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리더스피릿
김복진 김기진 가지 않은 길
팔봉산이 낳은 예술 혼, 형제의 생애와 아픔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팔봉리를 찾아간다.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는 팔봉산 서쪽 기슭에 다소곳하게 들어앉았다. 여덟 봉우리가 좌청룡 우백호 혈맥을 이루어 듬직한 어깨처럼 마을을 감싸 안았다. 한가위 연휴로 마을은 한가하다. 고샅마다 백일홍, 코스모스가 피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고향이 된다. 팔봉리는 내 고향 죽림동에서 한 고개 너머 이웃마을이다. 나보다 열 살 정도 연배인 팔봉리 사람들은 내가 졸업한 남이초등학교 동문이다. 팔봉리는 고향 마을이고 김복진, 김기진 형제는 나의 고향 선배 예술인이다.
정관 김복진(井觀 金復鎭1901~1940), 팔봉 김기진(八峰 金基鎭1903~ 1985) 형제는 팔봉산이 낳은 예술인이다. 김복진은 한국 최초의 양풍 조각가이다. 김기진은 계급주의 문예운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현대적 비평문학을 시작한 문인이다. 형제는 처음에 함께 계급주의 문학을 시작했다. 1925년 함께 조선프로레타리아 예술인 동맹을 결성하고 계급주의 예술운동을 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갖는 한 꼭지였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었다. 형 김복진은 프로문학의 사상적 지도자이고, 아우 김기진은 조직의 선도자였다.
안동김씨인 이 집안이 경주김씨 세거지인 남이면 팔봉리에 들어가 살게 된 연유는 알 수가 없다. 팔봉 2리 마을회관 마당에 김기진 작가 탄생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을회관으로 들어가 보았다. 노인 중에 경주김씨(81세) 한 분이 정관의 집안 내력을 대충 알고 있어서 두 예술인의 삶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정관 김복진과 팔봉 김기진은 부친 김홍규와 모친 김현수의 장남과 차남으로 두 살 터울로 태어났다. 팔봉리에서 한학자 김사과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정관이 7살 되던 해 팔봉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부친이 황간군수로 부임하자 황간으로 거처를 옮겨 군청 내아內衙에서 생활하면서 황간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정관이 1940년에 요절하자 팔봉이 정관의 유해를 조부모 묘소가 있는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묘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경주김씨 노인의 설명을 듣고 찾아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관의 묘소를 보지 않고는 이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아 2주쯤 지난 다음 다시 찾아갔다. 남이면 구암리 청주혜화학교 앞으로 농로를 타고 올라가다가 외딴집에 차를 세우고 외딴집 젊은 부인이 일러준 대로 시멘트 포장 임도를 걸어 올라갔다. 길이 끝나는 무렵에 올려다보니, 나뭇잎 사이로 ‘정관’이란 글자가 뚜렷하다. 묘지에 올라서니 오석에 새긴 ‘정관 김복진의 무덤’이라는 묘비가 보였다. 한글 표기라 반갑다. 비문은 정관 김복진 기념사업회(1995년 8월 18일) 명의로 되어 있고, 낯익은 몇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비문을 여기 옮긴다.
정관 김복진은 1901년 9월 23일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안동김씨 홍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관은 근대 조각의 선구자요 비평가이자 민족독립운동가였다. 청년 시절 3.1 운동에 참가한 뒤 일제에 맞서 항일 문예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 5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으며 1993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정관은 1925년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백화, 소년입상 같은 걸작을 제작했으나 1940년 8월 18일 40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그동안 전설 속의 조각가로 오랫동안 잊혀져왔지만 그의 예술 정신의 향기는 글로 남아 빛난다. 서거 55주년을 맞아 유족과 후배 조각가들의 정성으로 고정수가 만들고 다도화랑이 후원한 비를 여기 세운다.
묘소는 소박하지만 주변은 말끔하다. 청주미술협회에서 해마다 금초를 한다고 들었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청주미술협회(회장 손희숙) 주관으로 개최한 제26회 정관 김복진 추모 미술전을 둘러보고 문학도의 한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러웠는데 오늘은 미술협회 회원들의 정성이 부럽다.
