은 붉은 녹이 일어나고 쌀뜨물처럼 하얗게 번져가는 분비물을 보며 지금 정갈하게 벼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 마음의 한 축이 아닐까’라면서 숫돌의 속성을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역동성을 지닌 상상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사라져 간다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눈부신 신화일지도’라고 하는 것은 상상의 세 번째 단계인 원형적 상상이다. 이와 같은 상상의 방법은 작품에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주제를 보편화 개념화하여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품 구성 방법도 주제 구현에 많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꿈뜰, 삶이 지나간다》에 수록된 작품마다 서사와 서정의 구성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 수필을 통한 성장과 변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문학 행위의 치유 효과를 주장하여 정설이 되었다. 그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문학의 치유 효과는 독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인 작가에게 더 섬세하고 강렬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허정진 수필가는 현직에서 은퇴 이후에 본격적으로 창작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현직을 떠나 자유로운 몸이 되면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자칫 존재 의미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그는 존재자는 관계를 통하여 완성된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는 삶의 경지를 문학을 통하여 깨닫는다. 관계는 곧 시간과 길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세계로 거리낌 없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비움의 미가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허정진 수필가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작가로서 존재 의미를 확실히 드러냈으며, 수필문학이 갖는 독창적 효과와 문학적 기능을 드러내는데 공헌하였다고 본다. 이 글이 그의 문학적 신념이 독자에게 잔잔하게 전해지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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