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에코페미니즘을 인식의 바탕으로 섹슈얼리티의 형상 -함무성의 <실뜨기>

느림보 이방주 2023. 2. 5. 10:44

 21세기 수필은 ‘사람과 치유’가 중심 화두로 떠올랐다. 사람이 수필의 중심 화두라는 말을 언뜻 들으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또 ‘치유’가 중심 화두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치유라는 진정한 의미는 에코페미니즘을 사유의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에코페니미즘(ecofeminism)은 생태주의(ecologism)와 페미니즘(feminism)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에서 남성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생태계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자연을 우습게 아는 사고와 같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생태계에서 하나의 종(種)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생태계에서 다른 종을 지배하고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은 인류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상에 연결된다. 이와 같이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는 하나로 연결되는 사고이기에 에코페미니즘이 새로운 시대에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에코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세계는 환경론자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환경론자들은 자연환경을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터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호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삶의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비교적 피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코페미니즘이 조금 더 심층적인 사고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따라 21세기 수필이 새롭게 열어가야 할 화두 가운데 하나로 에코페미니즘을 들어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이 수필 창작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형상의 한 방법으로는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수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性, sex)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사실 사회가 구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가 구성되면서 성(性) 또는 성애(性愛)에 대한 규범이 정해지고 그 제재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생득적인 성이 규제받고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사회에 의해 강제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대 사회 이후에 여성의 삶과 섹슈얼리티가 문학에 자유롭게 수용되었다. 물론 우리 고전문학에는 현대문학 못지않게 매우 사실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문학에서나 가능했지 사실을 중요한 화소로 삼는 수필문학에서는 금기시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수필은 장르의 특성상 서술자가 작가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한 고백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를 생태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을 담아내는데 섹슈얼리티가 배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진정성 있는 고백이 생명인 수필 창작과정에서 온전하게 미의식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함무성의 수필 <실뜨기>는 월간 《수필과비평》 221호에 이 달의 문제작으로 선정되었고 허상문 교수 평론집 《서사는 살아있다》(2021, 인간과문학사)에 다시 수록되었다. 그만큼 수필가나 수필 독자들에게 문제를 제시한 작품이라고 평가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풀벌레 소리로 밤을 맞는 것으로 시작한다. 밤은 생명을 잉태하는 시간이고 그래서 역사의 주춧돌이 된다. 풀벌레 소리는 생명을 부르는 소리이고 역사의 터를 다지는 달구질소리이다. 아침을 맞아 배추밭으로 가면 배춧잎은 제 살을 달팽이나 배추벌레 먹이로 내주어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을 볼 수 있다. 자연 생태계의 상생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된다. 배추가 먹거리라는 것은 사람이나 배추벌레나 동등하다. 풀벌레도 유기농 농법으로 기른 배추임을 아는 것으로 작가는 규정한다.

여기서 배추벌레를 잡으려다가 섬서구메뚜기의 짝짓기를 본다. 짝짓기가 아니라 작가는 ‘사랑’이라 표현했다. 곤충이나 동물들의 짝짓기가 단순히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본능적 행위인지 사랑의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류의 그것을 성애라고 한다면 곤충도 성애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듯하다. 자연의 성애는 인간과 함께하면 더구나 작가 자신과 함께 하면 점입가경이다. 섬서구메뚜기의 성행위로부터 여치, 귀뚜라미, 고라니, 어린 시절 들었던 삼촌 내외로 발전한다. 그리고는 드디어 작가 부부의 성애로 전이되어 승화한다. 자연으로부터 다른 사람, 그리고 자아로 이르는 과정에서 모두가 생태계 속의 개체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성애는 자못 진지하고 적나라하다. 특히 ‘나’의 성애는 구체적이고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실뜨기에 비유하여 날틀, 쟁반, 젓가락, 절굿공이로 표현되는 묘사가 다분히 고전적이다. 성애를 묘사할 때 흔히 물레방아로 표현했던 우리 고전을 여기서 보는 듯하다.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는 모습이 눈에 삼삼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조금도 외설스럽지 않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기억인 ‘실뜨기’를 소환하여 상관물로 삼아 은유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뿐만 아니라 배추벌레, 섬서구메뚜기, 왕사마귀, 고라니의 열정적인 짝짓기 속에 화자의 성애가 함께 했기에 주저할 필요도 없고 부끄럽지도 않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들도 함께 하는 기분에 빠질 것이다.