김복진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비문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부친을 따라 황간군 내아에서 생활하면서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박영희, 이서고, 아우인 김기진 등의 문예청년들과 반도구락부를 조직하고 부친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동경미술학교 시절 김기진, 박승희 등과 토월회를 조직하여 연극 활동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으며, 1925년 박영희 김기진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인동맹(KAPF)을 결성하였다. 이 시기에 배재고보의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미술비평을 발표하였다. 그는 한때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토월회, 파스큘라를 거쳐 카프에 가담하여 사상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주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 활동과 사회주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0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몇 작품만 들면 <여인 입상>,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본존상>, <백화>, <소년>,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서양 조각 기법에 전통의 정신세계를 담아냈다고 미술 비평가들은 평가한다. 특히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이나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은 당시 우리 민족의 미륵사상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미륵이 미래불이라면 당시 우리 민족으로서는 미래의 꿈을 새롭게 다질 필요성을 강하게 가졌을 것이다. 그의 미래를 향한 꿈은 작품 <소년>에 깊이 담아냈다. 작품 <소년>은 당시의 가장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을 모델로 하여 미래 조국의 청년을 그려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복진은 속리산 미륵대불은 신라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 본존불의 상호相好로부터 계시를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처음 미륵대불 콘크리트로 공사를 하는데 ‘석굴암 본존불의 계시가 법주사 미륵대불이 되어 찾아들었다.’라고 했다. 미륵대불이 거의 완성 단계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단된 것을 후배 작가들이 완성했다. 그 후 법주사 금동미륵대불도 김복진의 콘크리트 미륵대불의 상호를 바탕으로 시대정신을 반영하였다고 하니 그의 작품이 근간이 되었다고 할만하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1950년 폭격을 맞아 거의 불타버려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김복진의 생애와 예술성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우리 지역 미술평론가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한국 최초의 양풍조각가이며 근대 조각의 선구자이다. 식민지 사회에서 근대 미술 비평가이며 문예운동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감옥에서도 밥 덩어리로 부처님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조각했다고 하니 그의 예술혼은 한국 화단의 자랑이고 우리 민족 자존심을 미술문화와 교육활동을 통하여 지킨 선구자이다.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그의 업적을 청주미술협회 예술인들의 정성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김복진의 아우인 팔봉 김기진은 1985년까지 살아서 문학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삶은 그 세월만큼 곡절이 많고 평가도 다양하다. 그는 시, 소설, 수필, 비평을 넘나들었던 만큼 삶 자체가 문학사이다. 문학적 공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생애의 곡절만큼 예술혼과 변절에 따른 우여곡절로 비판하는 문인들도 많다. 짧게 살아 후배들로부터 공적을 높이 평가 받는 형 정관만큼 더 큰 공이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생애가 안타깝다.
팔봉 2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표지석은 1993년 8월에 ‘우리문학기림회’의 명의로 되어 있다. 우리문학기림회 회원으로는 ‘이영구, 김효자, 고임순, 이명숙, 이명재, 허형만’으로 되어 있다.
作家 金基鎭의 故鄕
이곳은 新文學 초기부터 白潮 동인 및 파스큘라 회원으로 활약하며 문학 평론가 겸 작가로서 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八峰께서 태어나 자란 마을이다.
표지석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먼지가 묻고 바위 버섯이 나서 물로 닦아도 닦이지 않는다. 경주김씨 노인의 말을 빌리면 이 표지석은 처음에 팔봉 1리의 김복진, 김기진 생가에 설치해 놓은 것을 집 주인이 파서 버렸다고 한다. 버려진 표지석을 팔봉 2리 주민들이 수습해서 마을회관 마당에 설치했다고 설명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딸이 어느 대학교 선생이었다는데 지금은 와보지도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성악가 김복희씨를 말하는 것 같았다. 경주김씨는 ‘표지석도 딸이 세운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김복희’라는 이름은 없었다. 우리문학기림회는 우리 문인들의 고향이나 유적지를 찾아 작은 비를 세우는 사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20여 곳에 문학비를 세운 실적이 있는 단체이다.
김기진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일본 릿쿄오대학(立敎大) 영문학부에서 공부했다. 귀국하여 언론사 기자(매일신보, 시대일보, 중외일보)를 하면서 백조 동인, 파스큘라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계급 문예운동의 무대가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인동맹(KAPF)를 결성하였으며 실직적인 책임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3년 에세이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을 《개벽(開闢)》 7월호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조선에 프로 문학이 도래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조선을 계급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로 인식하면서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문화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중을 교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고 이러한 운동의 결과는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돌아간다고 예언했다. 귀국 초기에 쓴 이 글을 시작으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 <문예사상과 사회사상>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 등 비평문학의 틀을 다져 나갔다. 그는 1922년부터 사회주의 문학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회주의 문예운동이나 카프 조직 활동은 민족해방을 위한 사회주의 사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비판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 문학에 깊이 들어갈수록 심하게 갈등을 겪었다. 그의 고민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의 모순들, 계급적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926년 카프 일원인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의 논쟁’을, 1929년 임화와 ‘대중화 논쟁’을 겪으면서 그들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기진은 작가의 작품이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사회 지배자에게 환영받으면 그런 시대는 행복하고, 적대시 되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말기 김기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하면서 심하게 흔들렸다. 1938년 조선총독을 수행하여 남해안을 시찰하면서 친일적인 글을 써내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요구하는 대로 황도(皇道) 정신의 앙양, 대동아 신질서 이념 고양, 일본 교양의 습득을 강조하면서 적극적인 체제 협력을 선동했다.
한 사람에 천년의 목숨 없고
천 살을 산들 썩어 살면 무엇에 씁니까!
대대로 받아 내려온 제 몸의 이 더운 피
이 피는 조선의 피이며 일본의 피요,
다 같은 아세아의 피가 아니오니까.
반만년 동양의 역사가 가르칩니다.
지금, 동양의 역사를 동양 사람의 피로 새로이 쓸 때
지금, 아세아의 지도를 동포의 피로써 새로이 그릴 때
<나도 가겠습니다―특별 지원병이 되는 아들을 대신해서>의 일부 <매일신보>(1943.11.6.)
이 시를 읽으면 프롤레타리아의 선도자가 되겠다던 작가 김기진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소신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어떤 굴종적인 사람도 강압 없이는 쓸 수 없는 글이다. 그가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80년 전의 상황이 가슴 아프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김기진은 계급문학의 이론자이고 평론가이다. 1934년에는 카프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일제 말에 독립자금을 운반하다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출옥하여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반독재 투쟁으로 인민재판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떤 평론가는 김기진의 친일은 변절이 아니라 프로문학 운동부터 뼛속 깊이 식민성을 지닌 패배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일제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나도 가겠습니다> 같은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식민성을 근간으로 한 프로문학의 뿌리가 친일로 자라난 것이라 평가했다. 사실에 대한 해석은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은 상상과 다르다. 프로문학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김복진은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의 운동이었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우 김기진은 뿌리 깊은 식민성 패배주의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김기진의 딸 김복희 여사의 회상에 의하면 부친의 삶은 ‘탁류에 역행하는 몸부림’으로 조국 해방의 방법론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을 했고, 친일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이라고 호소했다.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구든 공과(功過)가 있다.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인들이 희생한 과실로 오늘의 풍요를 누리며 산다. 그런데도 선인의 공을 기리는 일에는 인색하고 과를 상상하여 확대하기에 서두른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선인들의 과를 반성하면서 미래 복철지계로 삼는 일도 중요하지만, 공을 기리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민족적 자존감을 더 굳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김기진의 친일이 가혹하게 비판 받는 것은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峰)’라는 창씨개명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학사적 공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후학들의 가혹한 비판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1985년 한국일보에서 팔봉비평문학상을 제정했다. 김현이, 김윤식, 김치수, 김우창, 김병익, 김주연, 염무웅 등이 이 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김기진의 친일을 어찌 보았는지 궁금하다. 친일을 격렬하게 비난해온 수상자의 제자들은 상을 받았다 하여 스승을 배반했는지, 학문적 엄격함에 근거하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수긍하면서 스승을 용납했는지 궁금하다.
우리네 삶에는 가고자 하는 길이 있어서 뜻대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꿈만 꾸다 가지 못한 길도 있다. 또한 가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어선 길도 있다. 우리 고장 청주, 내 고향 언저리 팔봉산 자락에서 태어난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복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과 비평문학의 기틀을 세운 김기진 형제에 대한 평가는 자유이다. 그러나 두 분이 살아온 길이 있고 가지 않은 길이 존재한다. 팔봉산이 낳은 예술 혼, 형제의 아픈 생애를 보면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었던 길과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한다. 미래를 위해서 이 시대를 사는 자신의 공과를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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