왕사마귀의 성애는 수컷이 희생적이다. 이들은 성을 이루는 순간에 암컷과 수컷이 아니라 아비와 어미로 거듭나기에 수컷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암컷에게 영양을 제공한다. 이것은 암컷의 먹이가 아니라 이세의 먹이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수컷의 장렬한 죽음이 성스럽다. 수컷은 생명의 원천이고 암컷은 생장의 온실이다. 이러한 원리는 생태계의 다른 동물이나 인류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도 여성이 중심이거나 대등한 관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작가 부부의 성애는 고라니의 짝짓기와 같은 밤에 이루진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이루는 원리를 시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결미 부분에서 ‘풀벌레 잡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다짐한다. 상생의 지혜를 깨닫는 것으로 의미화를 마무리한 것이다.

함무성의 수필 <실뜨기>는 에코페미니즘을 바탕으로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고 섹슈얼리티의 표현 방법으로 형상하여 수필문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허구문학과는 다른 수필문학에 섹슈얼리티 수용의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2023. 5. 1.)

실뜨기

함무성

밤이 되니 제법 서늘하다. 창가의 풀벌레 소리가 마치 연주를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현악기의 스트링 같다. 칫 찌르르르. 쯔리이이~. 또르르르릉. 찌르르륵 찌르륵.

수컷들이 짝을 부른다. 여치, 땅강아지, 귀뚜라미, 방울벌레, 베짱이들이 한껏 청아한 소리를 낸다. ‘나를 받아 주오.’ 하는 사랑의 세레나데인가. 얼핏 불협화음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소리의 길이와 음높이에서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눈을 감고 들어도 오색의 찬란한 빛이 느껴지며 저절로 명상에 들게 된다. 어느새 가을이 문턱에 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가의 텃밭을 살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배추밭엔 어린 달팽이들도 붙어있고, 녹색의 배설물이 있는 곳에는 영락없이 연둣빛 배추벌레가 터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폴짝거리며 뛰는 섬서구메뚜기들이 배춧잎마다 구멍을 낸다. 땅 심 돋워서 농약 없이 키운 먹거리인지라 녀석들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풀벌레를 잡으려고 쪼그려 앉아서 배춧잎을 들여다보았다. 섬서구메뚜기의 어미가 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다. 짝을 지은 암컷과 수컷이다. 오호라, 등에 올라탄 작은 녀석이 서방이로구나. 녀석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제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연한 배추포기에 터 잡고 앉아 밭주인이 보는 줄도 모르고 태연히 서로 꽁지를 붙이고 ‘실뜨기’를 하는 중이다.

‘실뜨기’는 어렸을 적 우리 자매들의 놀이였다. 젖 물려 아기를 재워 놓은 어머니는 우리에게 조용히 놀아야 한다며 실뜨기를 가르쳐 주었다. 동생과 나는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굵고 긴 실을 둥글게 매듭지어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순서대로 날틀, 쟁반, 젓가락, 베틀, 소눈깔, 절굿공이를 번갈아 만들며 실이 엉킬 때까지 소근 대며 놀았었다. 잠든 아기가 깨지 않도록 숨죽이고 집중해야 하는 놀이이다.

실뜨기를 좋아한 건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얼굴이 뽀얗고 눈이 가느스름한 아가씨와 맞선을 보더니 서둘러 장가를 갔다. 새살림을 나기 전에는 우리 집 건넌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문 닫고 조용히 지내는 때가 많았다. 그때 어머니는 “삼촌네가 방에서 조용히 실뜨기를 할 때는 함부로 문 열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유년의 시절에는 삼촌 내외가 우리들처럼 정말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사춘기를 거치며 어머니가 말한 또 다른 ‘실뜨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곤충들의 ‘실뜨기’는 보기에 관능적이다. 등에 업혀 붙은 놈, 긴 꼬리를 말아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둘이 붙은 채 하늘을 나는 놈, 뒤집어진 채로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단단히 붙어 있는 놈, 나름 형이상학적인 오르가슴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음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한살이 과정에서 후손을 남겨야 하는 사명使命이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까.

접사렌즈로 풀벌레들의 모습을 찍었다. 참깨밭에서 사랑을 부르는 노린재는 엉덩이를 훼훼 흔들며 터울거리다가 짝이 정해지면 엉덩이끼리 잇댄다. 머리는 서로 반대편을 향한 채 미동도 없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는 사람의 인기척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사마귀의 사랑 방식은 독특하다. 수컷이 암컷의 등 위에 올라타고 사랑을 나눈 후 암컷이 수컷을 대가리부터 바수어 먹는다. 몸을 섞어 붙인 채 암컷에게 순순히 몸을 내주는 수사마귀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지아비로서의 희생으로 만족할까.

남자들은 암사마귀를, ‘제 서방 잡아먹는 독한 년’이라고 욕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수컷 왕사마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밤이 늦도록 술잔을 부딪친다.

독한 암사마귀는 짝짓기와 동시에 이미 여자가 아니고 어미이기 때문이리라.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고 경이롭다. 후손을 위해 넉넉히 양분을 섭취한 암컷은 몇 주 지나 돌 틈과 나무뿌리 사이에 알을 낳은 후 훌쭉해진 배와 기진한 팔과 다리를 숲에 내려놓는다. 먼저 보낸 수컷을 따라가려는 듯 기꺼이 생을 마친다. 숭고한 그들의 사랑 방식을 풀잎과 들꽃들은 알 것이다.

배추 포기마다 짝지은 섬서구메뚜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난다. 지난해 겨울, 앞산 고라니의 실뜨기를 눈치챈 밤에 남편과 나누었던 그 일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흰 눈이 사르륵거리는 밤에 고라니가 ‘쿠왝 쿠왜액!’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수고라니가 암컷을 부르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듣고 성숙한 암컷이 찾아오면 고라니 부부는 그때부터 은밀한 실뜨기에 들어간다. 새 봄에 태어날 새끼를 위해 수컷이 만든 보금자리에 신방을 차린 것이다. 짐승이나 곤충들의 실뜨기는 몇 시간, 혹은 며칠씩도 이어진다 하니 그들의 그 순간은 절실하고도 진지할 것이다.

짝을 정한 고라니가 실뜨기를 시작한 듯 숲이 조용해졌을 때쯤에 남편이 슬그머니 나를 흔들어 깨운다. 숲속마을에서 자연과 친구 되어 살자고 한 남편은 신방 차린 고라니들이 부러웠나 보다. 우리도 실뜨기를 하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깊고 길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숨죽이며 실뜨기를 했다. 조용히 날틀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쟁반도 만들어 보고, 젓가락과 절굿공이도 만들어 본다.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며 한 쌍의 겨울 고라니가 되었다.

숭숭 구멍난 배춧잎을 본다. 많이 먹어 두어야 할 섬서구메뚜기들의 삶이 절정에 이르렀다. 제 몸집의 열 배는 됨직한 암컷의 등 위에 작은 수컷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수컷은 옆으로 살짝 허리를 비틀어 암컷의 날개 밑으로 꽁지를 붙였다. 심지를 암컷에게 깊게 넣은 채 아무리 암컷이 폴짝이며 뛰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수컷의 모습은 작지만 당차 보였고, 길쭉한 주둥이를 내밀은 암컷은 풍만하며 수줍어 보였다.

점점 날씨가 추워진다. 고단했던 한 생을 마치게 될 섬서구메뚜기들은 땅속에 알을 묻고 이제 곧 시들어 가는 풀숲에 몸을 누일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들의 실뜨기는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풀벌레 잡는 일은 그만 두어야겠다. 배춧잎이 몇 닢 결딴난들 어떠랴. 풀벌레들의 향연을 축복하며 곧 끝나게 될 그들의 마지막 생生을 기다려 주자.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배추밭 고랑에서 섬서구메뚜기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일어선다. 미물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함무성 수필집 《실뜨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